§ 나는 될놈이다 1418화
“도와주러 온 건데….”
“…….”
“…….”
태현의 말에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길드원들은 상황을 잊고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김태현, 우릴 너무 호구로 아는 거 아니냐?! 우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속을 것 같냐??”
“뭐 하는 겁니까!?”
제정신인 다른 길드원들은 동료의 폭언에 당황해서 말리려고 했다.
태현이 아무리 도와주러 왔어도 저런 말을 들으면 사람인 이상 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굳이 시비를 걸어서 일을 만든단 말인가.
“비켜! 네가 저놈의 시커먼 속마음을 몰라서 그래!”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김태현 때문에 순위 꼬라박아도 그렇지 여기서 시비를 걸면 어떡합니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죠!”
“난 지금 매우 이성적이야!”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길드원들은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의 지적에 억울해 죽으려고 했다.
저 순진하고 멀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현 놈한테 홀딱 넘어가서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김태현 놈의 허점을 지적해 주마. 자. 봐라. 지금 김태현은 해야 할 퀘스트가 여럿이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곳을 내버려 두고 여기 이렇게 왔겠냐?”
“어… 우리를 도와주려고요?”
“멍청한 자식 같으니! 당연히 우릴 공격하고 우리의 장비를 뺏으려고 온 거겠지!”
“김태현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아. 원래 그런 놈이라니까!”
그걸 듣고 있던 태현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마음이 아프군.”
“저… 저 저 가증스러운…!”
“농담이다. 그냥 해본 소리야. 그리고 왜 도와주러 왔냐니. 여기가 아탈리 왕국인 건 잊고 있었나?”
“……!”
아 그랬지?
하도 열심히 싸우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긴 태현의 왕국이었다.
워낙 넓어서 태현을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그렇군.”
“아니! 속지 마라!”
“제발 좀 닥치십쇼. 왜 그러시는 겁니까 대체?”
“여기가 김태현 왕국인 것과 김태현이 성 공략하는 걸 돕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야 너희들이 점령하면 지금 성을 다스리는 영주보다는 내 말을 잘 들을 테니까. 세금도 제때 낼 거고, 개짓거리 하지 말라고 하면 개짓거리 안 할 거고, 보스 몬스터 왕국에 나타나서 레이드 할 때는 지원도 해줄 거고.”
“…….”
“…….”
태현의 말에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몇몇 길드 간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아탈리 왕국이 그렇게 개판이었어?
‘국왕 자리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구나.’
‘난 그냥 부러워했는데….’
태현이 아탈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많은 길마들은 배가 아파서 떼굴떼굴 굴렀었다.
그 얄미운 김태현 놈이 국왕이 되다니!
누구는 지금 성 하나, 도시 하나 점령 못 해서 귀족들 친밀도 퀘스트를 깨거나 밑바닥에서 시작 중인데….
그런데 태현에게 실제로 들어본 소감은 상상과는 달랐다.
저렇게 말 안 들으면 왕 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뭐야. 왜 대답이 없지? 설마 남의 왕국에서 이렇게 성을 점령해 놓고 세금 하나 안 바칠 생각이었나?”
“아… 아니. 세금이야 바칠 생각이었지.”
“퀘스트 생기면 지원도 할 생각이었고.”
<검은 갈퀴>, <나인테일> 모두 태현에게 얻어 맞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세금을 안 낼 정도로 양아치는 아니었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왕국 성을 점령하면 세금을 내고 퀘스트 나오면 지원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
길드원들의 대답에 태현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된 거지. 그래서 너희들을 응원하기 위해 도와주러 온 거다.”
“고… 고맙습니다?”
좀 많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태현이 도와주러 왔다는 사실에 길드원들은 감사를 표했다.
일단 도와주러 왔다잖아!
“그런데 지금 성을 앞에 두고 싸우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너희가 케인이야?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부족하지?”
태현이 화를 내며 꾸짖자 두 길마들은 황당해했다.
‘왜 지가 화를 내?’
‘네가 뭔데…!’
물론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진 못했다.
태현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말 잘못하면 두들겨 맞을 것 같은 상황!
판온 1 때의 기억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다들 화해해라.”
태현의 말에 두 길드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눴다.
“자. 길마들도. …이름이 뭐였지?”
꽉-
검은 갈퀴 길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새끼야 그렇게 팼으면 최소한 이름은 기억해 줘라!’
“…남정훈.”
“그렇군. 남정훈. 거기 길마는?”
“클라우지아.”
“그런데 둘 다 왜 이렇게 날 노려보지?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1:1을 하고 싶다는 건가?”
태현의 질문에 두 길마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오해야. 오해.”
“그래? 다행이군. 자. 다 같이 화해.”
태현의 말에 두 길마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자세로 가까이 붙었다.
보고 있던 이다비가 물었다.
“이거 뉴스로 올릴까요?”
“흠. 앞으로 두 길드가 이 성을 잘 다스리려면 길마들끼리 친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듣고 있던 남정훈이 당황해서 물었다.
“무슨 뉴스?”
“파워 워리어 애들이 올리는 뉴스를 모른단 말이야? 매번 판온 속보 올리는 계정 있잖아. 잘됐군. 이번에 구독해 놔라.”
“…그게 파워 워리어 길드에서 운영하는 거였나!?”
남정훈은 경악했다.
어쩐지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정보들이 빠르게 올라와서 ‘와, 무슨 언론사에서 운영하는 계정인가?’ 싶었는데….
