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64화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 지금 제대로 오해하고 있다고!”
이카로스가 아무리 말한다고 해서 태현이 달라지진 않았다.
오해를 풀 기회도 없이 태현은 그냥 휙 걸어가 버렸다.
“야. 이카로스. 너 저번에는 길드 동맹이 그런 것까지 터치 안 한다고 말하지 않았냐?”
“되게 멋있게 말하더니….”
옆에 있던 랭커들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카로스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다 닥쳐라….”
“아니 이 자식 김태현한테는 아무 말도 못 했으면서 우리한테 저러는 거 봐라.”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냐!”
* * *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모두들 정말 고생했다!”
쑤닝은 벅찬 감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쑤닝과 쑤닝의 친위대 랭커들은 기쁨으로 떨고 있었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저 NPC가 바로 그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이은 그놈이란 말이지?”
“예. 전전대 오스턴 왕국의 왕이 저 NPC의 당숙부의 아버지… 아니, 뭐였더라, 어쨌든 하여간 핏줄은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정확한 신분이 뭐가 중요하냐!”
오스턴 왕가를 몰락시키고 나라를 찬탈한 길드 동맹이 이제 와서 핏줄을 찾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퀘스트 <오스턴 왕가의 핏줄>…]
[퀘스트 <아탈리 왕국의 왕>…]
바로 오스턴 왕국의 남부 역병 지대 정화 퀘스트 때문이었다.
오스턴 왕국 남부 역병 지대!
판온에는 미친놈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지전에서 졌으면 곱게 떠날 것이지, 영지에 역병 폭탄을 터뜨리고 영지민 박박 긁어모아 가버린 미친놈들이었다.
덕분에 길드 동맹은 수많은 애로사항 맛봐야 했다.
[남부 역병 지대의 독기가 흘러나와 농사를 망칩니다!]
[수확이 줄어들어 주민들의 만족도가 내려갑니다!]
[세금이 내려갑니다! 주민들의 불만도가 올라갑니다!]
[연쇄작용으로…]
남부에서 세금 못 걷는 건 물론이고 그 근처로 독기 퍼지고, 오염된 몬스터 흘러나오고, 그쪽으로 지나갈 때 길 막혀서 못 지나가고….
길드 동맹의 숙원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이 역병 지대 정화일 정도였다.
그래도 길드 동맹의 뛰어난 랭커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 결과, 역병 지대 공략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역병 지대의 중심에서 웬 미친 데스 나이트 부대들이 나타났다.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모시고 오고, 그분에게 정당한 대접을 해줘라!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아탈리 왕국의 국왕을 데리고 와라! 이 두 가지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역병 근원의 연못>을 폭파시켜서 이 주변을 영원히 오염의 땅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자기들이 오스턴 왕가의 기사들이라고 주장하는 데스 나이트들은 완고하게 협박을 했다.
결국 길드 동맹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싹 사라진 왕가의 핏줄을 찾아야 한다니.
“다들 정말 고생했다.”
쑤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 퀘스트에서 길드 동맹 랭커들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탕창장. 네 탐험가로서의 능력이 없었다면 저놈을 찾을 수 없었을 거다. 난 네가 할러스나 제카스, 호마 같은 퇴물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린찬후이. 네 흑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있었기에 이 근처에서의 수색이 가능했다. 난 네가 이세연이나 트고사 같은 흑마법사보다 더 대단해질 거라고 믿는다.”
“감사합니다만 그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이런 지나치게 솔직한 새끼 같으니. 이정수. 처음에 난 네가 한국인이라 믿지 않았지.”
“저도 길마님이 중국인이라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하면서 난 네가 믿을 만한 놈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닙니다! 돈 때문에 하는 겁니다. 돈이나 빨리 주십시오!”
“…….”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길드 동맹 친위대 랭커들의 모습에 쑤닝은 분노했다.
‘심호흡. 심호흡.’
쑤닝은 이런 걸로 이제 화내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김태현이 영지 날려 버렸을 때만큼 화가 날까?
아니었다.
‘와. 쑤닝 님 저걸 참네.’
‘요즘 부쩍 인내심이 느신 듯?’
“여기 있는 모두들의 협력에 감사한다. 자! 이리 와라!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이은 자여!”
쑤닝은 당당하게 NPC에게 말했다.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이은 왕족, 스타인하우어는 벌벌 떨며 말했다.
-오지 마라, 이 탐욕스러운 모험가 놈들!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다. 스타인하우어! 우린 널 대접해 주려고 이러는 거다!”
[악명이 높습니다!]
[오스턴 왕실을 학살했습니다!]
[……]
[……]
[……]
[스타인하우어가 당신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젠장.’
쑤닝은 후회됐다.
이럴 때면 화술 스킬을 안 키운 게 후회가 됐다.
키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스타인하우어. 그러면 죽기라도 할 거냐? 우린 정말로 네게 정당한 대접을 해주려고 이러는 거다!”
-정당한 대접이라니 그게 뭘 말하는 거냐?
NPC의 말에 길드 동맹 랭커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정당한 대접이라….
그러고 보니 그게 뭐지?
-내게 왕관을 돌려주겠다는 거냐?
“미쳤냐??”
-…역시!
“아, 아니. 진정해라. 스타인하우어. 잘 생각해 봐라. 넌 애초에 왕이 아니었다! 왕이 됐을 수도 없는 놈에게 왕관을 주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으음. 그건 그렇다.
스타인하우어는 의외로 납득했다. 쑤닝은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네게… 높은 작위와 지위를 줄 생각이다.”
-어떤 자리냐?
“어… 뭘 원하느냐?”
-흠… 나는 일단 왕국 기사단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
“미쳤….”
쑤닝이 다시 한번 욕을 하려고 하자 길드 동맹 랭커들이 말렸다.
