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54화
아무리 판온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완벽한 가상현실게임이라지만, 역시 활약하는 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두뇌.
날카롭게 갈고 닦여진 반사신경.
어느 스포츠든 간에 나이 든 사람이 유리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 따위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중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주봉식이 바로 그러했다.
“나는… 예전부터 선수가 되고 싶었다.”
“…….”
“판타지 크래프트 때도 난 선수가 되고 싶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해서 하지 못했지만….”
“아니. 봉식아. 말은 똑바로 하자. 판타지 크래프트 때 네가 선수가 못 된 건 네가 개같이 못해서지.”
“동네 피시방에서 열린 대회도 예선탈락 했는데 네가 어떻게 선수가 돼.”
“넌 판온한테 감사해야 해 인마. 직접 몸으로 뛰니까 네가 그나마 하는 거지 마우스로 했으면 넌 도전도 못했어.”
친한 친구들이 묵직하게 진실로 명치를 때렸지만 주봉식은 무시했다.
“친구들아! 판온에 중년 선수들이 없는 게 아니다!”
실제로 2부 리그에는 중년 선수들도 몇 명 있었다.
밀리는 반사신경을 화려한 장비와 빛나는 연륜으로 커버하는 중년 선수들.
물론 그 선수들은 젊었을 적에도 엄청 잘했던 선수들이었고….
‘근데 봉식이는 젊었을 적에도 못했던 놈이잖아.’
‘판온 말고 다른 게임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못했지.’
“이번에 <불타는 청춘>이 방송에 나가는 걸 보면서 생각했지. 아, 저렇게 다른 사람들도 나이에 신경 쓰지 않고 도전을 하는데….”
유 회장은 ‘LK 사장이 드디어 미쳤나?’라고 생각했지만, LK 갤럭시가 야심 차게 추진한 <불타는 청춘> 프로젝트는 꽤나 흥행을 거뒀다.
중년 이상 플레이어들 중에 판온 선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훈련시키고 실제 선수로 데뷔시키는 방송!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와 비슷했지만, 확고한 중장년 팬들의 응원으로 차별성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송이 주봉식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도…!
나도 선수가 되고 싶다!
그런 와중에 나온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는 기회처럼 보였다.
“그래. 봉식아. 우린 널 응원한다. 네가 뭐… 나이도 많고 실력이 부족하면 좀 어떠냐.”
“실력이 부족하단 말은 왜….”
“맞아. 우리가 봉식이를 응원해 주긴 해야지.”
아저씨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했다.
이 나이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친구들이 응원해 주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나이 많고 실력 부족해도 응원해 줘야 한다!
“그래서 이 <굶주린 혼돈의 미로>를 공략해야 한다고?”
“진짜 심사위원 새끼들이 나쁜 새끼들이네. 지들이 공략하는 거 아니라고 막 던지는 거 봐. 심사위원도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죽으면 페널티 보상해 줄 것도 아니잖아. 이게 그… 그 뭐시냐. 열정페이 아니야?”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태현이잖아.”
“…하여간 태현이 그놈 어렸을 때부터 좀 걸물이긴 했어.”
아저씨들은 수군거리며 태현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집에 찾아온 아저씨들 상대로 내기를 벌이면 절대 지지 않았던 불패소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독함 때문에 ‘이놈은 크면 뭐가 될까’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E스포츠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잠깐. 그러면 태현이한테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니야?”
“공정성에 어긋나지.”
“공정성은 무슨… 거기 참가한 놈들 보니까 어? 잘생긴 얼굴로 팬들 모아서 자기 추천하게 여론 모으고 있더라! 그런 싱싱하고 잘생긴 친구들을 봉식이가 어떻게 이겨!”
“…….”
주봉식은 속으로 친구들을 욕했다.
응원을 해주는데 신기하게 듣는 사람 기운이 빠지는 현상!
“인기 모으는 것도 실력이긴 하지. 우리라도 봉식이 응원해 주자.”
“나도 게시판에 글 올리고 있는데 영 반응이 별로더라.”
-횐님들,,, 여기,,, 오크아님,,, 선수가 참 멋지지 않습니까??
└저 선수 아버지세요?
└└삼촌인 듯.
“난 팬들의 인기투표는 필요 없다. 실력으로 날 증명할 거다!”
“근데 넌 실력도….”
“그만해 인마.”
“어쨌든 던전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냐. 에잉. 그래. 한 번 해보자.”
오크 아저씨들은 준비를 끝내고 던전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포기한 던전을 공략하려고 하고 있다는 뿌듯함!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솔직히 좀 신나긴 해. 그렇지?”
“나도 그렇다.”
<최강지존무쌍> 길드 생방송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몰리고 있었다.
이 던전을 공략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시청자 숫자는 몇 배로 뛸 게 분명.
“그런데 길마님. 계속 방송 틀고 계실 겁니까? 다른 놈들한테 힌트 될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꺼야지.”
-안 돼!!!
-끄지 마!! 제발!
-원하는 게 돈이야?!
보고 있던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애원을 하며 끄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김태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 필요 없어 이것들아!
-그러면 왜 지금까지 켜놓은 건데!
“그야 조회수는 올릴 수 있을 때는 올리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길드 홍보도 되고.”
김태산도 판온 적응 예전에 끝낸 지 오래였다.
길드 홍보를 위해 사람들 갖고 노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청자 여러분. 우리 길드 잘 부탁합니다. 길드 들어오면 여기 던전 정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르고….”
[방송이 종료됩니다.]
* * *
“…아버님께서 상당히 유쾌하신 분이십니다!”
류태수가 겨우 입을 뗐다.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버지가 조회수를 올리려고 저런 식으로 어그로 끄는 걸 보니까 기분이 복잡해서….”
