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96화
“장로님! 거기 서십시오!”
물론 장로는 멈추지 않았다.
“장로님! 안 멈추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
[슈라익 장로가 황당해합니다!]
-어디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라!
슈라익 장로의 도발에 태현을 따라다니는 드래곤들이 흥분했다.
-뜨거운 맛을 봐야 누가 위인지 알 늙은이로군!
-주인이여.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
-캬오오오!
“…너희 셋 성격이 좀 변하지 않았냐?”
추격을 준비하던 태현은 의아해했다.
얘네들이 경주 구경 많이 한 탓에 성격이 호전적으로 변했나?
-아닙니다. 주인님. 밟으십시오! 따라가셔야 합니다! 빨리 밟으시란 말입니다!
“아니… 이번에는 낭티오네 타고 갈 생각 없다.”
-키잇?
낭티오네는 놀란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미 각도 잡고 출발할 준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널 시킬 순 없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
-키이잇…!
낭티오네는 감동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낭티오네가 감동합니다!]
[친밀도가…]
[……]
낭티오네가 머리를 비벼오자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그래. 감동받을 것까지야. 근데 좀 아프니까 살살 비빌래? 내가 개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좀 무섭다.”
-그런데 주인님. 낭티오네를 안 타면 누구를 탄단 말입니까?
-키잇.
낭티오네는 불만 섞인 눈빛으로 흑흑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강하게 반박하진 못했다.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녀 본인 같이 강한 탈것을 타지 않는다면 누굴 탄단 말인가?
“말 잘 했다. 준비해라 흑흑아.”
-…….
흑흑이는 후회했다.
요즘 낭티오네가 맨날 경주에 나가는 바람에 방심했던 것이다.
입 꾹 닫고 있을걸…!
-캬오오오!
-응원하지 마라. 빡치니까….
불불이의 응원에도 흑흑이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꼭 이런 건 내 몫이지!
* * *
쐐애애애액!
흑흑이는 덩치를 키운 다음 날개를 쫙 펴고 전력을 다해 날았다.
-블랙 드래곤의 가호, 신속비행, 맹독 정령 소환, 가속….
“흑흑아. 더 빨리 못 나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현이 흑흑이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이 근처의 절벽길처럼 장애물이 많고 부딪히기 좋은 곳에서 낭티오네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워낙 덩치가 크고 부딪힐 일이 많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드래곤처럼 크기 조절이 가능하고 날개를 가진 날렵한 탈것이 좋았다.
[용용이는 왜 안 고른 거냐며 카르바노그가 의아해합니다.]
‘그냥 먼저 말 건 놈 시킨 건데?’
카르바노그는 흑흑이를 동정했다.
역시 블랙 드래곤은 종족이 대체로 재수가 없는 것 같았다.
사악해서 그런가?
[낙석을 주의하십시오!!]
[위에서 바위가 떨어집니다!]
투투툭-
“돌 굴러온다!”
-알겠습니다!
“내가 치워주마. 넌 비행에 집중해!”
-감사합니다! …잠깐. 어떻게 치워주실 겁니까?
흑흑이는 당황했다.
태현이 치워준다는 말이 이상하게 불길하게 들렸던 것이다.
꽈꽈과과광!
위에서 바로 터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태현이 화끈하게 폭탄 창을 꺼내 던진 모양이었다.
투투투투툭!
흑흑이는 앞으로 쏟아지는 바위 먼지에 울상을 지었다.
-그냥 제가 마법 쓰면 안 될까요?
“그러면 속도가 느려지잖아.”
-…주인님께서 마법 쓰시면 안 되나요?
“아. 나도 마법 쓸 수 있었지? 미안하다. 잊고 있었네. 이게 급한 상황이 되면 손에 익숙한 스킬부터 먼저 나오게 되는군.”
그래도 흑흑이가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저 멀리 슈라익 장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헥, 헥헥… 김태현 선수! 제 탈것이 지쳐서 더 이상은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쪽에서도 슬슬 한계가 터지기 시작했다.
