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84화
하지만 완벽하게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픈 케인이었다.
“뭐 하냐?”
“청소하려고.”
“청소 아까 내가 아침에 다 했는데?”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람들 오는데 당연히 청소를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왜 청소를 한 거야!”
“네가 청소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알겠다. 앞으로 청소는 다 네가 해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케인은 다급히 변명했다.
청소라도 해서 이미지를 노려보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막힌 것이다.
“으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요리를 옆에서 도와주면 어떻습니까?”
“오. 좋은 생각인듯?”
케인은 다시 태현한테 갔다.
“내가 요리를 옆에서 도와주고 싶은데.”
“흠. 케인. 좋은 생각이다.”
“진짜?!”
“좋은 생각이긴 한데 오늘은 안 돼. 이세연한테 먹여야 하는 승부라고. 지면 네가 책임질 거냐?”
“아니… 승부 아니라니까….”
아무리 투덜거려도 태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세연에게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케인 같은 괴식 요리사를 투입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좋은 요리 다 망칠라!
“저 왔어요. 준비 중이셨어요?”
“아. 옆에 와서 좀 도와줄래?”
“…야…!”
케인은 울컥했다.
사람 차별하냐!?
“아니, 이다비야 그럴 수 있지.”
“저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최상윤과 정수혁은 냉정했다.
케인이 요리 스킬 초급이라면 이다비는 최소한 고급 이상인 것이다.
어딜 비교해?
“요리도 못 하고 청소도 못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헉. 수혁아. 케인 녀석이 드디어 자아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저걸 이제야 깨닫다니.”
“저도 좀 놀랐습니다.”
“…둘 다 닥쳐….”
케인은 그냥 다시 청소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깨끗하긴 한데 뭐라도 좀 하는 모습을 보이자…!
* * *
“팀 KL 선수분들은 국내에서 가장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다는 농담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그건 농담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흔치 않거든요. 김태현 선수의 지시에 따라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대회나 경기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상윤은 매우 모범적으로 답변을 했다.
태현과 이다비가 저기서 요리를 하고 있는 동안, 질문을 받으며 시간을 채워 넣는 건 팀원들 역할이었던 것이다.
‘케인이 질문 못 받게 해야지.’
“이번에 김태현 선수와 이다비 선수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정말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아무래도 주장인 만큼 저희들을 챙겨주느라 플레이할 때 제약이 많았었는데,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뛰면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걸 보니 제가 같이 뛰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뒤에서 양파 썰고 있던 태현은 이다비에게 물었다.
“누가 대본 따로 줬어?”
“안 줬을걸요?”
“잘하는군. 그래. 저렇게 모범적으로 대답해야지.”
인터뷰로서는 모범적인 대답이었지만, 방송으로서는 좀 더 재밌는 그림을 원하는 것도 사실.
아까부터 진행자의 눈길이 자꾸 케인을 향해 갔다.
한번 입만 열면 시청률을 몇 %씩 올린다는 전설의 입!
“케인 선수한테도 한번 물어보고 싶….”
“저는 청소 중에는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
“…….”
최상윤은 경악했다.
그건 그냥 미친놈이잖아!
실언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냥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어, 어, 어서 오십시오.”
“이, 이,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다시 찍어야 하나?”
이세연은 뒤를 보며 물었다.
정수혁과 케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었던 것이다.
“아뇨. 재밌는데 계속 가죠. 그냥 편하게 행동해 주세요. 요즘은 이런 게 더 재미있거든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정수혁과 케인이 이세연을 만나면 긴장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태현이 매번 주입식 교육으로 ‘이세연 무섭다 진짜 무섭다’라고 가르친 탓이었다.
-이세연 조심해라. 괜히 방심하지 말고.
-이세연이 어? 한번 방심하면 너희를 죽인 다음 언데드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근데 너는 왜 같이 다니는… 악!악! 때리지 마! 미안해!
그리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이세연은 스타 중의 스타였다.
판온이 흥하기도 전부터 방송에 출연하면서 전국적으로 인기를 쌓은 사람인 것이다.
지금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는 판온 프로 선수나 플레이어들의 원조!
“왔나?”
태현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세연을 불렀다.
이세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넌 왜 그렇게 무게를 잡고 있어…?’
주방 쪽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태현의 모습에, 이세연은 살짝 당황했다.
이런 프로그램 아니잖아 오늘?
옆에 서 있던 이다비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살짝 민망한 것 같았다.
“이세연.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봤지.”
“저기, 오늘 그런 방송 아니거든. 사람들 오해하니까 그만두지 않을래?”
“아니요. 이것도 재밌으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요.”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
이세연은 이 방송이 슬슬 어떻게 굴러갈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재밌다고 다 찍었다가 나중에 방송 내보낼 게 없으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하지만 PD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 있는 인원들의 이름값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사람들이 숨만 쉬어도 충분히 재밌을 거라고!
“그 결과 식단을 바꾸는 것보다는 평소 식단에 좀 더 공을 들이기로 마음을 먹었지.”
“응… 그래….”
이세연은 체념한 표정으로 앉았다.
여기 와서 기대한 건 화기애애한 대화와 ‘와 너희 평소 이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어쩌다가 분위기가 요리대회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사실 나도 요리해서 좀 대접해 주려고 했는데.”
“…!”
태현은 놀란 표정으로 이세연을 쳐다보았다.
그런 흉악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태현 님. 지금 그렇게 놀랄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이다비가 옆에서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말이 그렇게 충격받을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히 내가 차려준 걸 먹지 않고 나하고 승부를 할 생각이라잖아.”
