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14화
젊은 직원이 목소리를 깔고 속삭이듯이 말하자 괜히 홍 부장도 긴장이 되었다.
“수배 중인 범죄자라도 되냐?”
“아닙니다!”
젊은 직원은 펄쩍 뛰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제가 몇 번 말했던 프로게이머 있잖습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난 임X환 이후로 모르는데….”
“아, 그러니까 부장님도 판온 같이 하자니까요! 제가 판온에서 요즘 건물 짓고 있는데…!”
“넌 현실에서 짐 옮기고 게임에서도 짐 옮기고 싶냐? 참 징한 놈이네.”
“그게 그거랑 다르다니까요! 어쨌든 제가 말했던 그 김태현 선수예요!”
젊은 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발을 동동 구르자 홍 부장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긴 저럴 때긴 하지.’
생각해 보니 홍 부장도 젊을 때 임X환 같은 선수를 만나게 되면 벌벌 떨면서 기뻐했을 것 같았다.
“알겠다. 이해해 주마. 가서 잘 말하고 사인 받아와.”
“예? 아니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냐?”
젊은 직원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홍 부장을 질책하자, 홍 부장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릇 팬이라면 선수가 부담되지 않게 멀리서 조용히 좋아해 줘야지, 어떻게 직접 말을 겁니까!”
“…너 생각보다 되게 귀찮은 놈이었구나?”
홍 부장은 젊은 직원이 생각보다 이상한 놈이라는 걸 깨닫고 놀랐다.
평소에는 성실하고 조용해서 이런 줄 몰랐는데….
“알겠다 그럼. 그냥 조용히 짐이나 옮기자.”
“근데 사인은 받고 싶습니다….”
“너 뒤통수 한 대 때리기 전에 그만해라. 그러면 저 젊은 선수는 벌써 결혼한 건가? 그렇게 잘나가면 일찍 결혼해도 이상할 거 없긴 하지.”
“결혼한 게 아니라 같은 팀 선수입니다.”
“아. 그래? 사이가 너무 가까워 보여서 결혼한 줄 알았네.”
홍 부장의 말에 젊은 직원은 피식 웃었다.
“부장님. 뭘 모르시는군요. 둘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
‘이 자식이 은근히 재수없네.’
결혼도 안 한,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뭘 모르시네’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 눈깔이 있으면 봐라. 친해 보이잖아.”
“아. 아니라니까요? 둘은 그냥 동료 사이에요. 친한 걸로 따지면 그 케인이라는 선수도 있는데 김태현 선수하고 더 친하다고요.”
“케인인지 개인인지 모르겠고 결혼 생활 오래 한 내 눈깔로 봤을 때 저건 발전 가능성이 있는 친한 사이야.”
“하… 부장님.”
젊은 직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팀 KL의 역사와 경기, 선수들에 대해 잘 모르니 이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부장님. 저와 같이 방송 몇 개 챙겨보시죠.”
“내가 왜?”
“아, 보시면 안다니까요!”
* * *
“직원분들이 유난히 친절하신데… 뭔가 이상하군.”
“저희가 누군지 아는 거 아닐까요?”
“하긴 그럴 수도.”
태현은 자신이 유명하다는 자각이 유난히 부족한 편이었지만, 요즘은 꽤 달라진 편이었다.
이제 슬슬 자신의 유명세에 적응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인해달라고는 안 하시는데?”
“아마 저희가 누군지는 알아도 저희 팬은 아닌 거 같아요.”
“으음. 다른 팀 팬이라면 좀 미안하게 됐는데. 껄끄럽군.”
“에이… 괜찮을 거예요. 저분들도 프로인데 일에 설마 그런 감정을 갖고 올까요?”
한국 게임단들 중에 팀 KL한테 안 두들겨 맞은 게임단은 없었다.
워낙 압도적으로 패고 다녔기에 1부 리그의 다른 게임단들은 팀 KL과의 경기가 늦춰지거나 취소되기만을 빌 정도였다.
-팀 KL과의 경기가 우천취소되길….
