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63화
“진심으로 묻는 건데.”
“당연히 무서워서 못 끼어들었겠지. 나였어도 고민했을걸.”
이골로약 레이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진행된 레이드였다.
원정대가 이렇게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줬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걸 멀리서 봤다면 아무리 겁 없는 사람이라도 끼어드는 걸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끼어들었다가는 이골로약과 함께 가루가 될 수 있다!
“아. 진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러면 그거 말고 무슨 이유가 있는데?”
“난 날로 먹으려는 놈들이 그런 거 때문에 못 끼어들었다는 건 상상도 못했지.”
‘…네가 너무 겁이 없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할래? 죽일까?”
이세연의 질문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이미지 신경 안 써? 유성 게임단이미지가 있을 텐데.”
우스운 말이지만, 리그에서 뛰는 게임단 소속 플레이어들은 어느 정도 이미지를 신경 써야 했다.
게임단 소속인 이상 아무나 붙잡고 PK해서는 안 됐던 것이다.
“선량한 플레이어들 공격하지 말라는 게 규칙이지 퀘스트 강도질하러 온 사람 잡지 말란 법은 없어. 이런 걸로 따진다면 따지라고 해.”
유성 게임단은 이런 걸로 고리타분하게 선수들을 괴롭히는 게임단이 아니었다.
물론 명문 게임단 중에서는 규칙이 너무 세세하고 엄격해서 선수들이 ‘못해먹겠다!’라고 따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애초에 이세연은 회장과 직통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선수인 것이다.
단장이 와서 ‘자네 게임 플레이가 너무 야만스럽지 않은가?’ 하면 바로 회장에게 전달 가능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그러면 죽일… 아니다. 지금 시간 없는데 일 시켜야겠군.”
“?”
태현은 찾아온 파티들을 보며 외쳤다.
“팬 여러분들. 잘 됐습니다. 이렇게 오신 김에 한 가지 일을 같이 하면 되겠네요.”
“예? 그게 뭐죠?”
“미로에서 아이템 찾아오세요.”
“…그걸 저희가 왜 해야 하죠?”
랭커 중 한 명이 무심코 물었다. 팬인 척 해야 하는데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미친놈아! 뭐하는 거야!’
‘죽을 거면 혼자 죽어!’
‘미, 미안.’
태현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걸 안 하면 죽을 테니까요.”
“…….”
“…열심히 찾겠습니다.”
* * *
“아. 누군지 알겠다!”
“?”
이세연은 손뼉을 쳤다.
트고사가 누군지 떠올랐던 것이다.
“신진 랭커 중에 하나였어. 네크로맨서 유망주라고 기사 몇 번 올라왔었거든.”
“이세연.”
“?”
“나 걔가 누군지 진짜 조금도 관심 없는데 그냥 아이템 찾으면 안 돼?”
“…….”
태현의 반응에 이세연은 시무룩해졌다.
“골렘들이랑 데스 나이트들이 열심히 찾고 있잖아….”
“너도 같이 찾으면 더 빨라질 거 아냐.”
“그래 너 잘났어.”
이세연이 살짝 삐진 것 같자 태현은 미안해져서 달랬다.
“미안. 그래서 그 유망주가 뭐하는 놈인데?”
“트고사라고, 같은 직업끼리는 원래 비교해서 기사 많이 올라오는 거 알아?”
“응. 나도 올라오는 거 봤지.”
기자들은 조회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
-김태현 게 섯거라… 대형 유망주 등장! 딜러판에 신선한 새 바람….
-충격! 김대현을 위협하는 대형 신인… 김대현 ‘나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라고 밝혀….
“네크로맨서 직업이 투기장 리그에서 그렇게 유리한 직업이 아닌데도 기사가 나오니까 신기해서 챙겨봤지. 상대하게 될 일 생기면 꼭 상대해 보고 싶었는데.”
이세연 본인은 아닌 척해도 이세연은 승부욕의 화신이었다.
