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357화 (1,356/1,826)

§ 나는 될놈이다 1357화

이데르고 교단은 사실 악신 교단치고 매우 사이가 끈끈한 편이었다.

저번에 역병 함대 끌고 구출하려고 오던 거 보면 알 수 있었다.

아키서스 교단이나 사디크 교단이었다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구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데르고 교단의 주교 후계자답게, 페르스메스는 매우 헌신적이었다.

‘쟤 악신 교단 맞냐?’

태현은 각종 버프 빵빵하게 받으면서도 살짝 미안해졌다.

쟤는 그냥 데메르 교단 가는 게 나아 보이는데….

-역병의 제물!

[페르스메스가 스스로의 HP를 소모해 축복을 걸어줍니다!]

‘…….’

어쨌든 덕분에 태현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힐러 한 명이 전담해서 지원해 주는 것만큼 든든한 일도 없었는데, 그게 페르스메스 같은 주교 NPC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콰콰콰콰콰쾅!

‘더 밀어붙여야 한다!’

확실히 승기를 잡은 기분이 들었다.

스켈레톤들이 늘어나는 숫자보다 줄어드는 숫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일 때!

태현은 사납게 외쳤다.

“몰아붙여!! 계속 몰아붙여! 쉬지 마! 너 아까 힐 받았으면서 왜 뒤로 오냐! 쉬지 말라고!”

이세연도 사납게 외쳤다.

“거기 뒤로 오지 마! 버텨! HP 남은 거 알거든?! 15%면 충분해!”

“…….”

“…….”

이세연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길마님이 두 명이야…!’

‘뭐 이런 끔찍한 악몽이 있냐?’

케인은 어디 가면 ‘소주가 쓰다고? 난 김태현 밑에서 힘든 일 많이 겪고 나니깐 달달한 음료수 같다’ 같은 헛소리를 하고 다녔지만, 사실 이세연 밑의 길드원들도 할 말은 많았다.

이세연도 만만찮게 사람 쪼아대고 굴리는 것이다.

둘을 뭉쳐 놓으니 아주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스켈레톤들이 전부 쓰러집니다!]

“…이 미로 던전. 설마 계속 이렇게 물량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

이세연의 중얼거림에 태현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던 것이다.

스켈레톤들이 미친 듯이 나오는 것만 해도 이렇게 벅찼는데, 여기서 더 강해지면?

당장 구울이나 데스 나이트까지 가면….

‘아직 깰 수 없는 난이도인가?’

태현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남들이야 ‘와 김태현은 겁이 없나 봐요 좀 있으면 마계 가서 악마 공작 모가지도 수집해 올 듯’ 하면서 떠들었지만, 태현 본인은 지극히 냉정했다.

게임인 이상 아직 깰 수 없는 퀘스트나 아직 잡을 수 없는 보스 몬스터는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러나는 것도 용기였다.

가장 최악인 건 남들 시선 신경 쓰다가 후퇴를 못 하는 것.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후퇴하는 건 쪽팔리잖아!

-우리 파티 명성이 있는데…!

다행히 태현은 그런 것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후퇴해야 할 때는 후퇴한다.

“여기야! 여기!!”

“여기라고!”

-몬스터들이다!! 전투 준비!!!

“몬스터가 아니라 오크 모험가들이야….”

성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외치는 모습에, 태현이 뒤에서 말렸다.

몬스터가 아니라 오크 아저씨들이었던 것이다.

“아니. 진짜 태현이가 구하러 왔네?!?!”

“태현아.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거냐??”

“아니… 왜 구하러 온 거야?? 안 구하러 온다는 거에 걸었는데??”

아저씨들은 태현을 보고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김태산 제외하고 나머지 전원이 다 ‘안 온다’에 걸었던 것이다.

-태현이가 구하러 온다니까?!

-길마님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술이나 마시세요.

-빨리 다 회복한 다음 탈출 시도하고 안 되면 전멸하죠.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환장하겠네! 온다고 했잖냐! 왜 못 믿는데!

-형님. 태현이한테 속은 겁니다. 태현이가 왜 구하러 오겠어요?

