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17화
“요즘은 남의 성 앞에서 싸우는 게 유행이야?”
“그런 유행은 태현 님 말고는 안 했을걸요….”
굳이 오스턴 왕국에 찾아가서 싸움을 벌였던 태현을 빼면 굳이 남의 성 앞에서 싸우는 사람은 드물었다.
많고 많은 곳에서 왜 남의 성 앞에서 싸우겠는가.
영주가 화나면 위에서 마법과 바윗덩이가 날아올 텐데.
“성 앞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성을 공격 중입니다!”
자세히 보니,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벽도 공격하고 있었다.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
“공성전 하는 도중에 싸움이 난 것 같은데?”
“스칼로 성을 공격하고 있다고?”
태현은 의아해했다.
영주가 되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
그건 바로 NPC 영주가 점령하고 있는 도시나 성을 공격해서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쉬운 방법을 왜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영주가 점령하고 있는 성을 공격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귀족 NPC들은 본인도 강하거나 데리고 있는 기사, 마법사들이 무지막지하게 강하기 마련.
거기에 영주쯤 되면 데리고 있는 병사들도 어마어마했다.
그쯤 되면 플레이어들 수준으로는 공격할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당장 길드 동맹도 오스턴 왕국을 먹을 때 정면 승부를 해서 먹은 게 아니었다. 기습해서 쓰러뜨렸지.
“요즘 플레이어들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져서 그런지 많이 보이더라.”
“진짜?”
태현이야 레벨 200 구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랭커들 중에서 빠른 이들은 레벨 300이라는 마의 벽을 돌파한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난 만큼 판온 플레이어들도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스킬도 많이 풀리고 장비도 점점 좋아지고….
덕분에 그 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퀘스트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런 공성전도 그중 하나였다.
“성이나 도시 점령만 하면 마을이나 요새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관리하기 힘들 텐데….”
“보통 그거까지 고민해서 결정하진 않지.”
사실 대형 길드들한테 ‘왜 영지가 필요한가요?’라고 물어보면 ‘영지가 있으면 수입이 있고 퀘스트가 있고 길드원들에게 어떤 장점이 있고….’이런 체계적인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영지 점령에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같은 이유가 사실 더 컸다.
그만큼 영지는 길드의 로망인 것이다.
“그러면 저건 두 길드가 힘을 합친 건가?”
“합쳤다가 싸움이 난 거겠지. 아무래도 영주 자리는 한 명만 앉을 수 있으니까….”
성을 공격하다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난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이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퀘스트를 깨는 것보다 앞에 있는 놈이 더 짜증 날 때도 많은 것이다.
‘잠깐. 어느 길드든 간에 저 성을 점령하면 나한테 이득 아닌가?’
지켜보던 태현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영주는 태현에게 세금도 적게 바치고 명령해도 잘 듣지도 않는 놈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이 점령하면 그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물론 플레이어들도 태현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영주보다는 좀 더 상황 굴러가는 걸 잘 알았다.
마음먹으면 태현이 공격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배 째라는 식으로 협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싸움을 말려야겠다.”
“응?”
“저기 저놈들 도움을 받으시려는 겁니까?”
류태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 주변 사냥할 때 굳이 저기 길드원들 도움까지는 필요 없어 보였다.
정말 강한 몬스터가 나온 것도 아니고 굳이…?
-멍청하기는!
뒤에 갇혀 있던 황자가 류태수를 꾸짖었다.
-저 모험가의 깊은 뜻을 모르겠느냐! 지금 굶주린 혼돈이 근처에서 도사리고 있는데, 모험가들끼리 싸우면 안 된다는 거다!
“오오….”
류태수는 또 그 말에 솔깃했다.
확실히 김태현 선수라면….
“오빠. 저거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고 있겠지.”
“아닌가?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 * *
<검은 갈퀴> 길드와 <나인테일> 길드는 판온 1 때부터 이어져 온 역사 깊은 대형 길드들이었다.
길드 동맹 같은 이들이 오스턴 왕국에서 설칠 때도, 최강지존무쌍 길드 같은 이들이 우르크에서 새 영지를 세울 때도, 이들은 굳이 그런 일에 끼지 않았다.
현재 플레이어들 수준으로 무리하게 나서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 예상은 많이 빗나갔다. 길드 동맹부터 시작해서 여러 이들이 영지를 얻는 데 성공했으니까.
대형 길드들은 뒤늦게라도 영지를 얻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조용히 레벨 업을 하고 힘을 키운 덕분에 힘이 밀리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키우는 것보다 이렇게 점령하는 게 나을 거야.
-맞아. 마을이나 요새부터 언제 키워?
이런 대형 길드들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밑바닥에서 영지 키울 때 이렇게 커다란 성을 점령만 하면 바로 얻는 셈 아닌가.
물론 일단 점령을 해야 했지만, 요즘 성공 사례를 들어보면 꽤 그럴듯해 보였다.
-최강지존무쌍 길드하고 낚시꾼 놈들이 힘을 합쳐서 성 점령한 거 봤지? 이제 충분히 공성전 할 만하다니까.
-꼭 거기까지 안 가도 트레움 시 봐라. 여러 길드들이 같이 운영하잖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해서 뭉친 게 바로 <검은 갈퀴>와 <나인테일>.
처음에는 꽤 괜찮았다.
두 길드의 랭커들과 고렙 플레이어들이 달려들어 성벽을 후려치고 각종 스킬을 날리자, 스칼로 성의 성벽이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칼로 성의 성문에 크게 데미지가 들어갑니다!]
[스칼로 성의 성문이…]
[스칼로 성의 성벽이 흔들립니다!]
[……]
-수비병의 화살!
-성벽 강화!
-모험가 놈들! 감히 이 성을 공격하다니!
