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77화
태현은 간절하게 외쳤다.
그 순간 직감이 외쳤던 것이다.
아, 얘가 펠마스의 선조 맞구나!
-왜, 왜 그러십니까? 주사위 도박은 신성한 기도입니다. 아키서스 님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신성한 기도인데….
‘핑계도 똑같잖아!?’
펠마스 이 새끼 조상의 신성한 기도문을 도박에 써먹은 거였나!
“그렇다면 주사위로 승부하자.”
-?!
“내가 이긴다면 아키서스 님께서는 네가 주사위 도박을 하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거다. 설마 교단의 대사제 정도 되어서 나 같은 신도에게 지겠나?”
-…!
태현의 말에 펠마스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범한 신도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겸손하더라도 그의 위치는 대사제.
신앙심으로 치면 교단의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신의 뜻은 누구도 모르는 법이지. 난 가끔 아키서스 님의 말씀을 듣는데, 아키서스 님은 의외로 주사위 도박에 푹 빠지는 걸 싫어하신다! 주사위 도박은 잘 하는 사람도 가끔 해야지!”
태현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강한 진심으로 설득력에 보너스를…]
[……]
[……]
‘반드시 여기서 이긴 다음 현실의 펠마스를 제정신으로 만들어 놓겠다!’
태현은 각오했다.
과거를 바꾼다면 미래도 바꿀 수 있을 터.
여기서 펠마스의 선조를 꺾고 가문 대대로 주사위 도박을 금지시킨다면 진짜 펠마스도 달라질지도 몰랐다.
[주사위 도박이 시작됩니다!]
[주사위를 굴려 눈금이 더 높은 사람이 승리합니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신의 뜻을 감히 여쭤봅시다!
두 아키서스 신도는 주사위를 들고 치열하게 부딪혔다.
주변에 있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오오… 오오오!
-저 신도는 대체 누군데 펠마스 님과 붙어도 밀리지 않는 것이지? 펠마스 님의 주사위 솜씨는 여기서 이길 자가 없을 텐데?
-맞아! 펠마스 님의 주사위는 축복받은 특별한 보석으로 만든 주사위라서 더더욱 강력하지 않나!
-뭔진 몰라도 허름한 차림을 보니 꽤나 가난한 것 같군. 평민이 분명하네.
‘다른 건 몰라도 특별 주사위는 사기 아닌가?’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주사위 도박 좀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좋은 주사위 갖고 굴리는 것도 실력이었다.
꼬우면 자기도 좋은 주사위를 구해야 하는 것!
그러나 아무리 펠마스가 강력한 주사위를 갖고 있고, 주사위 도박에 뛰어난 경험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태현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사위 도박에서 승리했습니다!]
태현은 압도적인 눈금을 연속으로 뽑으며 경기에서 승리했다.
행운 스탯의 승리!
-말도… 말도 안 됩니다! 신께서는 사실 제 주사위 도박을 싫어하셨던 겁니까!?
펠마스는 패배보다도 아키서스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는 충격에 빠져 절망했다.
이제까지 신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면 그 죄는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탁-
태현은 펠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니다. 신은 네 주사위 도박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서 날 보내신 거다.”
-그… 그런…!
[신성 스탯이 매우 높습니다!]
[아키서스의 화신입니다!]
[화술 스킬이…]
[……]
[……]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교단 신전 내에서 평판이 크게 오릅니다!]
[교단 신도들이 신의 모습을 봅니다!]
-아키서스 님께서 저 사람을 보내신 게 분명해!
-맞아! 저 허름한 차림은 아키서스 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 입힌 옷이었던 거지!
‘…카르바노그. 내 차림이 그렇게 구린가?’
태현은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르바노그에게 물었다.
변장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갑옷에 외투 걸치고 다니는 데 평가가 너무 별로였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욕하는 거면 상관없었지만 NPC들이 욕하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카르바노그가 패션의 ‘패’ 자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카르바노그는 태현을 위로했다.
옛날 패션은 이해할 수가 없는 법!
펠마스는 감동 받은 표정으로 태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분은 아키서스 님께서 보내주신 분, <아키서스의 길잡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없을 겁니다!
-아키서스의 길잡이! 아키서스의 길잡이!
[칭호, <아키서스의 길잡이>를…]
[……]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합니다! 앞을 내다보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으니, <아키서스의 앞잡이>라고 합시다!
“아니. 그건 됐고.”
태현은 정색했다.
* * *
주사위 도박에서 승리한 덕분에 태현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신성 스탯이 높고, 교단 공적치 포인트도 높은 태현이었다.
심지어 직업마저 <아키서스의 화신>인 상태.
친분을 쌓기에 매우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숨만 쉬어도 ‘저 숨 쉬는 모습을 봐! 너무 아름다워!’ 하는 신도들이 가득할 정도!
펠마스는 반성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사위 도박은 앞으로 자제하겠습니다. 매 주 계획을 짜서 정해진 날짜에만 하겠습니다.
“그냥 하지 말게.”
-…매 달?
“하지 말라고.”
-예….
“어찌 되었든 간에, 난 아키서스 님께 자네의 주사위 도박을 막으라는 말 말고도 다른 말을 들었네. 대륙의 위기에 맞서서 아키서스 교단을 도우라는 말이었는데, 혹시 무슨 위기 없나?”
-으음. 대륙의 적들은 너무 많아서 하나만을 꼽기가 어렵습니다.
“카르바노그 교단이 위협을 받는다던데, 혹시 카르바노그 교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원수 진 세력은 없나?”
-카르바노그 교단 말입니까?
태현의 질문에 펠마스는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하나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교단의 성기사들을 붙여드릴 테니, 혹시 해결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오오!”
