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03화
흔히들 쓰는 말들 중 버스 태워준다는 말이 있었다.
레벨 높은 플레이어가 레벨 낮은 플레이어를 위해 몬스터를 몰아오고 잡게 도와주는 것.
레벨 낮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혜택이었다.
그리고 꼭 레벨 낮은 플레이어만 하는 일도 아니었다.
레벨 높은 플레이어들도 이런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이다.
대형 길드 같은 경우는 핵심 랭커들을 밀어주기 위해 다른 길드원들이 몰이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흔했다.
질 좋은 필드나 던전을 점령하고 몬스터들을 몰아와서 랭커가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장하는 랭커들은 그 경험치 획득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하진 않았다.
당장 던전을 점령당해서 쫓겨난 플레이어들만 여럿이었으니까.
태현이나 이세연처럼 전통적으로 난이도 높은 퀘스트 위주로 깨가면서 레벨 업을 하는 랭커들이 인기가 좋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새로 등장한 신진 랭커들도 길드에 들어가기보다는 태현의 방식을 따라하곤 했다.
성장도 성장이지만 인기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때문에 태현은 저런 몰이사냥이나 버스 태워주는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굳이 따진다면 저런 거 하는 놈들을 훼방놓는 사람에 가까웠는데….
‘편하잖아?’
-자. 다시 모아와라!
왕자가 명령을 내리자 전차꾼들은 우르르 바퀴를 굴리며 출발했다.
워낙 빠른 이들이라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몬스터들을 또 한 번 몰아왔다.
-또 한 번 실력을 보여다오! 모험가!
“…….”
[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경험치가…]
[……]
‘이게 권력의 단맛인가?’
[카르바노그가 정신차려달라고 외칩니다!]
생각보다 페르소텔턴 왕자의 매력은 무시무시했다.
팍팍 오르는 경험치와 마법 스킬을 보자 도망치려던 태현의 마음이 살짝 약해질 정도였다.
…좀 더 있어도 되지 않나?
‘그보다 이렇게 대접 잘 해주는 왕족은 처음 같은데.’
보통 판온에서 왕족들은 ‘거만함’ ‘재수없음’ ‘사악함’ ‘아키서스를 싫어함’ 같은 옵션들을 패시브로 달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페르소텔턴 왕자는 사람은 좀 맛이 갔어도 꽤 성격이 착한 편에 속했다.
이렇게 모험가들에게 뭔가 대접해 주려는 것만으로도 왕족들 중에서 상위 1%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도록. 모험가. 난 모험가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저 몬스터들은 그저 우연히 여기 왔을 뿐이지. 뛰어난 모험가라면 원래 스스로 잡아야 하는 거지.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러는 사이 이세연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둘이 뭐하고 있어?
-어… 이세연. 문제가 생겼어.
-왜? 왕자가 죽이려고 해?
-아니. 왕자가 생각보다 착해.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너도 와보면 알걸.
이세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불려왔다.
경주 실력이 좋은 만큼 왕자한테 불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 모험가. 저기 몬스터들을 한 번 처리해 보게. 흑마법사인가? 언데드로 일으킬 수 있도록 시체를 잘 보존해놔야겠군.
“…???”
이세연도 당황했다.
아니 왜 이렇게 친절하시죠?
“그렇지?”
“응… 좀 많이 어색하고 이상한데.”
둘 다 살짝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왕족이 이렇게 잘해주는 건 생각보다 적응이 잘 안 됐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사냥 좀 더 해도 되지 않나? 게다가 왕자 하는 거 보니까 이 주변의 미발견 던전을 되게 잘 알고 있는 거 같아.”
“그거 정말 좋은 생각 같아.”
이세연은 태현의 의견에 바로 동의했다.
뒤에 여러 명의 랭커들이 ‘같이 왕자를 타도하거나 탈출하죠!’라고 하고 장로들도 ‘왕자님을 구해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태현과 이세연은 무시하고 일치단결했다.
