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69화
다른 기자들도 당황한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딱히 태현 본인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진 않았지만, 태현은 선수들 중에서 신비주의 노선을 걷는 선수로 뽑혔다.
팬들이 환장할 정도로 방송에 나오지 않는 사람!
하다못해 개인 방송이라도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충성을 외칠 텐데, 태현은 그런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파워 워리어 계정이나 근처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 방송 계정을 찾아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 예 뭐 나쁘지 않네요’라고 말하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태현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번 경기도 김태현치고는 지나치게 안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줬었다.
정말 김태현이 아닐지도….
‘아차.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김태현 선수.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방송에 나가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요?”
“예.”
“그 방송이, 우리가 말하는 그 카메라 앞에서 찍으면 전 세계로 나가는….”
“…뭘 묻는 겁니까?”
태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 사람 뭐하는 거야?
옆에 있던 기자들도 동료를 구박했다.
“뭐하는 거야? 김태현 앞에 두고?”
-우우우! 한국 기자들 그렇게밖에 질문 못 할 거면 꺼져라!
-다른 나라에도 기회를 양보해라!
뒤에서 들리는 다른 나라 기자들의 야유는 무시하고, 기자는 말을 이어갔다.
“정말 나오실 생각이십니까?”
“어… 그렇게 나오지 말라면 안 나가죠 뭐.”
“아닙니다! 나와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기자는 다급히 말했다.
자기 때문에 태현이 방송 나오려던 거 안 나오면 그는 관계자한테 목 졸려 죽을 수도 있었다.
‘귀찮지만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의외로 태현은 멀쩡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에 참가했으면 어느 정도의 홍보는 의무인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있으니 태현 본인의 욕심보다는 다른 선수들을 배려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SBC에서 일하고 있는 PD님과 친한데, 아직 정하시지 않았다면 그 PD님께 한 번 말씀드려볼까요?”
기자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PD가 봤다면 ‘김 기자! 김 기자밖에 없어!’ 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장면이었다.
세상에 이런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태현은 별생각 없이 ‘그럴까요’ 하려고 했지만 주변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태현 선수! 지금 바로 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SBC도 좋은 방송국이지만 제가 아는 분이 KBC에서 본부장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선수들이 나온다면 아주 따로 편성을 할 겁니다!”
“김태현 선수. 저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저희 NBS로 오십시오!”
“…아니. NBS는 한국 방송국이 아니잖아? 해외 방송국 아니야?”
“쳇. 들켰군.”
“이 자식이 어디서 한국 기자인 척을 하고!”
“끌어내!”
은근슬쩍 끼어들었던 다른 나라 기자가 혀를 차며 쫓겨났다.
한국 선수들은 그 모습을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
상황이 점점 막장으로 가자 이세연이 정리에 나섰다.
“어느 방송에 나갈지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서 결정이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도 팬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기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송 경력이 긴 만큼 이세연의 답은 모범적이었다.
기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정도로.
전쟁 같은 인터뷰가 끝나고 나자, 선수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어.”
“고생하셨습니다.”
“김태현. 김태현.”
“?”
이세연이 작게 부르자 태현은 의아해했다.
“왜?”
“별 건 아니고. 오늘 있었던 경기 분석 간단하게 이야기하려고 불렀어.”
“지금 하게? 뭐 나쁠 거 없지.”
다른 사람이라면 ‘오늘은 좀 쉬면 안 되나요?’ 했겠지만 태현은 오히려 기꺼워했다.
빨리 하면 좋은 거지!
둘은 오늘 있었던 경기를 늘어놓고 분석에 들어갔다.
어느 부분이 좋았고, 어느 부분이 나빴고, 선수 중 누가 어디서 실수를 했고….
“추예지 선수가 생각보다 잘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 덕분에 편했지.”
“나하고 같이 할 때가 나았어, 추예지 선수하고 같이 할 때가 나았어?”
“…….”
경기 영상을 보고 있던 태현은 고개를 들었다.
이세연도 경기 영상을 보고 있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왠지 이상하게 기분에 걸렸다.
뭐지?
