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16화
사실 아키서스 성기사들이 그리 약하진 않았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어중간한 용병 NPC들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운 이들.
애초에 성기사란 직업을 달고 있는 사람 중 약한 사람이 드문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아키서스 성기사들을 꺼려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부금을 내놓게!
“…일단 도망치고 이동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건 원래 배가 부르면 생각이 바뀌네. 지금 받지 않았다가 나중에 자네들이 배를 째면 어쩌란 말인가? 물론 배를 째겠지만 돈은 안 나오지 않나.
“…여기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설득을 포기하고 돈을 내밀었다.
아키서스 성기사들은 이런 부분에서 절대 설득이 되지 않았다.
돈 관련해서는 철저한 이들!
만약 도움을 요청하면 자기 레벨에 맞춰 일정한 기부금을 바쳐야 했다.
-저건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인가?
-아니! 이데르고 교단 놈들도 있지 않나!
아키서스 성기사들은 열심히 싸우는 두 사악한 집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플레이어들은 다급히 말했다.
“싸울 필요는 없으니 저희가 마을로 갈 때까지만 호위해 주세요!”
-가장 좋은 호위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험가여?
“글… 글쎄요? 신성 마법으로 버프를 걸어주고 주변을 꽉 막아서 지켜주는 건가요?”
-정답은 적을 쓰러뜨리는 걸세! 적이 쓰러지면 완전히 안전해지지!
“뭔 헛소리를…!? 원래 안 그랬잖아요 당신들!”
안 보던 사이에 아키서스 성기사들이 유난히 전투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황당했지만 아키서스 성기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돌격 준비!
-돌격 준비, 이 신성한 땅에서 저 더러운 놈들을 몰아내자!
“아니! 진짜! 이 인원으로 뭘 어떻게 하려고요!”
-그러면 지원을 불러오게!
[<지원 요청…> 퀘스트가 추가되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울고 싶었다.
그냥 다른 기사단 만났으면 지금쯤 편하게 마을에 도착했을 텐데, 어쩌다 미친놈들을 만나서…!
* * *
“대륙에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어.”
“대형 퀘스트 터지려나?”
“그래도 이상하지 않겠지.”
태현과 이세연은 하늘섬 퀘스트를 하나 마무리 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기운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모험가들이여! 더욱 더 강해져야 한다. 어떤 적들이 와도 대적할 수 있도록!
“…….”
이세연은 매우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던졌다.
뒤에 우리에 갇혀 있는 황자가 매우 신경 쓰였던 것이다.
태현은 이세연이 떨떠름해하자 의아해했다.
“왜 그래?”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
물론 태현은 진심으로 묻는 거였다.
악마들도 우리에 갇혀서 묶여 다니는데, 황자라고 우리에 갇혀서 묶여 다니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들어보니까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여러 길드에서 다 비슷한 준비를 하고 있더라.”
“맞아요. 영지를 갖고 있는 대형 길드들은 다 벌써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와. 파워 워리어도 하고 있어요?”
“아니요….”
이다비는 살짝 풀이 죽었다.
다른 대형 길드들이야 ‘대륙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세금 내놔!’가 가능했지만, 파워 워리어는 그런 길드가 아닌 것이다.
‘아이고 길마님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습니다 차라리 배를 째십쇼!’가 나오는 게 파워 워리어!
이다비가 시무룩해지자 이세연은 급히 위로했다.
“파워 워리어는 영지가 없으니까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죠!”
“맞아. 이다비. 파워 워리어는 오히려 더 유리하지. 남들이 필요한 재료를 독점하고, 단합해서 잡일 퀘스트 단가를 올릴 수 있잖아.”
흉흉한 소리를 산뜻하게 하는 태현의 모습에 이세연은 황당해했다.
지금 훈훈하게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나 빼놓고 다른 대형 길드들이 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좀 어이없긴 하지만….”
태현의 말에 이세연은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봤다.
다른 대형 길마나 랭커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서로 대화를 하고 ‘요즘 뭐하냐?’ 정도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태현은 거기에 안 껴주는 것이다.
대형 길마들 중 2/3 이상이 판온 1에서 태현한테 당한 적 있던 사람들!
-김태현 불러서 뭐하는지 묻자고? 너 그러다가 김태현이 우리 던전에 와서 깽판치면 네가 책임질 거냐??
-김태현을 부르면 그냥 내가 나간다.
태현의 이미지가 아무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변했다지만, 직접 당한 랭커들이나 길마들은 쉽게 잊지 않았다.
함께해서 끔찍했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물론 태현은 이런 거에 슬퍼하진 않았다.
자기들끼리 놀든 말든….
“나도 대비는 해놔야겠어. 나중에 대형 퀘스트나 이벤트 터지고 나서 대비하면 늦을 테니까.”
“어떤 식으로 하려고?”
“중심 지역부터 보강해야지. 너도 하고 있지 않아?”
태현이나 이세연은 다른 대형 길드들과는 좀 상황이 달랐다.
지금 영지를 갖고 있는 대형 길드들은 대부분 마을이나 요새를 하나 점령해서 키우거나, 새로 만들거나 하는 식이었다.
정말 운이 좋은 길드들은 한층 더 규모가 큰 도시나 성 같은 걸 얻었고.
이런 도시나 성 하나만 잘 다스리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었다. 길드의 모든 자원과 노동력이 다 투자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현과 이세연은 무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
이건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길드 동맹 같은 경우는 아예 숫자로 밀어붙였다.
시작부터가 여러 대형 길드의 연합이었고, 중국 길드답게 길드원들 숫자도 어마어마했고, 게다가 외부 투자자들한테 현금까지 받아가며 쏟아붓고 있었으니….