-우천취소가 대체 어떻게 판온 리그에서 가능함?
-팀 KL 숙소에 폭우 들이쳐서 정전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태현 씨 같은 한국인이면 양심상 적당히 팹시다 이러다가 우리 게임단 2부 리그로 내려가면 책임질 겁니까???
-응~ 어차피 김태현 있어서 한국팀은 충분해~ 약한 팀은 내려가도 돼~~
…다른 게임단의 골수 팬이라면 태현의 이름을 말할 때 가슴 속에 씁쓸함이 차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직원들이 다른 팀 팬이라면 그걸 존중할 뿐.
태현은 조용히 입 다물고 짐을 옮겼다.
홍 부장은 말 한 마디 안 하고 미친듯이 빠르게 짐을 옮기는 태현의 솜씨에 감탄했다.
‘어떤 선수인지는 몰라도 대단하구나!’
젊은 시절 홍 부장보다도 더 빠른 움직임.
마음 같아서는 직접 스카우트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돈을 다 내놓고 저렇게 일을 같이 해주는 걸 보니 보통 친절한 게 아니었다.
“저, 가만히 쉬셔도 됩니다.”
“아… 뭐 같이 하면 일이 더 빨리 끝날 테니, 같이 하죠.”
“그,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젊은 직원이 숨을 거세게 내쉬며 말하자 태현은 멈칫했다.
‘내가 다치면 다른 게임단이 유리해진다 이건가?’
“제가 들게 해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그런 의심과는 달리, 직원들은 태현의 짐을 거의 뺏듯이 대신 가져가서 들었다.
태현이 다치기라도 해서 월드컵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면 그건….
‘김태현, 이사 옮기다가 사고로 불참! 그 이삿짐센터 직원은 A, B, C… 국민 여러분들은 이들을 발견하면 돌팔매질로 따끔하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같은 기사들이 나올지도 몰랐다.
서로 의욕 넘치고 힘 넘치는 만큼 이삿짐 정리는 기록적일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떠나기 전에 홍 부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김태현 선수십니까?”
“아. 예.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기 저 친구들이 김태현 선수의 어마어마한 팬인데, 부끄러워서 말을 못 걸겠다고 하더군요. 혹시 사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요. 주시죠.”
선선히 받아 드는 태현의 모습에 홍 부장은 솔직히 감탄했다.
일류 선수라더니 인성도 일류였던 것이다.
“같이 사진 찍게 이리 오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어휴. 그래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
홍 부장이 부르자 직원들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기뻐했다.
‘그렇게 좋냐? 어린 놈들….’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해줬다는 마음에 홍 부장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그러나 홍 부장은 알지 못했다.
그의 자식들도 어마어마한 팬이었다는 것을.
집에 돌아가서 ‘오늘 일하면서 김태현 선수 만났다’ 하는 꺼내는 순간, ‘사인 받아왔어요?’가 나올 게 분명했다.
물론 그걸 모르는 홍 부장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저는 됐습니다.”
“에이. 부장님. 하나 받아가세요. 이럴 때가 또 언제 온다고.”
“아니… 선수 팬도 아닌 사람이 받아가면 실례지!”
태현은 그 말에 웃으면서 사인을 새로 한 다음 건넸다.
“그러면 주변에 다른 사람들 주거나, 나중에 팬 되시면 쓰세요. 그냥 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이 진짜 인성이….”
“그렇죠? 케인 선수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
태현은 매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케인 그렇게 성격 안 나빠…!
홍 부장은 사인을 챙겼다. 팬은 아니더라도 저렇게 생각해 주는 선수는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면 방송이라도 한 번 봐야겠군.’
* * *
이다비는 감동에 젖은 표정으로 집을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얻은 집.
“뭐부터 해야 할까요?”
“이제까지 안 들여놨던 생활용품들 들여놓기?”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 거 말고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태현의 모습에 이다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 좀 더 낭만적인….
그런 무언가가 있을 것 아닌가.
“집들이! 집들이 어떠세요?”