함정인가?
“혹시 정답이 정해진 함정 질문인가?”
“무슨 소리야. 그냥 앞으로의 전략을 위해 묻는 거야. 팀을 위해서.”
“그런 거였어? 괜히 착각했군.”
“그래서 나하고 같이 할 때가 나았어, 추예지 선수하고 같이 할 때가 나았어?”
“…아니. 이상하게 질문에 뭔가 있는 기분인데….”
태현의 예리한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질문에는 무언가 있다!
* * *
“어… 이게 뭐냐?”
캡슐에서 나온 태현을 맞이한 건 탁자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이었다.
케인이 코밑을 쓱 훔치며 말했다.
“국대팀 본선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준비했지.”
“…네가?”
태현은 오랜만에 공포를 맛봐야 했다.
케인이??
‘아니 이 자식… 내가 요즘 얼마나 잘 해줬는데.’
태현은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케인은 그 눈빛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너무한 거 아니냐!? 너희들이 자꾸 그렇게 내 요리를 개무시하니까 내 실력이 안 늘지!”
그러나 팀 KL 선수들은 매우 냉정했다.
“우리가 실험대냐? 우리한테 먹이고 싶으면 실력을 쌓아 와야지.”
“팀 KL의 밥상은 준비한 실력을 증명하는 곳이지 네가 연습하는 곳이 아니야 케인.”
“…….”
케인은 순간 울 뻔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나중에 여자친구한테도 대접해야 하니까 좀 먹어줘.”
“케인. 지금 네가 말한 문장의 모든 부분이 틀린 것 같….”
최상윤의 입을 정수혁이 막았다. 아무래도 저것까지 말했다가는 정말 울 것 같았던 것이다.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네가 먼저 먹어.
-싫습니다. 최상윤 씨가 먼저 드십시오. 아까 점심도 안 드셨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가장 고생 많이 한 태현이가 먼저 먹을까?
-단장이자 대표의 권한으로 거절하겠다.
셋이 침묵하고 시선만 교환하자 케인이 노려봤다.
“니들 지금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지?”
‘눈치만 빨라져가지고 저거.’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 같이 먹자.”
“아닙니다. 선배님. 오늘 고생 많이 하셨는데 저희 둘이 먹겠습니다.”
최상윤은 정수혁의 말에 정색했다.
왜 나까지 끼워 넣어?
“됐어. 설마 먹고 죽기야 하겠냐.”
태현은 탁자 위를 훑어보았다.
축하를 위해 셰프들도 쉽게 만들지 못하는 호화 요리…는 아니었고, 그냥 검색만 해도 방법이 100개는 나오는 축하상이었다.
계란말이에, 갈비찜에, 잡채 등등에….
“…잠깐 왜 미역국이 있지?”
“저놈 생일 메뉴 차리는 법으로 검색해서 봤나 보다.”
셋은 자리에 앉아서 한 술 떴다.
“으음!”
“으으음!”
“으흠!”
현실은 게임과 달리 메시지창이 없었다.
셋은 직접 말로 표현해야 했다.
“정말… 못 만들진 않았지만 엄청 맛있지도 않은 그 미묘한… 라인에 있는 요리인데.”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맛없게 만드는 것도 정말 재주 같습니다.”
“간을 아껴서 했군.”
놀랍게도 케인의 요리는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맛이 좀 애매하긴 한데 어떻게든 먹을 수는 있는 요리!
“이게 더 최악 아니냐? 맛없으면 그냥 버리기라도 하지, 그게 아니라서 우리가 이걸 다 먹어야 하잖아.”
“쉿. 케인 씨 들으면 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나는 내 사비 들여서 숙소 제공하고 너희들과 같이 대회에 나갔는데 이런 걸 먹고 있으니까, 너희들도 입 다물고 먹어라.”
태현의 말에 둘은 숙연해졌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식사가 끝나자 이다비가 벨을 누르고 찾아왔다.
그걸 본 케인이 반색했다.
실험 상대, 아니, 맛을 평가해 줄 사람이 한 명 늘어난 것이다.
