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87화
판온에는 수많은 랜덤 아이템들이 있었다.
원래라면 저런 도박에 발을 디디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아이템을 구할 방법이 없을 때에는 저런 수단이라도 써야 했다.
그리고 아키서스 교단의 인기 중 하나는 바로 저런 랜덤 아이템에 있었다.
-아키서스 교단 쪽 축복 상당히 좋은데? 행운 스탯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듯.
-무조건 축복받아야 함. 골짜기에서 가장 효율적인 루트는 대신전→예술관→동물원→공터 순서다.
-건물 버프 받고 사제들 버프 받는 것도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공적치 포인트도 필요해. 교단에서 나오는 일퀘 무조건 깨서 모아라. 그거 써서 더 강한 축복 받아야 해. 몇 퍼센트의 차이가 승부를 가름.
-아키서스 교단 관련 직업은 더 버프 받는 거 같은데?
골짜기 사람들은 이런 걸 분석하고 최대한 효율을 뽑기 위해 애썼다.
이런 부분에서 고수들은 이걸로만 먹고 살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상자 열어드립니다! 랜덤 아이템 대신 개봉해드립니다!
-이 골짜기에서만 십 년 넘게 장사해 온 달인이 최적의 효율로 원하는 아이템을 뽑아드립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눈에는 무슨 강물 퍼다 장사하는 것처럼 양심 없게 보였지만, 의외로 매우 인기가 좋았다.
각종 버프를 효과적으로 조합하면 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아키서스의 성스러운 창술사인 제가! 상자를!!
-근데 왜 사냥을 안 하고 상자만 열어요?
-…너 죽고 싶냐?
어찌 되었든 이런 플레이어들이 평소에 궁금해하는 게 하나 있었다.
일반 직업도 이 정도인데, 아키서스 교단 교황인 태현은 대체 어느 정도의 버프를 받을까?
지금 그 결과가 눈앞에 나오고 있었다.
번쩍!
[행운이 매우 높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상자에서 <눈부신 황금상>이…]
번쩍, 번쩍, 번쩍-
상자에서 좋은 게 나올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빛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물론 태현이라고 모든 시도를 다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세 번 중 두 번 정도는 그냥 평범한 아이템을 뽑거나 약간 좋은 아이템을 뽑았다.
그러나 모인 플레이어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 옆에서 직접 보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기 마련!
“와아아아아아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세상의 모든 상자를 다 열어주세요!”
열심히 상자를 열어주던 태현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근데 저기서 지금 무료 요리도 대접하는데, 여기서 괜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저기 가서 먹는 게 낫지 않나? 재료도 비싼 것들인데….”
“상자 열어주세요!!”
“저기서는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들이 파티에 참가해서 같이 싸워주는데 그것도 체험해 볼 수 있어.”
“상자 열어주세요!!!”
“새로 지은 건물들 시설 공개해서 골짜기 소속 아닌 플레이어들도 쓸 수 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써보는 게….”
“상자 열어주세요!!!!”
“…….”
태현은 살짝 상처 받았다.
나름 큰 마음 먹고 골짜기의 각종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상자에 지다니…!
이다비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등을 토닥여줬다.
“원래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는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그렇지 여기 있는 걸 다 준비했는데 다 무시하고 이런 불확실한 뽑기에 목숨을 건다는 게 말이나 돼?”
태현은 저런 뽑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판온 1에서 너무 피를 많이 봤던 것이다.
그때는 힘을 올릴 방법이 더 적었기에, 아이템 강화나 제작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0.001% 확률에 재료와 시간을 쏟아붓다 보면 사람이 피폐해지기 마련.
“상자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온 금화로 뭐 할 거야?”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 또 상자를 열어야지!”
“…….”
태현이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팬 한 명이 이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이, 이다비 선수! 혹시 괜찮으시다면 상자를 열어주실 수 있나요?”
“네? 제가요? 괜찮나요?”
“네… 넷!! 영광이에요!”