-내기해 이 자식들아!!

-쯧쯧… 길마님.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하지만 태현은 이렇게 구하러 와있었다.

“왜 구하러 온 거냐?”

“지도 받고 정보 좀 먼저 얻은 김에 구하러 왔는데요?”

“아아아…!”

아저씨들은 납득했다.

그런 뒷거래가 있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건 반칙 아닙니까!”

“시끄러워 이것들아.”

어쨌든 오크 아저씨들은 우르르 빠져나왔다.

…조그만 구멍에서!

“땅속에서 버티고 있었던 겁니까?”

“쉿.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나중에 영상 공개할 때 이 장면은 빼줘.”

오크 아저씨들은 골드를 찔러 넣어주면서 태현에게 부탁했다.

그랬다.

여기서 버티기 위해 오크 아저씨들은 지하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던 것이다.

겉모습을 신경 쓰는 파티였다면 절대 선택하지 못했을 공략법!

하지만 아저씨들은 딱히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자 바로 땅 파고 안에 들어가서 누웠다.

“스켈레톤 한 번 다 잡으셨는데 그냥 뚫고 나오시지 그랬어요?”

“우리가 그 스켈레톤 잡으려고 아이템을 얼마나 쓴 줄 아냐? 돌아가서 보충해야 해.”

태현의 원정대와 달리, 오크 아저씨들은 훨씬 인원이 적었다.

저렇게 정면승부를 벌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괜히 들킬까 봐 땅 파고 들어가서 누워 있던 게 아니었다.

김태산은 흙 좀 툭툭 털어낸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상으로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각 교단에서 나온, 정예 성기사단과 사제단.

깃발을 휘날리며 빛을 뿜어내는 이들은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든든했다.

‘용케 저런 놈들을 고용했어.’

확실히 태현과 김태산은 같은 왕이지만 위치가 전혀 달랐다.

태현은 중앙 대륙 왕국 하나를 장악해서 여러 최중요 NPC들과 안면이 있었지만….

김태산은 변방의 야만족 족장!

물론 김태산은 저 먼 우르크에서 <나는 자연인이다> 찍는 것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지만, 저런 전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걸 보면 좀 부러웠다.

우르크 쪽은 이상한 놈들밖에 없는데!

“헉. 이세연 선수잖아?”

“우리 딸이 이세연 엄청 좋아하는데.”

“사인 좀 받을 수 있나?”

“길마님. 태현이한테 부탁해서 말 좀 전해주세요.”

“…쪽팔리게 꼭 그래야 하냐?”

김태산은 매우 싫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식뻘인 플레이어들이 구출해 준 것도 솔직히 부끄러워 죽겠는데, 이 길드원이란 놈들은 창피를 모르고 사인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김태현이 아니라 이세연한테 사인해달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다 받았으니까!

팀 KL 사인은 이미 옛날 옛적에 김태산이 다 받아가서 하나씩 돌렸던 것이다.

아저씨들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알겠다 이 자식들아.”

김태산은 한숨을 푹 쉬더니 태현에게 말을 걸었다.

“저, 그러니까 말이다, 그, 이세연 선수 사인을 저 작자들이 받고 싶다는데….”

“별로 안 어려우니까 가서 말해보죠 뭐.”

태현은 의외로 선선히 응했다.

자기가 하는 사인도 아니고 이세연한테 해달라는 사인이니, 그냥 말 정도 전해주는 게 뭐 어렵겠는가.

아저씨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기다렸다.

되나?

되나???

이세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웃으면서 다가왔다.

오크 아저씨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세연 선수는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도 최고시군요!”

“…?”

옆에서 듣고 있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나는??

이세연이 길드원들에게 싹 사인을 해주자, 김태산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우리 아들하고 같이 돌아다니느라 힘들 텐데.”

“아니에요. 김태현 선수와 같이 돌아다니는 건 저도 즐겁습니다.”

이세연은 매우 예의 바른(태현에게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태도로 대답했다.

그 모범적인 모습에 아저씨들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태현이 놈이랑은 인성부터가 달라!”