새로 이사를 했으면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집들이 잔치를 벌이는 게 규칙 아니겠는가.
“그거 준비하는 쪽만 힘든 거 아니야? 굳이 뭐하러….”
말하던 태현은 이다비의 표정이 살짝 시무룩해지는 걸 알아챘다.
비효율적이고 쓸모없는 걸 알아도 누군가는 가끔 그걸 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하냐는 사람들은 사회적 관습과 관계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지. 집들이는 평소 잊었던 이웃과 친구들에 대한 감사를 되새길 수 있는 효과적인 사회적 풍습이잖아?”
“그렇죠!?”
“응. 주변 사람들 초대하자.”
이다비가 신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이다비의 두 동생은 태현을 빤히 쳐다봤다.
“뭐. 왜?”
“…진짜 언니 대하실 때는 다른 선수들 대하실 때랑 태도가 엄청 다르신 것 같은데요…?”
“당연히 다르게 대하지. 팀 KL 선수들이 이다비 절반만큼만 열심히 하면 내가 잔소리를 안 하지 않겠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태현의 모습에 두 동생들은 감탄했다.
저렇게 흔들림 하나 없다니!
“근데 이다비 친구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일 텐데. 누굴 초대할 거 같아?”
“어….”
“그게….”
두 동생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이다비는….
친구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가난했고 학교 졸업한 다음에는 바로 돈 벌어야 했으니 인간관계가 쌓일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걸 태현에게 말했다가는 아무리 이다비라도 울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초대할 사람이 없는데요….”
그러는 사이 이다비가 다시 돌아왔다.
현실 파악이 끝났는지 얼굴이 시무룩해져 있었다.
“괜찮아. 나도 친구 별로 없어.”
“최상윤 씨 있잖아요?”
“별로 없다고 했지 아예 없다고는 안 했잖아.”
“이세연 씨도 있고….”
“아니 왜 하필이면 이세연을? 그리고 이세연은 나보다 이다비 너하고 더 친하지 않아?”
“그런가요?”
이다비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세연과 있을 때 보통 어떤 대화를 나눴지?
-아 김태현 저거 또 말 안 듣고!! 제발 미친 짓 좀 그만해! 그러다 죽으면 어쩔 건데!
-야! 야!! 돌아오라고!!
-저, 주장님. 주변에 사람들 시선 있는데 체통을 지키셔야….
-류태수 넌 입 다물고 있어!
-넵.
-아… 진짜… 저거… 이다비 씨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다비 씨 없었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아, 아니에요.
-진짜예요. 팀원들 보면 답 나오잖아요. 한 명은 김태현 팬에 다른 한 명은 김태현이 뭘 하든 관심 없는 사람이라… 진짜 이다비 씨 없었으면….
어라?
생각해 보니까 정말 이다비 본인과 더 친했던 것 같았다.
태현과는 보통 싸웠고 이다비하고는….
“그렇지?”
“그, 그러네요?”
“둘이 친구 맞다니까.”
이다비는 태현한테 어느새 설득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집들이 할 때 이세연을 불러야겠군.”
“어… 음… 어….”
이다비는 뭔가 꺼림칙한 게 있어서 말리려고 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왠지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이세연은 됐고. 팀 KL 선수들도 부를까?”
“아. 네! 좋은 거 같아요 그건.”
“팀 KL 선수들 전부 다 불러? 빼고 싶은 놈 있으면 빼도 돼.”
“…괜찮거든요 진짜?”
태현이 이상한 배려를 하자 이다비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수도 부를까? 여름방학일 텐데.”
“지금 바쁠 텐데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 *
케인의 여동생이자 유지수의 친한 친구, 김예리는 유지수가 꺼낸 말에 놀랐다.
-나는 게임단 운영에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어.
하긴 관심을 갖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유지수 본인이 뛰어난 랭커였으니까.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에 도전해 볼 생각이야.”
“와. 게임단 인턴에 합격한 거야?”
“응? 게임단 인수를 할 생각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