이다비는 ‘제가 갖고 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당연한 의문!
그러나 태현은 그걸 미리 눈치채고 붙잡았다.
“너 지금 네가 갖고 튀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려고 했지?”
“앗.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팬서비스에 친절한 선수는 아니지만 그 말은 굳이 안 해도 될 거 같아!”
세상 어떤 팬이 선수한테 선물하면서 ‘이 선수가 선물 갖고 튀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한단 말인가.
이다비 같은 사람 아니면 그런 걱정 안 했다.
“저는 그런데 태현 님보다 이런 거 약한 편인데….”
번쩍!
[상자에서 놀라운 아이템이…!]
“!!!!!”
* * *
영지에서 여는 이벤트가 기존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키고 새 플레이어들을 불러 오는 거라면, 골짜기에서 연 이벤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도 많이 몰려 있던 인원이 끝날 때쯤 되자 한 서너 배쯤으로 늘어나 있었으니까.
아무리 태현의 명성이 있다지만 예상을 벗어난 인원!
그만큼 이벤트가 알찼던 것이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김태현 선수! 이번 이벤트를 취재하는 동안 정말 감탄했습니다. 일반 플레이어들을 위해 베풀 줄 아는 모습은 다른 랭커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이벤트를 여신 건가요?!”
골짜기로 온 사람들은 완전히 들떠서 극찬을 퍼부었다.
‘상자 열었던 거 말고는 기억이 없는데…?’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그냥 상자만 계속 무한히 연 기분이었지만….
-폐하!
“?”
저 멀리서 새로이 나타난, 얼굴을 망토로 푹 감싼 NPC들.
태현은 그 모습에 경계의 시선을 던졌다.
‘암살자는 아니겠지.’
요즘은 덜했지만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암살자들이 찾아와서 번호표를 뽑아줘야 했을 정도였다.
[암살자라고 하더라도 어디에서 보냈는지가 중요하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하도 많아서 이제 굳이 추리할 필요가 있나 싶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일단 붙잡고 봅시다!
-붙잡아서 고문하면 정체를 불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키서스 성기사들이 좀 과격해진 거 같지 않아?’
태현은 의아해했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이 오니 좀 달라진 게 느껴졌던 것이다.
원래 이랬나 얘네?
-우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
“수상한 놈들이 자기 수상하다고 하는 법은 없지. 3초 안에 정체 안 밝히면 공격 시작한다.”
휙!
상대는 망토를 치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갑옷. 거기에 보통이 아닌 명검까지.
‘귀족 NPC군.’
누가 봐도 ‘나 귀족입니다’ 하고 다니는 NPC가 분명했다.
-나는 에랑스 왕국의 이디올 백작이오! 폐하. 수상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정당한 대접을 부탁드리오!
“앗. 미안하게 됐군.”
태현은 일단 사과했다.
오랜 경험 때문에 귀족 NPC들이 불만을 토해내면 일단 사과하고 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사과를 한 다음 태현은 문득 의아해했다.
‘잠깐. 이디올 백작 이름 어디서 들어봤는데.’
태현은 깨달았다.
이디올 백작이라면….
‘에랑스 국왕이 현상수배 건 백작이잖아!’
왕자들의 반란에 죽을 뻔했던, 아니,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에랑스 국왕은 극도로 분노해서 다른 왕자들 모두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당연히 그 왕자들을 따르던 귀족들도 후다닥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이디올 백작은 그중 하나였다.
-나는 왕국의 전통 깊은 백작….
“잡아라!”
-인데?! 백작인데!? 폐하! 백작이라고 했지 않았소!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의 부하들은 우르르 달려들어서 이디올 백작을 붙잡았다.
“고맙군. 백작. 자수하고 싶어서 날 찾아오다니. 내 나쁘게 대하진 않겠다. 에랑스 국왕에게 잘 말해주도록 하지.”
[착하게 살다 보면 이런 행운도 온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백작을 쳐다보았다.