그러나 태현과 이세연은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수도부터 하고 있어.”
그렇기에 둘의 운영 방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의 직할령 중심으로 개발.
말이 왕이지, 수도 같이 직접 다스리는 영지를 제외하면 다른 영지에는 다 영주 NPC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주 NPC들은 보통 말을 잘 안 들었다.
태현도 당장 아탈리 왕국의 남부 영주들과 내전을 벌이지 않았던가.
덕분에 점령한 영지는 다른 길드들한테 판매해서 짭짤하게 벌어들였지만….
-골짜기와 수도를 집중적으로 다스리고 발전시키되, 왕국 스탯이 너무 망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관리를 하고, 점점 내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런 식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국에 여러 영주 NPC들이 남아 있었지만 태현한테 직접 개기지 않으면 태현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몇 번의 내전과 태현의 명성 스탯 때문에 영주 NPC들도 덤비지 않기도 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사막 쪽에 부족들이 되게 많거든. 이런 부족들은 말 안 듣는 편이 많아서 공포로 위압을 해야 해.”
“네크로맨서니까 그런 점에서는 불리하겠군.”
“그렇다니까? 네크로맨서가 이럴 때는 진짜 불편해.”
이세연은 살짝 억울함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남들 앞에서는 절대 이런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태현 앞에서는 별로 상관없었던 것이다.
스미스나 김태현 같은 성기사/교황 직업들은 뭘 해도 NPC들의 호감을 사고 작업도 편하게 했지만, 네크로맨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언제나 페널티를 받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꽤 잘 되어가고 있어.”
“오… 어떻길래?”
“보여드릴까요?”
이다비가 바로 영상을 켜서 태현에게 내밀었다.
아스비안 제국의 수도.
황제가 사라지고 나서 이세연과 그 길드원들이 자리 잡은 수도는 시커먼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언데드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원래 대부분의 주민들이 언데드였기에 이런 식으로 바꿔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죠? 흑마법사들도 많이 가요.”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세연은 이다비의 칭찬에 매우 쑥스러워했다. 평소에 그 차갑던 얼굴을 살짝 붉힐 정도로.
‘아니… 부럽잖아?’
태현은 살짝 배가 아파왔다.
남들이 잘나가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이세연이 잘나가면 이상하게 배가 아팠다.
아스비안 제국의 수도는 짧은 시간에 상당히 많은 발전을 한 것 같았다.
거대한 몬스터들의 뼈로 만들어진 성벽과, 그 성벽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들.
그리고 도시 곳곳에 위치한 죽음의 마탑들.
이세연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고, 이세연의 길드원들이 다 같이 한 게 분명했다.
‘음….’
태현은 문득 케인과 이세연의 길드원들을 비교해 봤다.
그러자 갑자기 슬퍼져서 태현은 생각을 멈췄다.
‘이런 거 비교하지 말아야지.’
“여러분들 이거 드시고 하십시오.”
류태수와 류다영이 김을 내뿜는 차를 갖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제 곧 본선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다시 뭉쳐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집중적으로 따로 모여서 하는 것보다 평소부터 이런 식으로 파티 플레이를 하는 게 훨씬 더 호흡 맞추기에 편했다.
사실 그렇게 깊은 생각과 분석으로 결정 내린 건 아니었지만….
-한국대표팀의 특별한 훈련 방법, 어떻게 훈련했는가?
-평소 플레이에서 합을 맞추지 않으면 억지로 맞춰봤자 의미가 없다, 김태현의 철학….
-다른 국대팀은 반성해야 한다! 평소부터 같이 움직여야….
…원래 이 바닥은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하는 곳.
한국대표팀이 압도적으로 예선을 뚫고 올라간 덕분에 다른 대표팀들도 진지하게 파티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선수들은 질색했다.
-저 밥맛없는 놈을 평소에도 만나야 한다고??
-내 퀘스트를 내버리고 저놈하고 같이??
…남들이 안 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사냥할 게 모자라진 않겠네. 집중적으로 필드 돌면서 깨자. 새로 생긴 던전 있으면 공략하고.”
태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다영은 안심했다.
이게 정상적인 파티 플레이지!
필드에서 사냥하고 던전 들어가서 던전 깨고….
태현을 따라다니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 *
[스칼로 산맥에 진입합니다!]
[……]
[……]
아탈리 왕국 중부 지방 쪽에 있는 스칼로 산맥.
스칼로 성이 위치한 산맥으로, 산길에서 꽤나 레벨 높은 몬스터들이 나오는 걸로 유명했다.
“산맥을 빠르게 훑어버리고, 발견된 던전 있으면 공략하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지금 이 주변에 있는 애들은 다 연락하고 있어요.”
“그래. 부탁할게.”
“성이 있으면 거기 다스리는 귀족 NPC 불러서 도움 요청해도 되지 않습니까?”
류태수의 질문에 태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이 라인업이면 그런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 않기도 하고… 경험치도 깎이잖아. 무엇보다 귀족 NPC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공적치 포인트 깎여.”
“저런…! 김태현 선수는 왕인데!”
“그러게 말이다.”
“부른 다음 인질로 잡아버리면 어떻습니까?”
“…아, 아니. 그건 다음에 하자.”
태현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던 것이다.
뒤에 묶여 있던 황자가 친절하게 조언을 던졌다.
-말 안 듣는 귀족 놈들을 불러내서 붙잡는 건 예전부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모험가여! 놈에게 독을 먹인 다음….
황자의 조언을 더 들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멀리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쾅!
“???”
“싸움 났는데요?”
저 멀리 성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태현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
꽤 많은 길드원들이 성 아래에서 치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저런 싸움을 벌일 만한 곳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