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47화
“이제 와서 말해봤자 늦었습니다! 그냥 제물로 씁시다!”
“제물을 하나 바치고 들어갑시다! 제물 없으면 솔직히 힘듭니다!”
“김태현 씨! 왜 제물을 안 바칩니까? 한 명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
“…….”
[카르바노그가 저 새끼들 저거 어디 무슨 인신공양 교단 소속 아니냐고 경악해합니다.]
카르바노그가 경악스러워할 정도의 사악함.
태현은 깨달았다.
아…!
권능, <아키서스의 제물>은 이런 놈들한테 쓰라고 있었던 거였구나!
멀쩡하던 놈들과 지낼 때는 ‘아키서스의 제물 쓰기가 애매하군. 쓸 수가 없겠는데’ 하고 넘어갔었지만, 약탈자 플레이어들과 같이 지내자 확 느낄 수 있었다.
이 약탈자 플레이어들과 <아키서스의 제물>은 엄청나게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얼핏 들으면 희생정신과 약탈자는 안 어울려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만 아니면 돼!
…바로 이 정신이 약탈자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여기 모여 있는 놈들 중에 한 명 뽑아서 레이드를 날로 먹을 수 있다면, 약탈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찬성할 수 있었다.
사고방식 자체가 일반 플레이어와는 다른 이들!
“제물! 제물! 제물!”
“우리는 제물을 원한다! 우리는 제물을 원한다!”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결국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제물을 한 명 바치도록 하지.”
“와아아아아아아아!”
“신난다! 제물이다!”
* * *
-…….
-…이게 대체 뭔 플레이?
약탈자들을 부러워하던 시청자들은 어느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광기의 현장이지?
-김태현이 약탈자한테 뭐 약 먹였냐?
-눈깔 돌아가서 싸우는 거 보니까 진짜 뭐 약 먹은 거 같기도 한데….
-내가 물어보니까 갑옷에 부작용 있다더라.
-그런 걸 입혔다고!? 비전 암살자 진짜 무섭네.
-약탈자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좋은 갑옷을 입혀?
-그건 맞는 말이야. 아니, 그런데 대체 왜 제물을 바치자고 하는 건데??
-몰라… 미쳤나 봐….
약탈자들이 손수 나서서 제물 한 명 바치고 시작하자는 건 아무리 봐도 광기였다.
놀라운 건 그렇게 하고 나서 엄청난 기세로 레이드를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힐러도 탱커도 부족한 극단적인 조합의 파티였고, 싸우는 괴수 몬스터도 상당히 강력했는데….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밀어붙였다.
“앞으로 들어가! HP 내려가려면 멀었다! 놈의 다리를 노려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가장 늦게 가는 놈은 다음 제물이다!”
“예!”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채찍과 당근이 아닌 채찍과 채찍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태현이었지만,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완벽하게 먹혀 들어갔다.
일사불란하게 사방에서 딜을 쑤셔 넣는 약탈자들!
각종 버프뿐만 아니라 태현의 전술 버프까지 들어가자 괴수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분명 이곳저곳에서 굴러들어온 떨거지들 집합이었는데, 어느새 대형 길드에서 보낸 최정예 파티 같은 아우라를 풍겨냈다.
-쟤네 같은 길드 아니지??
-그냥 여기서 모인 약탈자 놈들이라니까. 여기 있는 길드는 그나마 루돌프임.
-아. 그 손발 안 맞는 길드? 자기네들끼리 싸웠다가 게시판 올라간 길드?
-안 싸웠거든?? 오해다 그건!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보면 정말 손발 잘 맞는 길드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약탈자 떨거지들을 데리고 저런 레이드를 펼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 * *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마지막 괴수 둥지를 토벌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
약탈자들의 숫자는 절반 이상 줄어 있었지만, 퀘스트가 끝난 뒤에는 찬양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평을 말할 놈들은 다 죽었으니까!