에랑스 국왕이 언데드가 되고 나서 성질이 좀 더러워지긴 해도, 상벌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2왕자는 자수할 생각 없나? 2왕자는 주변에 있는 건가?”
-아니라니까!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폐하!!
<2왕자의 역습-에랑스 왕국 퀘스트>
타락하고 사악한 언데드 폭군, 필립 3세가 왕좌에 앉은 탓에 에랑스 왕국 백성들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온갖 사악한 교단들이 일어나고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대륙을 오가는 것 또한 이 탓!
에랑스 왕국의 두 번째 왕자 토마스는 당신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왕자를 도와 왕국의 왕관을….
“어이가 없는 놈이네 이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폐하!
“2왕자가 1왕자보다 싸움을 잘 하나?”
-그건… 아니오.
안 그래도 강했던 1왕자였지만 사악한 계약을 맺고 나서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강해졌었다.
이상한 원시의 섬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태현도 쓰러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2왕자를 따르는 귀족들이 1왕자보다 많나? 기사단 숫자가 더 많다거나 하나?”
-그것도 아니오.
“근데 뭔 배짱으로 왕좌를 뺏겠대? 어이가 없군. 지금 국왕이 만만해 보이나?”
태현은 코웃음을 쳤다.
욕심을 내는 건 자유라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퀘스트 아닌가.
그럴 바에는 그냥 잡고 넘기는 게 나았다.
-말이라도 좀 들어주시오! 지금 국왕 폐하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오. 점점 더 사악해지고 위험해질 거요.
이디올 백작의 말은 태현을 살짝 뜨끔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언데드가 된 이상 점점 더 이상해지면 이상해졌지 멀쩡하게 돌아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나한테 직접적으로 불똥이 안 튀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 쳐도 방법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지 않나.”
-방법이 있소! 정말 대단한 방법이!
“오….”
태현은 그 말에 살짝 솔깃했다.
물론 에랑스 왕국이랑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2왕자 쯤 되는 NPC가 숨겨 놓은 방법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에랑스 왕가는 역사가 깊은 만큼 온갖 사기 아이템들이 가득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아이템 하나 갖고 있는 거 아닐까?
“그게 뭐지?”
-2왕자 전하께서 직접 뵙고 말씀드릴 것이오.
“아하. 그렇군. 당장 초대하게.”
-…그 전에 안 붙잡는다고 맹세해 주시오.
“하하. 왜 이러나. 날 못 믿나? 나만큼 명성 높은 사람이 대륙에 어디 있다고.”
-맹세해 주시오!
* * *
2왕자는 도망치느라 상당히 힘들었는지, 매우 피곤하고 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애초에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체격이었으니….
‘저 꼬마는 누구지?’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뒤를 쳐다보았다. 2왕자의 호위기사들이 데리고 있는 꼬마가 있었던 것이다.
“2왕자의 딸일 거예요. 딸 있다고 했었거든요.”
이다비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딸의 장난감 같은 걸 모집하는 퀘스트들이 종종 떴던 것이다.
“아. 그렇군. 혹시 만나본 적도 있어?”
“아니요. 아무래도 왕족은 만나기 힘들잖아요.”
“그렇지.”
말하고 난 태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이 만났던 것이다.
‘내 주변에 은근히 왕족 많은 거 같은데?’
-국왕 폐하.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나를 고발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서 안심하고 나올 수 있었소.
“어… 맹세까진 아니고 약속이었는데 뭐 어쨌든 그렇다 치고.”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동맹이오. 그냥 동맹이라면 서로를 의심할 수 있겠지.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의심할 수 없는 강한 동맹이 필요하오.
“강한 동맹이라면… 영혼을 아키서스 교단에 바치는 그런 거?”
-…그, 그런 의식 말고. 혼인 동맹을 말한 거요.
“나하고 그쪽하고?”
태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2왕자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 말고 내 여식과 폐하를 말한 것인데….
“…저놈을 당장 잡아 가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