[스칼로 성에서 평판이…]
[친밀도가…]
[……]
수비대장이 분노하며 외쳤지만 길드원들은 무시했다.
이미 저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다른 거였다.
“우리 검은 갈퀴 길드가 먼저 들어가겠다!”
“뭐? 우리가 먼저 들어가기로 했었잖아?”
“지금 보면 나인테일 길드의 피해가 너무 크다. 성문으로 먼저 들어가기는 위험하지. 우리가 대신해 주겠다는 거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기로 분명히 정해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니? 그저 배려해 준 거다!”
“배려는 무슨. 성주 자리를 혹시 독점하려는 거 아니야?”
“그 소리는 내가 할 소리다!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이 먼저 들어가는 이상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겠나!”
“그러면 처음에 정할 때 말했어야지,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추하지도 않냐?”
두 길드가 같이 점령하기로 했지만, 원래 판온은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곳이었다.
한 길드가 후다닥 먼저 들어가서 점령해 버린 다음 다른 길드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다른 길드는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다.
그걸 알았기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퉜다.
“이 자식이 밀쳤어!”
“무기를 휘둘렀다!”
“싸우지 마, 멍청한 놈들아! 아직 성 위에 적들이 남아 있는데!”
-크하핫. 멍청한 모험가 놈들! 자기들끼리 싸우다니!
위에서 NPC들이 비웃어도 길드원들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앞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더 위험했으니까!
“그만 싸워라!”
-살기의 일격, 화이란스 검법!
-폭풍 회오리! 끓어오르는 화염의 벽!
아무리 말려도 한 번 싸움이 터지면 막기 힘든 법.
“그만 싸워라!”
“비켜! 헛소리하지 말고!”
“그만 싸우라니까!”
이제 길드원들은 아예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좀 더 화끈하게 대응했다.
“그만 싸우라고 했잖아 이 자식들아!”
퍼퍼퍼퍼퍽!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방패가 파괴됩니다!]
[스턴 상태에 빠집니다!]
[시야가…]
“크아아아악!”
태현은 닥치는 대로 주변에 싸우고 있는 놈들한테 폭딜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숨통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방패가 부서지고 갑옷이 아작나고 스턴 상태 걸려서 싸움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위력!
“그만! 싸우라고! 내가! 했잖아! 왜! 말을! 안! 듣냐!”
“악! 아악! 그만해! 진짜 죽겠다고!”
사람이 HP 10% 밑으로 내려가면 없던 협조심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착한 사람이 됐다.
태현이 닥치는 대로 상대방 피를 깎아버리면서 폭딜을 넣자 길드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싸움을 일단 멈췄다.
“그… 그런데 누구신데, 왜 끼신 겁니까?”
같은 길드 조장이나 간부가 싸움 말린 줄 알았는데, 잘 보니 길드 마크도 없었다.
상대 길드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어디서 온 사람이지?
“지나가다가 왔다.”
“…….”
“…….”
길드원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판온에 미친놈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나가다가 남들 싸운다고 거기 끼어서 ‘안 멈추면 내가 죽여 버린다!’ 이러는 놈이 있을 줄이야.
-죽일까요?
-그만둬라. 보통 랭커가 아닌 것 같다.
몇 대 맞으면 알 수 있었다.
상대의 폭딜을 봤을 때 여기 있는 길드원 대여섯은 그냥 녹을 수 있는 상위권 랭커가 분명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우린 <검은 갈퀴> 길드인데….”
“검은 갈퀴? 어디서 들어봤는데.”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꽤 익숙했던 것이다.
“아. 판온 1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나?”
“물론 판온 1에서도 활동했죠.”
길드원들은 살짝 자부심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판온 1에서부터 내려온 길드들은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판온 2에서 새로 생긴 길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끈끈함!
실제로 여기 길드원들은 서로 안 지 오래되었다. 그 단단하게 뭉친 힘이 바로 길드의 저력이었다.
“혹시 예전에 비겔란 광산 점령한 적 있나? 그, 지하 11층짜리 던전.”
“점령한 적 있었… 는데. 그건 왜 갑자기?”
“그냥 생각이 나서 물어봤다.”
갑자기 뜬금없이 판온 1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모습에, 검은 갈퀴 길드는 혼란에 빠졌다.
그건 옆에 있는 나인테일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판온 1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 미안하군. 얼굴에 가면 붙이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어서.”
태현은 가면을 벗었다.
익숙한 그 얼굴에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길드원들은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김… 김태현…!!!!”
“왜 그러십니까?”
판온 2에서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은 의아해했다.
김태현이 무슨 아무나 붙잡고 패는 약탈자 플레이어도 아니고, 꽤나 인성 좋은 랭커 아닌가.
“김태현이다!!”
“모두 전투 태세로!!!!!”
“길마님을 보호해!!!”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길드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길마를 지키면서 바로 진형을 짜기 시작!
그 모습에 판온 2부터 들어온 길드원들은 더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빨리 이쪽으로 와!! 김태현 옆에 있다가 뒤지기 싫으면! 김태현이 널 붙잡아서 인간 폭탄 만드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에이… 케인 선수가 인터뷰에서 밝혔잖습니까. 그거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자원한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이 멍청한 뉴비 새끼야!”
판온 1 때부터 했던 길드원들은 가슴을 탕탕 쳤다.
새로 들어온 놈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김태현.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여기 와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거냐!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검은 갈퀴 길마는 살벌하게 외쳤다.
이번에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하게 엿보였다.
“…저 뒤에 한국 대표팀 선수들 있는 것 같습니다. 길마님.”
그 의지는 바로 5초 만에 사라졌다. 길마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바뀌었다.
“…김태현!! 길드 동맹이나 가서 패지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