독수리를 타고 뒤에서 따라 날아가던 파렐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움 요청을 날린 것이다.
“그렇군. 이걸 받아라!”
촤르륵!
태현은 아이템 제작용으로 갖고 다니던 튼튼한 쇠사슬을 꺼내 던졌다.
평범해 보이는 쇠사슬이었지만 좋은 재료에 골짜기의 대장간과 NPC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덕분에 매우 강력한 내구도를 자랑했다.
“받았습니다!”
“붙잡았냐?”
“예!”
“뛰어내려!”
“예!”
파렐은 별생각 없이 쇠사슬을 붙잡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뒤늦게 깨달았다.
“?????”
잠깐. 왜 뛰어내리라고 한 거지?
태현의 이름값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별생각 없이 뛰어내렸지만,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잠, 잠깐… 뭐하시는 겁니까아아아아악!”
파렐은 쇠사슬을 붙잡은 채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흑흑이 끝에 매달린 쇠사슬이었기에 그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오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기다렸, 다가, 탈것, 위에, 태워, 주시면….”
“너 때문에 느려지잖아. 안 돼.”
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암벽에 충돌합니다!]
[HP가 줄어듭니다!]
[암벽에 충돌합니다!]
[HP가…]
쾅, 쾅, 쾅, 쾅!
파렐은 진심으로 목숨의 위기를 느꼈다.
이… 이거 이러다 진짜 죽겠다!
파렐은 각종 스킬을 사용하고 포션을 꺼내서 버티기 시작했다. 김태현이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이, 이런 미친….’
갑자기 옛날 기억이 났다.
케인이 인터뷰에 나와서 ‘김태현과 같이 다니는 게 좋아 보여도 사실 전혀 좋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 난이도가 높아서 퀘스트 할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기분이에요’라고 했던 기억!
그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거 배부른 거 봐라 집에서 밥도 안 하는 놈이’ 하면서 케인을 욕했었는데….
당사자가 되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죽을 거 같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자기가 직접 하는 체험인데 미친 듯이 빨리 날아가는 드래곤 뒤에 매달린 사슬 잡고 버티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파렐은 반성했다.
태현과 같이 퀘스트를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하다니.
‘내가 미쳤지…! 그냥 평범하게 살 거 그랬다…!’
다른 놈들이 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장로님! 거기 서십시오! 정정당당하게 승부합시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했을 텐데!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태현은 말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흑흑이부터 시작해서 드래곤들이 울분에 가득 찬 공격을 날렸다.
저 장로 때문에 지금 이 위험천만한 길에서 얼마나 달리고 있는 거란 말인가!
콰르르르릉!
용용이가 흑흑이의 분노를 대신해서 각종 번개 마법을 날렸다. 사방에서 내리찍는 번개에 슈라익 장로는 멈칫….
‘안 멈추잖아?!’
전투거미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용용이의 번개 마법은 절대 약한 편이 아닌데 그냥 몸으로 맞으면서 돌진했다.
[입고 있는 갑옷의 힘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치사하게 아이템을 쓰다니.’
딱히 치사한 건 아니었지만 기껏 추격해서 따라붙었는데 저렇게 버티는 건 기운 빠지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태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행운 전환!
[랜덤으로 스탯 하나를 고릅니다!]
[행운이 일시적으로 힘 스탯으로 변합니다!]
‘됐다!’
태현은 원하던 스탯이 뽑힌 것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장 원하던 건 힘.
그 다음으로 원하는 건 민첩이었는데 어떻게든 둘 중 하나가 뽑힌 것이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렇게!”
이다비의 질문에 태현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흑흑이 끝에 매달린 쇠사슬을 잡아당기더니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으오아오아아아아악!”
“…저 플레이어가 항의하고 있어요! 태현 님!”
“아니! 신난다고 하는 거니까 무시해!”
[힘 스탯이 매우 높습니다!]