“이다비! 잘 왔어!”
“…함정인가요??”
“아니… 함정은 아니고. 내가 요리를 했는데 나중에 여자친구 대접해 주려면 냉정한 맛 평가가 필요해.”
그 말에 이다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안 맞을 것 같은데….”
“어째서?!”
“저는 진짜 어지간하면 맛 신경 안 쓰고 다 먹거든요.”
“…….”
지금이야 방송도 대박나고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탄탄대로였기에 무X마 라면을 할인도 하지 않고 사도 됐지만, 이다비는 평생 가난에 시달려왔던 사람이었다.
근검절약이 뼛속에 밴 사람.
그런 이다비에게 맛 투정은 사치일 뿐이었다.
“그… 그래도 맛이나 봐줘.”
“괜찮다면요.”
“아니. 내가 새로 요리해 줄게. 고생했는데 든든하게 먹어야지. 그리고 남은 요리도 별로 없어.”
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말에 케인은 반박했다.
“아냐. 양 많이 해서 남았는데?”
“남은 거 별로 없다니까. 상윤이가 많이 먹었어.”
태현은 말 한 마디로 두 명을 동시에 억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최상윤은 매우 억울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가 저걸 많이 먹었다고?
억울한 건 케인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남았는데….
“봐! 많이 남았잖아!”
퍽!
“이제 남은 거 별로 없지?”
“…생, 생각해 보니까 남은 거 별로 없는 거 같아… 새로 요리해야 할듯….”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입 다물고 조용히 찌그러지란 뜻이었다.
“저 진짜 괜찮은데요.”
“아냐. 앉아 있어. 든든하게 먹어야지. 너 자꾸 간단하게 때운다고 동생들이 말하더라.”
“얘네들이 진짜… 아니에요. 예전보다 진짜 잘 때우고 있어요.”
태현은 이다비의 말을 무시했다. 태현과 이다비는 ‘잘 먹는다’의 기준이 달랐다.
“그러면 도우기라도 할래요.”
“도울 것도 없는데.”
“그래도요.”
“그래. 그러면 옆에 와줘.”
매우 억울한 배부름을 느끼고 있던 최상윤과 정수혁은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 냄새에 더욱 억울해졌다.
그냥 이걸 먹으면 속도 든든하고 한 끼 기분 좋게 잘 먹었을 텐데 웬 미친놈 때문에 꾸역꾸역 다른 것만 먹은 셈 아닌가.
“그래도 맛있지 않았냐?”
“…제가 양팔 잡을 테니 패시겠습니까?”
“야. 시끄럽다. 캡슐에나 들어가서 스킬이나 올려. 중국 선수들 보니까 다들 만만치 않더라. 너희들 그렇게 나태하게 굴다가는 다음 시즌에서 피눈물 흘릴 거다.”
“…….”
“…….”
태현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선수들은 조용히 일어서서 캡슐로 향하기 시작했다.
잔소리 듣기vs가서 스킬 레벨업하기.
무조건 후자였다.
“저… 저도 가서 연습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넌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뭘. 자. 밥 먹어.”
태현은 이다비를 앉히고 밥상을 차려주었다.
물 흐르듯 거침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케인과는 경험치 자체가 다른 것!
“맞다. 이다비. 먹으면서 들어. 방송 말인데.”
“아. 네.”
한국대표팀의 본선 진출은 막대한 화제가 되었다.
중국이 탈락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 요소 중 하나였을 뿐.
그것 말고도 본선 진출에는 너무 화젯거리가 많아서 하나만을 꼬집기 힘들 정도였다.
태현이 방송에 나오겠다고 말하자 관계자들은 서로 멱살을 잡고 죽이기 시작하….
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진지하게 협의를 했다.
그냥 한쪽에서 독점하면 여러 사람 시말서 쓰게 될 거 같고 경쟁도 과열될 테니, 서로 양보해서 협력하자.
결국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것.
관계자들의 경쟁과 다툼을 위한 도구가 아니지 않은가.
-담당할 PD는 우리 쪽 PD가 낫겠지?
-…….
-…….
시작부터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