“잠, 잠깐! 거기에 이걸 올리겠다고? 그건 좀….”
“김태현 선수. 부끄러운데…!”
“뭘 그런 걸 부끄러워하고 그래. 자.”
둘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태현과 이다비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두 길드 마스터의 ‘참된 약속’….
오늘자 계정에는 두 길드 마스터가 이렇게 친하다는 소식이 하나 올라갈 것이다.
‘표정이 좀 굳은 것 같은데 포토샵으로 살짝 고칠까?’
* * *
“화해 시켰어?”
뒤에서 이세연과 다른 선수들이 다가왔다.
태현이 먼저 들어가서 이것저것 말을 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싸움이 멈춘 걸 보니 잘 끝난 것 같았다.
‘이세연까지…!’
남정훈은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태현도 무서웠지만 이세연 같은 네크로맨서는 이런 싸움에서 더욱 무서웠다.
1:1 전문 딜러보다, 혼자서도 군대를 끌고 다니는 네크로맨서는 이런 싸움에서 살벌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응. 잘 말하니까 이해해 주던데.”
‘아까 분명히 몇 명 공격했던 거 같은데?’
멀리서 봤을 때는 태현이 길드원들을 공격하고 있어서 ‘아 망했네’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보니 잘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두 길드가 싸운 게 누가 먼저 들어가냐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그래.”
“맞아.”
두 길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화해는 했다지만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기로 했는데 저렇게 나오다니. 애초에 배신을 하려고 했던 거겠지.”
“그건 우리가 할 소리다! 피해가 커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나오다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처음 약속했던 걸 지켜!”
“최소한 우리가 감시라도 하지 않으면….”
두 길마들이 다투는 모습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성 함락도 아직 안 됐는데 지금 벌써 다투는 건가?”
“그거야 들어가면 금방이지.”
“…둘이 정말 실력이 대단한데?”
태현의 말에 두 길마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칭찬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이세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칭찬 아니라 그쪽 둘 욕하는 건데….”
“뭐 이 자식이!?”
“이익…!”
그러나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
“?”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가면 되지 않나?”
“…그건 가장 안 되는 방법이지!”
남정훈은 소름이 돋아서 다급히 외쳤다.
옆에 있던 길드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김태현 선수가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닙니까? 가장 공정한 사람이잖습니까?”
“이런 미친 샊….”
남정훈은 욕을 하려다가 말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흠흠. 김태현 선수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못 믿는 거 같은데.”
“…우리 두 길드가 준비한 일인데 김태현 선수가 앞장서면 그건 그거대로 길드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는 거다. 알겠냐?”
물론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태현이 먼저 들어갔다가 성을 점령해 버릴 경우가 무서워서였다.
그리고 태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을 사람!
클라우지아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타협을 했다.
“그냥 둘이 같이 들어가는 건 어때?”
“그…. 그렇게 하지.”
원래 사람들은 싸우다가도 커다란 적을 만나면 화해하게 되는 법.
태현을 만난 두 길마는 순식간에 힘을 합쳤다.
그 모습에 멋모르는 길드원들은 감탄했다.
‘김태현 선수는 이걸 노린 거구나!’
이제까지 절대 협력하지 않던 이들이, 태현이 나타나자 바로 힘을 합치고 있었다.
김태현 선수는 이걸 노리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물론 이 길드원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았다면 바로 욕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김태현이 판온 1에서 우리가 점령한 광산 뺏은 건 우리 힘으로 시작하란 조언이었냐!?
* * *
쾅!
-모험가들이 성문을 부쉈다!
[스칼로 성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내성 안의 영주의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일정 시간 이상 점령하면 성을 갖게 됩니다!]
성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오는 메시지 창.
공성전을 한 사람들이면 모두 다 알고 있는 기분 좋은 메시지 창이었다.
가장 큰 1차 장벽을 넘었다!
“탱커들 앞으로!!”
“병사들 몰려온다!”
스칼로 성의 수비병들이 앞에서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드원들도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한 상황.
-조심해라, 모험가들아! 저 수비병들의 움직임에는 사악함이 숨어 있다!
“…???”
“????”
각종 버프를 걸고 스킬을 준비하던 길드원들은 당황해서 뒤로 시선을 돌렸다.
‘저 NPC는 대체 누구야?’
‘글쎄….’
우리 안에 갇혀 있는 황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조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황자는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조언을 던지고 있었던 거지만, 길드원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저 NPC는 대체 뭐하는 NPC이길래 저기 갇혀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
“김태현이 악마 데리고 다니잖아. 악마 아닌가?”
“악마치고는 너무 사람처럼 생겼는데…?”
“사람처럼 생긴 악마겠지. 저거 묶인 거 봐. 어마어마하게 묶였잖아.”
“그렇군. 말 듣지 말아야겠다.”
-아니, 이런 멍청한 모험가 놈들이!
페르소텔턴은 분통을 터뜨렸다.
조언을 해줘도 듣질 않다니.
“무슨 일이지?”
-잘 왔다, 모험가여! 저 놈들의 움직임을 조심해라. 무언가 수상한 게 있다!
“그래?”
태현은 의아해했다.
수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긴 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이다.
‘평범하지 않나?’
-굶주린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지 않나!
[카르바노그가 황자 본인에게서 나오는 기운 아니냐며 의아해합니다.]
사실 여기서 가장 굶주린 혼돈의 기운을 뿌리고 있는 건 오염된 황자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