“…….”
“…….”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태현 님. 저도 저렇게 어그로 끄는데요.”
“앗. 이다비 넌 뭐 괜찮은데. 우리 아버지가 저러는 거 보니까 좀 기분이 복잡하다는 거지.”
김태산이 들었으면 자식놈 헛키웠다는 소리 절로 나왔을 소리였지만, 아쉽게도 여기에는 김태산이 없었다.
“흠… 부탁드려봐야겠다. 영상 달라고.”
“받을 수 있겠어?”
이세연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 던전 공략 영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난이도 높은 던전 공략 영상은 어마어마하게 가치가 있는 것.
그렇게 쉽게 줄까?
‘…아니. 가족이잖아…?’
‘가족 일인데…?’
류태수와 류다영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가족인데 안 줄 수 있다는 저 전제는 대체 뭐지?
“하긴 뭐 안 줄 수도 있긴 하겠군. 일단 물어나 볼게.”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으신가?’
* * *
“물론 줄 수 있지. 아들아.”
“오… 뭘 원하시길래?”
“…내가 그냥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어. 안 해봤는데요. 그래서 뭐가 필요하시죠?”
“별 거 아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된다.”
“?”
“…미로 들어와서 좀 구해다오.”
“!”
태현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던전 들어갔다가 갇혔구나!
전멸하거나, 입구에서 빠르게 돌아 나온 다른 파티들과 달리 오크 아저씨들은 용감무쌍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퇴로가 막혀서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죽기는 싫은 상황.
“그… 그렇군요.”
“웃지 마!”
“안 웃었습니다. 어쨌든 들어가게 되면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봉식이도 기뻐할 거다.”
“봉식이 아저씨는 왜요?”
“아니. 그냥 그렇다고.”
* * *
김태산과 오크 아저씨들도 나름 주목을 받았지만, 태현이 이끄는 원정대는 그 차원이 달랐다.
일단 규모부터가 초월적이었다.
여러 교단에서 나온 성기사들과 사제 군단!
골짜기에서 악명 높은 아키서스 포병대!
거기에 한국대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랭커들까지.
하나하나가 너무 화려해서 뭐가 대단하다고 꼬집기 힘들 정도였다.
-미친 라인업 아니냐?
-나중에 손자가 생기면 오늘 이걸 생중계로 봤다고 말할 거야.
-일단 결혼부터 해야….
위엄 넘치게 몰려오는 원정대의 모습에, 전 세계의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참가한 사람 중에 이다비는 파워 워리어 계정으로, 이세연 쪽 길드 랭커들은 자기 계정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모두 다 터지기 직전까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이용자가 너무 많아 방송이…]
[이용자가 너무 많아…]
“우욱. 우우욱.”
재칼은 긴장감으로 헛구역질을 했다.
이런 구성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동네 조기축구회 에이스로 뛰던 사람이 갑자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들과 같이 뛰게 된 꼴 아닌가.
기쁘기보다는 부담감으로 죽을 거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 끼게 된 거지?
-우린 널 응원한다! 네가 왜 끼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인맥이겠지. 케인 친구잖아.
-완전히 거품일 듯.
-말이 너무 심하잖아! 너희 새로 보러 온 놈들이지? 물론 우리도 재칼이 거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직접 말하는 건 실례지!
‘…방송 채팅은 보지 말아야겠다.’
재칼은 시선을 돌렸다.
원래 적당히 모이던 수준의 방송은 지금 사람으로 미어터질 정도였다.
덕분에 리플 중 절반은 재칼 거품 취급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욕이었다.
아주 극소수 사람들이 편들어주고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거품인 건 아는데 욕은 하지 마!’였고….
‘나도 오고 싶지 않았다고!’
“준비됐어?”
“응.”
태현은 이세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한 상태.
이제 해야 할 건 진짜 공략이었다.
‘오랜만에 진짜 던전을 깨는 기분이 드는군.’
판온 1에서도 비슷했다.
아무도 못 깬 던전으로 들어간다는 긴장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보는 사람들이 몇십만 배로 늘어나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좋아. 가자!”
-시작이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근데 김태현 심사위원인데 지가 깨버려도 되냐?
-…그러게??
-그건 알 바 아니고 여기서 한국 선수들 여럿 로그아웃 당했으면 좋겠다.
-너 중국 놈이지?
-응~ 중국 예선 탈락할 거야~ 경우의 수 적중할 거야~~
-중국이 예선 탈락한다는 게 말이 되냐? 헛소리하지 마라.
-한국한테 2:0으로 지면 예선 탈락 가능하죠?
-제발 예선 탈락. 제발 예선 탈락.
-나 모로코 사람인데 중국 탈락 응원한다.
-나 룩셈부르크 사람인데 중국 탈락 응원한다.
-아, 월드컵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해! 이제 던전 들어가는데!
[방송이 종료됩니다.]
-?
-?????????
-뭐야 미친?! 왜 종료돼?! 사람 많아서 터졌나!?
-아니. 끈 거 같은데? 다른 방송도 다 껐어! 자기들끼리 껐나 봐!
가끔 던전 공략을 비공개로 하는 공략 파티도 있었다.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정보를 독점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영상은 나중에 공개해서 더 주목을 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관심이 식을 수도 있고 해서 보통은 생방송으로 중계를 하는 게 학계의 정설인데….
자신감 빼면 시체인 태현과 이세연은 그냥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생방송 해봤자 우리가 뭐 인지도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러게. 어차피 우리 공략하는 건 세상 사람들 다 알 텐데.
-비공개한 다음 나중에 기회 봐서 공개하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그리고 다른 랭커들한테 굳이 정보 줄 필요 없고.
…물론 보고 있던 사람들은 환장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