태현 못지않게 승부에 집착하는 사람!
기사에서 그렇게 띄워준 만큼, 이세연은 만약 만나게 되면 한 번 싸워보고 싶었다.
“저런. 나 때문에 못 싸운 건가? 그냥 내가 말할 테니까 가서 싸울래?”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게 신기해서. 무엇보다 성격이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어땠는데?”
“되게 거칠다고 들었거든.”
기사를 보면 트고사는 실력이 괜찮은 대신 오만한 태도로 여러 문제를 일으킨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공손했던 것이다.
“기사가 잘못 나온 거 아냐?”
“하긴 기사는 믿을 게 안 되긴 해.”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기사에서 부풀려지는 것들이 한두개가 아닌 것이다.
* * *
“야. 김태현하고 이세연이 이쪽 노려보는데.”
“…우리 제대로 하고 있지 않냐?”
“우리 중에 불만스러운 놈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똑바로 하라고!”
랭커들은 땅을 파고 갈면서 서로를 탓했다.
원래라면 태현의 공략대와 충돌할 각오까지 하고 온 이들이었지만, 그럴 각오는 싸우는 모습에 쑥 들어간 상태였다.
보스 몬스터가 남아 있어야 싸울 각오를 하지 그런 것도 없는데 각을 세워서 뭐한단 말인가.
“김태현 걸어온다. 시선 피해! 시선 피해!”
태현이 걸어오자 랭커들은 꼬투리를 잡히는 걸 피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아까 말하는 걸 보니 태현이 팬이라는 말에 넘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봐줄 테니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경고가 분명했다.
“트고사?”
태현은 트고사를 불렀다.
트고사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뒤로 한 채 공손하게 돌아섰다.
“예?”
“보니까 꽤 유명한 네크로맨서던데. 맞나?”
“…!”
태현의 말에 다른 랭커들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트고사가 신진 랭커들 중에서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만, 태현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같은 파티로 모였지만 엄연한 경쟁자.
랭커들은 질투 섞인 눈으로 트고사를 쳐다보았다.
“맞아요.”
트고사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우쭐함이 섞여 있었다.
“기사 봤는데 이세연하고 맞먹을 정도로 강하다고 하더라고.”
오면서 태현은 기사 몇 개를 읽었다.
-트고사, 네크로맨서의 새로운 흐름을 어쩌구저쩌구.
-네크로맨서 트고사. 청순 미모에 실력까지….
-트고사. 막말 논란… 네크로맨서다운 인성 파탄….
“기사들을 읽어봤나 봐요?”
“어. 근데 자꾸 외모 이야기만 나와서 원하던 걸 찾기 힘들더군. 이세연보다 더 뛰어난 외모, 이런 말들만 많던데….”
“기사가 아무래도 좀 과대포장해서 나온 게 있지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
태현의 말에 트고사는 정색했다.
지금 뭐라고?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실력과 얼굴에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트고사였다.
이세연과 붙어 본 적 없어서 실력은 확신을 못 하지만, 적어도 외모로 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뭐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요?”
“편하게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상관없어.”
“오해가 있는 것 같으신데 저는 평소에 예의를 지키거든요.”
“그래? 정말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어쨌든 내가 궁금한 건… 혹시 이세연하고 싸워볼 생각 없나?”
“…….”
황당한 제안에 트고사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이지?
“뭔… 소리?”
“아니, 기사에서 이세연하고 맞먹는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내가 알기로 네크로맨서 쪽에서 이세연하고 맞먹을 사람은 없을 거 같거든.”
태현은 진지하게 알고 싶었다.
만약 트고사가 이세연과 맞먹을 정도라면 진지하게 국대팀 영입을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아니, 팀 KL에 영입하고 싶다!
이세연을 꺾은 인재라면 태현이 무릎 꿇고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
트고사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존댓말도 갖다 치우고 대답했다.
“난 싸울 생각 없는데?”