이번 기회에 하늘섬 던전 좀 깨자!
“그런데 김태현. 너네 팀원 대회 준비해야 하지 않아? 대회 열려면 빨리 도시 회복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우리 게임단 규칙이지.”
퀘스트 앞에서는 팀원의 대회 정도는 미뤄둘 수 있는 게 태현이었다.
* * *
“휴. 강한 던전을 들어가면 좀 더 빨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게. 정말 아쉽네. 이 근처에 쓸 만한 던전이 없어서 더 빨라질 수가 없어.”
태현과 이세연은 왕자 들으라는 듯이 슬픈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불려 온 이다비는 매우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둘 다 연기 솜씨 하나는 일품인 사람들인 만큼 매우 그럴듯하긴 했는데….
솔직히 좀 민망했던 것이다.
‘뭐하시나 했더니 두 분이….’
나름 한국 최고 랭커들로 뽑히는 사람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화술 스킬이 매우 높…]
[명성이…]
[경주 실력이…]
-…걱정하지 마라, 모험가들아! 이 페르소텔턴은 굶주린 혼돈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은 모두 꿰고 있다.
생전 굶주린 혼돈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웠던 페르소텔턴은 굶주린 혼돈이 있는 던전들을 찾는 스킬을 갖고 있었다.
이 젊은 모험가들이 더 빨라지고 싶어서 저렇게 말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를 따라와라! 너희 모험가들이 강해질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
“감사합니다!”
태현과 이세연은 이다비를 데리고 왕자의 뒤를 쫓았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요?”
“알아서 잘 하겠지.”
[<영원한 풍경의 호숫가>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명성이…]
[……]
[……]
[……]
왕자가 안내한 던전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탁 트인 호숫가와 조용하고 평온한 숲.
언제나 컴컴한 지하와 끓어오르는 용암과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위험한 던전을 공략했던 태현과 이세연에게, 이런 평온한 던전은 매우 기쁘….
“…….”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
…지 않았다.
태현과 이세연은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딱히 이상한 거 없어 보이는데요?”
“이다비. 난이도가 높은 던전인데 이렇게 멀쩡해 보이면 그게 더 위험한 거야. 차라리 수상하게 보이면 그게 낫지.”
“맞는 말이에요.”
둘 다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은 랭커들답게 이런 부분에서는 민감했다.
원래 판온에서도 장비 다 벗고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더 위험한 법.
-언데드 라이즈, 정예 속성 부여, 끓어오르는 어둠의 오오라, 영원히 쏟아지는 제국의 힘….
이세연은 바로 언데드 군대를 소환하고 각종 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태현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강철 방어막, 드워프의 빛나는 강철검….
“…???”
이세연은 언데드 준비하다가 당황했다.
“넌 왜 마법을 써?”
“난 쓰면 안 되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태현의 준비는 보통 폭탄 제작하거나 아니면 근접 딜링 스킬 준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법, 그것도 보기 드문 금속 마법을 걸어주고 있다니.
“마법 스킬 올려야 해.”
“넌 대체 스킬 몇 개를 찍으려고 그러는 건데?”
어찌 되었든 간에 언데드들한테 버프를 걸어주는 건 좋은 일이었다.
태현과 이세연은 차례대로 마법을 걸어가며 언데드 군단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빛나는 금속으로 번쩍거리는 장비를 입은 정예 데스 나이트들이 탄생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
“폭탄 같은 걸 추가해 볼까? 만약의 경우 자폭할 수 있도록.”
“언데드들도 반란 일으키거든?? 절대 안 돼.”
이세연은 단칼에 거부했다.
언데드들은 살아 있지 않았지만 판단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폭탄 같은 걸 매달고 움직이게 했다가는 대번에 반란도가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왕자 전하. 이 호수는 평화로워 보이는데, 굶주린 혼돈의 수하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겁니까?”
태현의 말에 왕자는 좋은 질문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건 호수였다.
‘호수 안에 숨어 있나?’