“…그냥 태현 님을 배려하고 싶어서 아닐까 싶은데….”
이다비는 중얼거렸지만 태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세연도 손님으로서 대접만 받으면 조금 미안하고, 이번 월드컵에 같이한 게 있으니 감사의 의미로 뭔가 대접해주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현의 귀에는 대결 신청으로 들릴 뿐이었다.
“좋아. 이세연. 여기 공간은 넉넉하니 옆에 와.”
“응? 진짜? 가도 괜찮아?”
태현의 요리가 다 끝난 다음에나 가려고 했었던 이세연이었지만, 저렇게 부르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주방은 워낙 넓고 공간도 넉넉하니 옆에 서서 요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너 신나 보인다?”
“아니거든. 안 신났거든.”
이세연은 표정 관리를 하며 섰다. 태현은 이다비에게 말했다.
“승부하려면 이다비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되겠지. 가서 기다려 줘. 아니. 차라리 잘됐군. 이다비를 심사위원으로 하자.”
“아니….”
졸지에 심사위원 역할을 맡게 된 이다비는 당황해서 둘을 쳐다보았다.
그냥 태현 님 요리 옆에서 마저 도우면 안 될까요?
‘이세연 씨. 도와주세요.’
하지만 이다비는 잊고 있었다.
이세연도 걸려 온 승부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좋아. 게임에서는 네가 요리 스킬이 더 높겠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는 걸 알려주겠어. 이다비 선수. 가서 앉아 계세요. 제가 차원이 다른 요리를 보여드릴 테니까.”
“…두 분 다 상담을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다비는 자리에 앉았다.
졸지에 뜨거운 요리 대결이 펼쳐지게 된 주방을, 스태프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일상을 다루는 특별 영상이라 어떤 내용이 나올지 기대했었는데, 이건 정말 좋은 의미로 기대를 벗어나고 있었다.
‘오옷!’
‘대단하다…!’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둘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뛰어난 셰프에게서 직접 배운 적도 있던 이세연.
팀 KL의 선수들을 혼자서 먹여 살린 태현.
“이건 정말… 대단해…!”
케인의 감탄에 진행자가 슬쩍 물었다.
“어떤 점이 대단한 겁니까?”
“김태현은 원래 요리할 때 저런 채소 뿌리는 그냥 뎅겅 자른 다음 빠르게 요리로 들어가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끝까지 세심하게 씻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몇 배의 노력을 들이고 있는 거죠.”
“오… 그러니까 평소에는 밥을 대충 해준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쳇.’
‘당할 뻔했다!’
케인도 많이 늘었다. 이런 함정 질문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케인 선수께서 옆에서 해설 역할을 맡고 있는 이 대결. 과연 어떻게 결과가 날지 궁금합니다.”
“어. 잠깐만. 그럼 둘 다 이다비 먹을 것만 차리면 우리 먹을 건 없나?”
케인의 질문에 태현과 이세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더 안 준비하고 있지?”
“응. 너도?”
“나도 원래 너 먹을 것만 만들고 있었는데. …귀찮으니까 그냥 나머지는 배달시켜 먹으라고 하자.”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배달 좀 시켜 먹는다고 안 죽어.”
“…….”
케인은 시무룩해졌다.
우리는 배달음식 먹어야 해??
* * *
“…….”
태현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PD가 몇 번이고 고마워하면서 극찬을 할 정도로 촬영은 분위기 좋게 끝났다.
벌써부터 역대급 방송이 예상될 정도로 내용이 알차고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숙소 분위기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지금 말 잘못 꺼내면 진짜 주먹으로 맞는 거 아니냐?’
‘쉿.’
“내가 왜 진 것 같냐?”
“어… 그게… 이세연이 협박한 거 아닐까?”
“이세연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아오 귀찮은 자식.’
즉석에서 벌어진 시합이었지만 규칙은 매우 충실했다.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동원!
결국 이다비가 더 맛있다고 손을 들어준 건 이세연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아앗! 이세연 선수가 승리합니다! 이세연 선수. 방금 웃지 않았나요?
-안 웃었어요.
-방금 미소 지은 것 같으신데?
-안 지었는데요? 재미 삼아서 한 시합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요.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태현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간 차이 같은데요. 언니는 엄청나게 싱겁게 먹잖아요.”
이다비 동생, 이다솔이 와서 말했다.
그러나 태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태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렴. 이다비가 소금 차이 때문에 음식 맛을 결정할 정도로 단순해 보여?”
‘언니 혀 되게 단순한데….’
이다솔은 매우 억울해졌다.
이다비가 딱히 고급 혀를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짜 소금 차이 때문이라니까요. 소금 좀 덜 넣었으면 골랐을걸요.”
“그런 위로는 필요 없고. 으음. 하긴 내가 이다비 입맛을 파악할 시간이 좀 부족하긴 했어. 쓸데없는 놈들만 먹이고.”
“…그 쓸데없는 놈들이 우리는 아니지…?”
케인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도 오늘 방송 때문에 배달음식만 먹었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앗. 그러면 제가 저녁 당번할 때 양보할 테니까 오셔서 준비해 보시는 건 어때요?”
태현은 이다솔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다솔은 속으로 걱정했다.
‘아앗. 들켰나?’
“…너 정말 착하구나. 이다비가 알면 되게 기뻐할 것 같은데.”
“언니한테는절대말하지마시고요!”
언니한테 알렸다가는 등짝에 스매시가 날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