“왜? 실력을 증명해 보고 싶지 않아?”
“…이세연이 보냈나?”
트고사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태현에게 말했다.
“아니. 이세연은 별생각 없는데 내가 궁금해서. 붙어보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붙어보자고.”
원래 어떤 일이든 하라고 멍석 깔아주면 하기 싫어지기 마련.
게다가 이세연과 같이 파티 플레이 하던 태현이 이런 제안을 하자 트고사는 덜컥 의심부터 들었다.
함정인가?
‘감히 이세연하고 맞먹는다는 평가를 들어서 화가 난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됐다.
태현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트고사를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가 영상을 올리고 게시판에서 떠들겠지.
이걸 받아들이면 결투장이 아니라 공개처형장으로 간다!
“난 퀘스트하거나 부딪히는 사람하고만 싸우지 이렇게 실력 증명하려고 1:1로 싸우지는 않아.”
“그래? 아쉽게 됐군.”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혹시나 네크로맨서 인재를 발굴하나 했는데….
“뭔 개소리야 트고사? 너 싸우는 거 엄청 좋아하잖아.”
“심심하면 시비 턴 다음 1:1 하고, 영상으로 정리해서 게시판에 올리기까지 하잖아.”
트고사는 각종 저주 마법으로 1:1에 능숙한 네크로맨서였고 그걸 즐겼다.
같이 한 랭커들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트고사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언제?”
“11일 전에 게시판에….”
-주둥아리 안 닥쳐? 1:1로 붙을래?
“…….”
싸늘한 트고사의 태도에, 말을 꺼낸 랭커는 서러워졌다.
김태현은 무서워서 저러면서 나는 만만하니까 저러는 거 봐!
지나가려던 태현은 길드 동맹 소속 오크 랭커, 이카로스를 보고 멈칫했다.
“아니 잠깐. 아저씨들이 아니잖아? 오크라서 넘어갈 뻔했네.”
‘젠장.’
“너 길드 동맹 소속 아닌가? 저번에 부딪혔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 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거에 집착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태현.”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 벌써 이렇게 길게 변명부터 하지?”
태현은 신기해했다.
길드 동맹 소속 랭커도 여기 참가했었나?
“길드 동맹의 다른 랭커들도 있나?”
“아니. 나 혼자 개인적으로 참가한 거다!”
이카로스는 태현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자 다급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길드 동맹에서 김태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 때렸는데 무시하고 온 것 아닌가.
그 말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쑤닝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지? 교활한 놈 같으니.”
“…아니!!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믿지 않았다.
저런 걸 믿기에는 이제까지 했던 전적들이 있는 것이다.
“길드 동맹도 참 여전하군. 이렇게 몰래 랭커 보내서 날로 먹으려고 말이야.”
말이 휴전이지 판온 끝날 때까지 친하게 지낼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교묘하게 랭커를 보내서 퀘스트를 방해하려는 걸 보니 감탄만 나왔다.
‘저런 성실함은 나도 배워야지.’
화가 나진 않았다.
딱히 상대한테 믿음을 갖고 있거나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태현은 스스로를 성찰하게 됐다.
길드 동맹 놈들도 저렇게 성실하게 남을 견제하는데, 태현도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쑤닝한테 전해라. 나도 열심히 하겠다고.”
“아니… 아니… 진짜. 김태현! 이러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왜 이래? 미쳤냐?”
“진짜 잘못했다!!”
이카로스는 태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레벨 낮은 초보자 때만 볼 수 있다는 전설의 스킬!
랭커 되고 나서 이러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건 내가 정말 독단적으로 한 일이란 말이다!”
“쑤닝 이 놈 진짜 치밀하고 무서워졌네. 이렇게까지 하라고 했냐? 지금 바로 책임 물을 생각 없으니까 적당히 해라.”
“아니라니까! 진짜!”
이카로스는 답답해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퀘스트에 한 번 숟가락 올리려고 했다가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