…물론 그것 말고도 퀘스트가 결국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도 있었다.
퀘스트 할 때는 ‘아 김태현 XX끼 죽어라’ 하며 욕을 하더라도, 퀘스트가 끝나면 ‘생각해 보니 우린 그때 정말 뜨거웠어’ 같이 훈훈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김태현이다. 이번 레이드에서 그걸 확실히 느꼈어.”
“네가 없었다면 이번 레이드는 불가능했을 거다.”
“몇몇 불평하는 놈들은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죽은 놈들이니까!”
약탈자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비전 암살자로 전직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별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물론 태현도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애초에 약탈자로 뛴다는 건 그 정도는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템을 얻습니다.]
사악한 괴수 조종의 마검:
내구력 5/5, 공격력 1.
스킬 ‘둥지의 괴수 소환’, ‘새로운 둥지 생성.’
괴수 둥지를 만들고 괴수들을 조종할 수 있도록 꽂혀 있던 사악한 힘의 마검이다. 어떤 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거무튀튀한 마검의 능력은 심플하지만 강력했다.
새 괴수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능력!
‘아니… 아니.’
[큭큭… 힘을 받아들이라고 카르바노그가…]
‘수상쩍은 분위기 만들지 마라.’
카르바노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태현은 검을 썼을 것이다.
솔직히 괴수 둥지 만드는 능력은 탐이 났던 것이다.
‘안 그래도 골짜기에 동물원 있는데 거기에다가 설치해놓을까?’
[그런데 어느 교단의 짓인지는 안 찾냐고 카르바노그가 묻습니다.]
‘뭐 궁금하긴 한데 이제 와서 찾아봤자 딱히….’
태현은 매우 현실주의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물론 이 검의 주인을 찾아서 그 교단을 따끔하게 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냥 조용히 이 검을 태현이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 * *
[골짜기에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들이 찾아옵니다!]
[이 충성심 높은 암살자들은 교단의 뛰어난 인재들에게 아낌없이 스킬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진짜?!?!”
“아니. 속지 마. 함정이다.”
골짜기 플레이어들은 호화로운 메시지창에 의심했다.
교단이 뭔가 퍼주려고 할 때는 의심부터 해야 한다!
“영상 봤는데 비전 암살자 좋아 보이던데? 엄청 잘 싸웠어.”
“수상하잖아! 아키서스 교단이 저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니!”
아키서스 교단이 그 세력을 많이 확장하고, 교단 관련 직업들도 많이 늘어난 지금, 전직한 플레이어들도 숫자가 제법 됐다.
하지만 아키서스 교단의 길은 만만치 않았다.
-아키서스 성기사로 전직했어! NPC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정말 좋아 보이더라고! 일단 전직만 하면 스킬들을 아낌없이 가르쳐 준다고….
-너 속은 거야 멍청아!
-!?
그랬다.
아키서스 교단 관련 직업들이 나쁜 직업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련 NPC들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됐다!
<아키서스 성기사 교관 NPC가 전직하면 스킬 다 가르쳐준다고 약속해서 전직했는데, 교단 공적치 포인트 쌓아오기 전까지는 안 가르쳐준다고 우겨요 흑흑. 어떡하죠?>
<아키서스 사제분들 중에서 녹색 보옥 퀘스트 깬 분 계세요? 연계 퀘스트 다섯 개 다 깼는데 NPC가 안 보입니다.>
└그거 NPC가 자기 갑옷 주기 싫어서 신전 뒤에 숨어 있습니다. 가서 받으셔야 해요.
…교단의 직업들은 좋았지만 그 NPC들과 상대할 때는 속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런데 비전 암살자 NPC들이 저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준다고?
…이건 함정이다!
“그래도 난 가볼래! 암살자 전직하고 싶었다고!”
“안 돼! 갔다가는 온갖 불합리한 퀘스트를 깨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언제나 겁없는 플레이어들은 나오는 법.