그러면 물 속성 괴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상대하기 쉬울 텐데.”
호수나 바다 안에 사는 몬스터들은 꼭 잡아야 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상대하기 쉬웠다.
치고 빠지면서 상대를 끈질기게 괴롭힐 수 있는 것이다.
-모험가들! 저기 괴수가 나온다. 보아라!
촤아아아악!
[<타락한 호수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굶주린 혼돈의 기운이 퍼져나갑니다!]
-보이나?
“…….”
“…….”
거대한 호수의 물이 통째로 의지를 갖고 일어나는 모습에 태현과 이세연은 할 말을 잃었다.
왕자를 이용해서 미발견 던전들 좀 돌고 경험치를 얻으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너무 강해 보이는 놈이 나온 것이다.
“…덩치만 저렇고 실제로 그렇게 강하지 않은 걸 수도 있어.”
“그럴듯하군. 언데드들을 보내보자.”
태현의 말에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언데드들을 보냈다.
데스 나이트들은 말에 탄 채 속도를 올리며 호수의 정령에게 돌격했다.
쾅!
소리는 크게 났지만 호수의 정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인에게 들이박은 고블린 정도로 크기 차이가 심하게 났다.
-므어어어어어어.
호수 정령은 주먹을 휘둘렀다.
화염과 번개에 비해 물은 강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물도 절대 약한 원소는 아니었다.
막대한 질량으로 뭉친 물은 살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지진이 일어납니다!]
“일단 피하자!”
태현은 이다비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낭티오네!”
-키이잇?
태현은 낭티오네 위에 올라탔다. 이다비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드래곤들 위에 타는 게 낫지 않나요?”
“저런 대형 몬스터 상대할 때는 시선 돌리는 게 차라리 나아.”
용용이와 흑흑이는 태현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날아올랐다.
둘 다 강력한 마법사인 만큼 호수 정령에게도 크게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퉁-
태현은 인사 겸 상대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폭탄을 날렸다.
[호수 정령의 속성으로 인해 폭발 데미지가 대폭 줄어듭니다!]
[물리 데미지가…]
‘으음. 역시.’
일반적인 폭탄의 폭발은 데미지가 확 줄었다.
호수 정령의 몸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물 덩어리가 충격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속성 붙은 검으로 찌르고 스킬을 때려야겠군.’
-키이이이이잇!
낭티오네는 도망치다가 호수 정령이 쫓아오자 분노한 듯이 꼬리를 휘둘렀다.
촤르르륵-
낭티오네의 꼬리에는 경주에서 얻은 보상 중 하나, <번개 철퇴>가 달려 있었다.
파지지지직!
-므어어어어!
호수 정령은 호되게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물리 공격은 잘 먹히지 않더라도 마법 공격은 꽤 잘 통하는 것이다.
-훌륭하다, 모험가들아! 놈을 유인해서 약점을 찌르다니.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방법을 잘 알고 있구나!
왕자는 경쾌한 목소리로 옆을 따라 달리며 외쳤다.
그렇게 외칠 시간에 도와주면 될 텐데 태현과 이세연을 응원하려는 듯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낭티오네. 몇 대 더 때려!”
-키이잇!
에랑스 왕국의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낭티오네는 살벌하게 호수 정령을 후려갈겼다.
물리 공격이 잘 통하지 않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경주 뛰면서 추가로 달은 옵션이 많아서인지 각종 특수 효과를 일으키며 호수 정령을 밀어붙였다.
“…?”
태현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아니. 진짜 생각보다 되게 잘 싸우네.’
태현은 몰랐지만, 태현과 함께 혹독하게 뛴 경주가 낭티오네의 싸움 실력을 매우 향상시켜줬다.
그렇게 싸우는데 안 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낭티오네가 호수 정령의 발을 묶자, 이세연은 언데드들을 닥치는 대로 소환해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김태현!”
“?”
“언데드들한테 폭탄 달아줄 수 있어? 안으로 텔레포트 시킬게!”
“…….”
반란 일어난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