“하여간 태현이 놈 판온 1에 원수 많던 게 이해가 간다니까.”

“저러니까 졌지.”

“어떤 분이십니까??”

태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말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현이 검을 들고 눈을 부릅뜨자 아저씨들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저거 눈깔 봐라!’

‘사람 죽일 눈 아니냐?’

농담 한 번 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김태산은 감사 인사를 계속했다.

“같이 팀으로 뛰는데 태현이가 뭐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 하는데, 저놈 그런 것도 안 했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세요. 얼마나 많이 대접했는데.”

“어? 진짜?”

김태산은 의아해했다.

태현에게 그런 배려의 마음이 있었단 말인가?

“게임에서 제가 계속 요리 먹이고 있습니다.”

“…게임 말고 인마…!”

현실에서!

“아버지. 이세연 선수가 저보다 수입이 적지 않을 텐데… 이세연이 알아서 사 먹겠죠. 그리고 유성 게임단 숙소는 거의 호텔 수준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 숙소보다 밥 잘 나올걸요?”

태현이 식단 짜고 돌리는 팀 KL 숙소보다, 전문 영양사와 요리사들이 상주하고 있는 유성 게임단 숙소가 호화로울 게 분명했다.

태현이 아무리 열심히 요리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식. 호화로움의 차이가 났다.

“…아니. 말 나온 김에 가서 먹어볼래.”

“!?”

이세연의 말에 태현은 놀랐다.

무슨 의미지?

“설마 남의 숙소 와서 식단 비웃으려는 생각은 아니지?”

“넌 날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건데?”

“아니… 미안. 그거 말고는 이유가 안 떠올랐어.”

“그냥 궁금해서 먹어볼 수도 있지. 그렇게 많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거 케인 놈이 과장해서 말한 거야. 생각보다 맛없어.”

팀 KL 숙소 식단에 관한 이미지는 좀 부풀려진 게 컸다.

특히 케인 때문에.

-오늘 경기 이겨서 너무 기쁩니다! 돌아가서 밥 먹고 싶습니다!

-오늘 경기 정말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돌아가서 밥 먹고 자야겠습니다!

-오늘 아침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든든하게 먹은 만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케인이 방송 나갈 때마다 ‘밥이 맛있어요’ 소리를 해대니, 사람들이 ‘와 밥이 진짜 맛있나 봐’ 같은 생각을 해대는 것이다.

-팀 KL 밥이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저러는 거냐?

-김태현이 무슨 약 탄 거 아님??

“다비한테 물어보니까 맛있는 거 맞다던데?”

“그야 이다비는 착해서 케인이 요리한 것도 맛있게 먹어주는….”

태현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이세연이 너무 친근하게 이다비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둘이 왜 이렇게 친해졌지?

태현은 몰랐지만 지금 태현이 느끼고 있는 건 질투심이었다.

“어쨌든 팀 KL 숙소 오면 뭐 밥 한 끼 대접해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한데….”

“저도 가고 싶습니다!!”

류태수가 손을 들며 박력 있게 외쳤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너도 오게? 그래. 유성 게임단 다 같이 손잡고 오면 되겠네.”

류다영은 있는 힘을 다해 류태수의 등짝을 때렸다.

류태수는 스턴 상태에 걸려 말을 하지 못했다.

“?!”

“오빠는 못 갈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 그러면 이세연만 오던가.”

류태수는 황망한 눈빛으로 류다영을 쳐다보았다.

동생아! 이게 뭐하는 짓이니?

* * *

“땅굴… 땅굴이라.”

“…….”

태현이 고민하면서 주변을 돌아다니자, 우리 안에 갇힌 악마들은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 미친놈이 뭘 고민하고 있는 걸까?

뭐든 간에 그들 건강에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땅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아저씨들도 꽤 오랫동안 안 들켰고 말이지.”

위로 날아가거나 돌아가는 방법이 안 된다면 밑으로 가보면 어떨까?

게다가 여기에는 땅 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왜 오한이 드는지 모르겠군.

-굶주린 혼돈의 기운 때문일 거요. 조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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