비전 암살자들을 찾아가고 전직한 플레이어들은 놀랐다.
어라?
엄청 친절하고 잘 가르쳐주잖아?
거짓말도 안 하고….
-여러분. 비전 암살자들은 정말 친절해요. 거짓말도 안 하고요.
-이 자식 지금 혼자 죽기 싫어서 속이는 거다!!
-맞아!!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아니 진짠데….
* * *
[검을 꽂아 넣었습니다.]
[괴수 둥지가 생겨납니다.]
[괴수 둥지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괴수 둥지는 검을 사용한 사람의 영향을…]
[……]
영지 동물원에 작업을 끝낸 태현은 골짜기를 둘러보았다.
새삼스럽게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볼 때마다 변화하는 곳이 바로 골짜기였던 것이다.
-교황 성하! 여기, 저희 비전 암살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를 모시고 왔습니다.
“앗. 왔나?”
골짜기로 따라온 비전 암살자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암살자들의 리더가 있다고 해서 태현은 꽤 많이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여기 암살자들의 리더가 있다고?
-예!
-그런데 왜 볼 수 없는 거지?
-사정이 있어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준비를 해놓을 테니 깨어나는 대로 교황님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 알겠다.
태현이 마을에서 괴수 둥지 토벌하는 동안 얼굴 한 번 내밀지 않았다는 게 좀 찜찜하긴 했지만, 태현은 비전 암살자들을 믿었다.
선량해서 개미 새끼 하나 밟아 죽이지 못할 이들 아닌가.
[???]
“자. 어디 있지?”
-앞에 계십니다만?
“…?”
-찍찍.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찍찍대는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통통하게 살찐 검은 쥐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전 암살자 우두머리, 로샤크가 당신에게 공손하게 인사합니다!]
‘…카르바노그. 내가 뭔가 이상한 곳에 날아온 것 같은데.’
[카르바노그 자신이 보기에도 쥐 맞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쥐 맞지?’
놀랍게도 비전 암살자 마을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건 검은 쥐였던 것이다.
“어떤 이유로…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이유야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충성심과 능력이지요.
“…….”
충성심이야 그렇다 쳐도 능력까지??
쥐가 세봤자 쥐 아닌가…?
“로샤크 님께서도 백 년 넘게 사신 탓에 주무시는 기간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교황님께서 명령하신다면 무엇이든지 기쁘게 나서서 싸우실 것입니다.”
-찍찍!
“…그, 그렇군. 충성에 고맙다.”
로샤크는 통통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태현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니….
쟤 대체 뭐하는 놈이야?
* * *
갈락파드와 펠마스는 서로를 탓하며 싸우고 있었다.
-네놈의 충성심이 부족해서다!
-내 책임으로 돌리면 다냐?! 매번 힘으로 협박하지 마라! 이 비겁한 놈!
-오냐. 비겁한 게 무엇인지 보여주마. 여봐라! 펠마스 저놈을….
-으아악! 폭력 반대! 폭력 반대!
기껏 태현이 잡아온 이데르고 교단의 주교 후계자, 페르스메스가 어떤 수작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을 대거 고용해서 협박을 시켰는데도 페르스메스는 ‘크으윽!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하면서 버텨냈다.
-찍찍찍.
-?
-뭐야?
둘은 갑자기 들리는 쥐 소리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펠마스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갈락파드는 마법으로 알아들었다.
-뭐? 새로 온 비전 암살자들의 우두머리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지? 갈락파드?
-이런. 귀하신 분을 뵙게 되는군. 나는 하찮은 아키서스의 종, 갈락파드라고 하오.
갈락파드는 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펠마스는 그걸 보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뭐… 뭐하는 거냐!?
-교단의 비전 암살자라면 대대로 존중받는 이들이었지 않나? 당연히 예를 갖추고 공손히 대해야지.
-아니… 그런데….
쥐잖아…!
펠마스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갈락파드 저놈 지나치게 편견이 없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