[……]
[……]
[……]
힘 스탯 특화 랭커한테는 밀리겠지만, 각종 스탯 작업을 해놓은 태현은 힘 스탯이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추가로 전환시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려고!
[파렐 선수를 던집니다!]
[투척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놀라운 던지기 솜씨로 힘 스탯이 영구적으로 오릅니다!]
[……]
“잘한다, 파렐! 훌륭하다!”
뒤에서 태현의 응원이 들려왔지만 파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이번 퀘스트 끝나면 김태현 있는 방향으로는 침도 안 뱉어야지….’
남들한테 말하면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태현하고 같이 퀘스트를 하는데 네가 뒤처질 거 같자 널 쇠사슬로 묶어서 데리고 날다가 상대한테 집어 던졌다고?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붙잡아라. 파렐!”
-떨어지지 못할까 이 느려터진 모험가 놈!
슈라익 장로는 파렐에게는 매우 냉정했다.
거미 위에 달라붙은 파렐에게 호되게 호통을 쳤다.
“…내가 당신한테까지 무시당할 생각은 없소!”
파렐은 분노해서 더 강하게 붙잡았다.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너무하잖아!
-긴장 완화의 스턴! 기술 실패의 맹격! 발목 째기!
파렐은 갖고 있는 디버프 스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장로 놈을 느리게 만들어버리겠다!
“생각보다 잘하는데? 재능이 있는 거 같다.”
“쇠사슬로 묶여서 포탄처럼 날아가는 재능이요?”
“응. 그것도 재능이잖아.”
쐐애애애액!
덕분에 태현은 다 따라잡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자만하지 마라, 모험가!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시 거리를 벌려줄….
서걱!
태현은 바로 쇠사슬 끝을 잘라버렸다.
-?
“?”
파렐과 슈라익 장로는 당황했다.
그걸 왜 자르냐?
쇠사슬을 자른 태현은 흑흑이에게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 흑흑이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휘이익!
“먼저 갑니다 장로님!”
태현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옆의 절벽에 폭탄까지 던졌다.
태현이 지나가자마자 절벽에서 낙석이 쏟아져 내리며 길을 막아버렸다.
“…….”
파렐이 억울함과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안 슈라익 장로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구나!
“저게 뭐가 대단합니까!”
[경주에서 승리합니다!]
[슈라익 장로가 패배를 인정합니다.]
* * *
“퀘스트를 이렇게 깨는 건 옳지 않은 궁시렁궁시렁….”
“같이 잘 해놓고 왜 그래?”
“…아니 같이 잘 안 했습니다!!”
파렐은 기겁해서 소리쳤다.
태현의 기억 속에 자신이 대체 어떻게 남아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쇠사슬에 끌려갈 때 지른 비명을 ‘이얏호! 신난다!’로 들은 건가?
“이 정도면 평소보다 좀 무난하게 깬 편인데.”
“태현 님. 혹시 저분은 생각보다 레벨이 낮은 게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내가 좀 미안한 짓을 한 걸지도 모르겠군. 레벨에 맞는 일을 시켜야 했는데.”
둘의 아무 악의 없는 대화가 파렐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랭커로서 또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니 할 만했던 것 같습니다.”
“쟤 왜 이랬다저랬다 하지?”
“글쎄요. 사춘기 아닐까요?”
‘이 커플이 진짜…!’
파렐은 울고 싶어졌다. 그냥 왠지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나려고 했다.
-파렐.
그 순간 귓속말이 날아왔다. 다른 신진 랭커들에게서 날아온 귓속말이었다.
-들어보니 김태현한테 용케 붙어서 퀘스트를 깨고 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용케 머리를 잘 굴렸군.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신진 랭커들은 파렐이 태현과 같이 퀘스트를 깬다는 말에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도 경쟁이 심한데 파렐 혼자 앞서가는 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흥. 나는 파렐처럼 비겁하게 꿀 빨 생각 없다. 난 혼자서 퀘스트 깰 거임.
-…니들이 한 번 해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이 자식들아!!
파렐은 분노해서 다른 랭커들을 차단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