“길마님. 자꾸 거절하다가 저놈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왕국 기사단장 자리를 달라니. 미친 거 아니냐?? 그 자리가 어디라고!”
지금 오스턴 왕국의 직위는 길드 동맹 길드원들이 전부 다 해먹고 있었다.
기사단장 같은 직위는 갖고 있으면 명성은 기본에, 매 주마다 들어오는 보너스들이 매우 쏠쏠한 것이다.
이런 감투들은 길드 동맹이 굴러갈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충성을 바쳤을 때 그에 걸맞은 대가가 오지 않는다면 누가 길드 동맹에서 고생을 하겠는가.
“그래도 역병 지대 정화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입니다.”
“크윽….”
다른 랭커들의 설득에 쑤닝은 결국 넘어갔다.
간신히 찾아낸 오스턴 왕가의 핏줄을 잃어버릴까 봐 겁을 먹은 것이다.
“좋다! 스타인하우어. 네게 왕국 기사단장의 자리를 주겠다! 널 위해서 이만큼 해주는 것이니 네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남의 가문을 쫓아내놓고 생색은 더럽게 내네….
“방금 뭐라고 했냐?”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쑤닝은 스타인하우어의 능력이 좀 쓸 만하길 빌었다.
자리에 앉은 NPC의 능력치가 별로면 온갖 페널티가 따르는 것이다.
[기사단장의 명성이 너무 낮습니다! 불만도가…]
[기사단장의 레벨이… 불만도가…]
[불만도, 불만도, 불만도…]
안 그래도 오스턴 왕국을 다스리면서 불만도에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많이 시달린 쑤닝이었다.
간신히 수습했는데 여기서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왕가의 핏줄을 이은 귀족인데 능력치가 없진 않겠지?
[기사단장의 명성이 너무 낮습니다! 페널티…]
[기사단장이 도벽이 있습니다! 기사단의 아이템이 일정 확률로 사라집니다!]
[기사단장이 도박 중독자입니다! 기사단의 자금이 일정 확률로 사라집니다!]
[기사단장이…]
[기사단장이…]
[…쓰레기입니다!]
“…저 미친놈 어디서 발견했지?”
“어… 도시 뒤편의 지하도박장에서 발견했습니다.”
쑤닝은 이마를 짚었다.
뭔가 단단히 실수한 기분!
판온에는 멀쩡한 귀족들만 있지 않았다. 저렇게 또라이 같은 귀족들도 있는 것이다.
능력 부족+탐욕+도박 중독=트리플 크라운!
‘돌아버리겠네.’
“저놈 감시 붙여. 이상한 짓 못하게.”
“…예.”
그래도 어쩌겠는가.
역병 지대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이제 다 됐으니 길드 전체에 공지 올려라. 역병 지대 정화 들어갈 거니까, 김태현 건드리지 말라고.”
그래도 최근에 대회 같이 해서 다행이었다.
팀 KL 측에 낸 친구비, 아니, 출연료 덕분에 사이가 좀 나아진 편인 것이다.
이 정도면 퀘스트 깨는데 얼굴 한 번 내밀어달라고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길드에서 공지합니다. 역병 지대 퀘스트 진행됩니다. 길드에서 공지합니다. 역병 지대 퀘스트 진행됩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김태현 쪽에 접촉 시도해야 하니 모두 행동을 삼가주십시오.
“…….”
길드에서 공지 돌리는 걸 듣자 이카로스의 얼굴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어떻게 꼬여도 일이 이렇게 꼬이냐??
* * *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많은 시청자 분들이 지켜봐주고 계십니다.
-그렇죠. 정말로 기록적인 인파네요!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세요!
판온 경기를 실감 나게 입체로 볼 수 있는 E스포츠 경기장.
모두 다 오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대표팀 vs 중국대표팀.
본선 경기도 아닌 조별리그 경기였는데도 역대급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 여긴 미국이었는데도!
-오늘 경기가 이 조에서만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 일단 한국 국가대표팀과 중국 국가대표팀은 E스포츠에서도 대표적인 강팀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예전부터 전통적인 강자였고, 중국은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받고 최근에 왕좌를 차지한 강자니까요.
-하지만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캐스터의 말에 경기장에 몰린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바로 그랬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중국대표팀이 예선탈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캐나다 국가대표팀이 일본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어제 승리를 거뒀습니다!
2:0의 깔끔한 승리.
캐나다 국가대표팀은 일본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캐나다 국가대표팀 스코어 1승 1패 1무.
일본 국가대표팀 스코어 3패.
중국 국가대표팀 스코어 1승 1무.
한국 국가대표팀 스코어 2승.
-한국 국가대표팀은 이미 자력으로 16강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2:0으로 진다고 하더라도 한국 국가대표팀은 16강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중국 국가대표팀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무승부 이상을 따내지 못하면 놀랍게도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실지도 모릅니다!
캐스터는 매우 흥분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캐스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재밌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중국인이었다면 뒷목 잡을 상황이었지만, 그는 미국인이었다.
중국 국가대표팀이 일찍 사라져주면 매우 감사할 일!
-만약에 똑같이 패배할 경우에는? 패배할 경우에는 동률이 아닙니까?
-아쉽게도 아닙니다! 캐나다 국가대표팀은 일본 상대로 2:0을 따냈지만, 중국 국가대표팀은 실수로 한 라운드를 졌습니다. 이 차이를 메꿔야 합니다!
-아아…! 그것 참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담감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사실 이 복잡한 경우의 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기면 됩니다! 이기면 복잡한 경우의 수 필요 없이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미국 방송을 보고 있던 중국인들은 입에서 쌍욕을 퍼부었다.
저 캐스터 새끼 저거 뚫린 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