태현은 반색했다.
아키서스 교단에 이런 호쾌한 맛이 있었다니?
‘그래. 원래 교단 퀘스트는 보통 이렇지.’
교단에서 퀘스트가 나오면 보통 이래야 했다.
-어떤 사악한 A가 있는데, 물론 이 A를 처리하기 위해 그대 혼자 보내지는 않겠네. 우리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같이 가줄 테니 이들과 함께 토벌해 주겠나?
…이런 식으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아키서스 교단 퀘스트는 보통 이랬다.
-악마 공작 있는데 아무 지원 없이 혼자 잡아오셔야 합니다. 지원이요? 저희 교단에 그런 거 없는 거 교황님께서 잘 아시잖습니까. 갖다 오실 때 공작의 성도 좀 털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운영비가 빠듯해서… 성을 통째로 갖고 오시겠다고요? 농담도 참. 성이 날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됩니까?
500원 주고 빵하고 우유 시키면서 거스름돈까지 남겨오라는 수준!
아무리 태현이 인내심이 강하다지만 아키서스 교단 퀘스트들은 사람을 좀 빡치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든든한 지원을 해주다니.
“맡겨만 주면 바로 내가 해결하겠다.”
<카르바노그 교단을 도와서-아키서스 교단 퀘스트>
카르바노그 교단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순수한 이들이라, 어떤 오해와 헛소문에도 속지 않고 아키서스 교단을 굳게 믿어주는 이들입니다.
아키서스 교단은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카르바노그 교단을 꾸준히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들과 함께 카르바노그 교단을 괴롭히는 적들을 해치우십시오.
보상: ?, ??
“…응?”
태현은 멈칫했다.
퀘스트창은 멀쩡했는데, 내용이 좀 의아했던 것이다.
‘…설마 친구 없어서 카르바노그 교단이랑 친해진 건 아니겠지.’
다른 메이저한 교단들하고는 이미 사이가 안 좋아져서, 딱히 경쟁 붙을 이유 없는 카르바노그 교단과 친해진…?
‘더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이동하자.”
-길잡이님. 따르겠습니다!
고대 제국 특유의 갑옷을 입고, 위엄 넘치는 성광을 뿜는 아키서스 교단 고대 정예 성기사들은 박력이 넘쳤다.
레벨이 600~700은 가볍게 넘길 거 같다!
‘지금 교단에 있는 일반 성기사 레벨이 300을 못 넘길 텐데….’
지금 여기 있는 평기사 한 명 데리고 가면 성기사단장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뜻이 됐다.
어마어마한 옛날 수준!
‘큭.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도에 위치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원을 해주는 걸 보면 상대가 꽤나 강한 모양이군. 혹시 악마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악마와 결탁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흑마법사인가?”
악마와 가장 결탁하기 쉬운 직업은 역시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흑마법사보다 더 사악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게 있나??”
태현은 슬슬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악한 놈이 있나?
-여기입니다.
“…잠깐. 성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고대 제국 파이토스 교단 신전>을 발견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
[……]
[파이토스 교단에 이 사실을 알려주면 후한 대접을…]
[……]
그랬다.
성기사들이 안내한 곳은 성벽 밖에 있는 던전이 아니라, 성 안에 있는 파이토스 교단 신전이었던 것이다.
“내가 뭔가 이해를 잘못했나? 아. 여기 안에 무슨 사악한 범죄자가 숨어 있는 거지? 그런데 파이토스 교단 놈들이 경쟁심 때문에 협조를 안 하는 거고?”
-하하. 길잡이님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놈들이 신전을 안 비우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
태현은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물었다.
“여기가 파이토스 교단 신전이면… 파이토스 교단의 건물이지 않나?”
-물론 그렇지요. 저희가 성주님께 말씀드려서 파이토스 교단을 이 성에서 추방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
이런 미친놈들!
태현은 경악했다.
태현이 오기 전에 벌써 사전 작업을 다 끝내 놓은 것이다.
-성주님께서는 저희의 설득을 듣고 파이토스 교단을 추방하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파이토스 교단 놈들이 아직도 이 성 안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카르바노그 교단 사제들이 편히 신전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카르바노그가 매우 논리적이라고 감탄합니다.]
‘저게 성기사냐 도적이냐?’
태현은 고민했다.
이 퀘스트를 하는 게 맞는가?
아키서스 교단 퀘스트면 그냥 했겠지만, 카르바노그 교단 퀘스트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괜히 카르바노그 교단의 원수만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기사들은 크게 외쳤다.
-파이토스 교단의 사악한 무리들아! 성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신전에 버티고 있다니! 천벌을 받고 싶으냐!
-여기 길잡이님께서 오셨다! 썩 꺼지지 않으면 너희를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
안에서 파이토스 교단이 발끈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성주님을 현혹시켜서 우리를 추방시키려는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우리가 쫓겨나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봐라!
태현은 갑자기 걱정이 됐다.
하나라도 말할 수 있을까?
-하. 못 말할 것 같으냐? 너희의 죄목을 말하겠다! 이 주변의 주민들에게 세금을 몇 배나 많이 걷은 죄! 그 세금으로 호화로운 보물을 산 죄! 굶주린 혼돈을 토벌하지 않고 일부러 다른 교단을 앞세우고 빠져나간 죄! 악마를 토벌하지 않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죄! 제국의 황족에게 이간질을 시도한 죄!
-그 정도는 모두 하는 일 아닌가! 그거 갖고 우리를 추방하려고 하다니!
-닥쳐라! 우리 아키서스 교단은 제국을 위해서 너희 같이 도움 안 되는 곰팡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어라?’
듣고 있던 태현은 다시 당황했다.
이쪽이… 정의의 편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