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45화
“교황이 맞다.”
-오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께서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암살자들은 교황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런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고립되어 있는 은둔 마을에 교황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었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키서스 교단은 여전히 대륙을 호령하고 있겠지요?
“…어….”
태현은 암살자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게….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태현은 아무 잘못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일들이 있었지.”
-저런… 그래도 지금 교황 성하께서 고생하신 덕분에 교단이 다시 부활했다니 실로 다행입니다!
암살자는 매우 기뻐하며 태현의 업적을 칭찬했다.
아키서스 교단 NPC라고는 볼 수 없는 선량하고 인자한 모습에 태현은 감동을 받았다.
이거지!
이게 교단의 정이지!
서로 잘한 일을 칭찬하면서 응원해 주는 게 바로 선량한 교단인들의 모범 아니겠는가!
[카르바노그가 여기 마을은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탓에 아키서스 교단의 전통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조용히 하도록.’
태현은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혹시 교단에 돌아와서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의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마을에 있는 암살자 몇 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키서스 님을 믿는 모험가들에게 비전 암살의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가 직업에 추가됩니다!]
[앞으로 플레이어들이 교단에서 전직할 수 있…]
[아키서스 교단에 암살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암살자 NPC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
[……]
“크흡…!”
-교황 성하. 설마 우시는 겁니까?
“안 울었다. 눈에 먼지가 조금 들어갔을 뿐.”
태현은 눈물을 참아야 했다.
제안 한 번 했는데 이렇게 바로 도와주겠다고 성심성의껏 나설 줄이야.
원래 아키서스 교단의 다른 NPC였다면 ‘하! 당신이 교황이라고? 난 인정하지 않겠소! 단검 줄 테니 저 용의 골짜기에 가서 레드 드래곤 모가지를 따서 세 개로 만들어 오시오!’ 같은 퀘스트를 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들을 만나서 정말 기쁘군.”
-영… 영광입니다. 허허.
“흠. 그런데 마을에 교단의 암살자들이 여럿 있다니. 신기하군. 여기에 은퇴한 비전 암살자가 와서 가르친 건가?”
-은퇴라니요?
“은퇴하지 않았나? 이 마을에 교단의 비전 암살자가 찾아와서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교황 성하. 교단의 비전 암살자가 그런 나약한 일을 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지? 왜 이 마을에 온 거지?”
-저희 마을은 원래 여러 암살자들이 모여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사악한 독사의 무리들이 그렇게 모여 지내는 것을 보고 분노한 교단의 비전 암살자가 단죄하기 위해 찾아간 겁니다.
“…뭐?”
[카르바노그가 경악합니다!]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홀몸으로 들어온 교단의 비전 암살자는 여러 암살자 집단을 싸우게 만들어 교묘하게 승리를 쟁취했다고 하셨지요.
혼자 들어온 교단의 비전 암살자는 온갖 음모와 계략을 펼쳐 암살자들을 쓰러뜨렸다.
그 결과 마을에 남아 있는 암살자는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아키서스 교단의 비전 암살자!
그 이후 이 마을은 아키서스 교단의 비전 암살자들이 대대로 육성되어 나오는 마을이 된 것이다.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건 뭔 미친….
“그… 그렇군. 그래도 뭐 악을 단죄했으니까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요. 사악한 암살자 놈들의 뿌리를 뽑고 신성한 마을로 바꿨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무리 인자하고 충성스러워도 아키서스 교단은 아키서스 교단이었다.
태현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
마을 내려가는 길에 괴수 둥지 있는 거, 이 자식들이 키우고 있는 거 아니야?
“이 근처에 괴수 둥지가 여럿 있는 거 알고 있었나?”
-예. 당연히 알고 있지요.
[카르바노그가 그럴 줄 알았다고 한탄을 합니다!]
‘제기랄. 진짜 아키서스 교단의 괴수였어?’
“왜 기르고 있었던 거지?”
-예? 저희가 그런 사악한 악의 무리들을 왜 기릅니까? 저희가 기른 게 아닙니다!
암살자들은 깜짝 놀라서 부정했다.
‘?’
“그러면 누가 기른 거지?”
-저희 마을은 이 지하로 한참 내려가야 나오는 곳입니다. 저희가 여기 오지 않는 사이 어느 사악한 무리들이 와서 괴수 둥지를 꾸미고 가버렸습니다.
“…!”
놀랍게도 저 괴수 둥지를 꾸며 놓은 건 아키서스 교단이 아니었다.
[카르바노그가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멋쩍어합니다.]
‘늦었다.’
-괴수들이 보통 강력한 게 아닌 데다가, 어차피 괴수들이 깨어나더라도 저희 마을은 잘 숨겨져 있어 놈들이 발견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굳이 토벌하지 않고 있었죠.
“밖으로 나가면?”
-밖으로 나가면 밖의 놈들이 신경 써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아키서스 교단 소속이 맞구나!”
* * *
태현과 약탈자들은 암살자의 뒤를 따라 숨겨진 통로로 이동했다.
넓지만 어두컴컴한 지하 동굴에는 온갖 비밀 통로들이 즐비했다.
[비전 암살자들의 길이 새로 생겨납니다!]
절벽을 따라 쭉 내려가다가, 반투명한 허공다리 위를 건너, 구불구불한 좁은 통로를 지나고….
확실히 암살자들의 마을은 깊숙한 곳에 있었다. <신의 예지> 스킬을 가진 태현도 쉽게 찾기 힘들 정도로.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그 뒤를 따르며 수군거렸다.
“아까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라고 했지?”
“맞아. 나도 들었어.”
“전직 가능하다고….”
“우리도 여기서 전직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나는 내 직업이 좋아서 굳이…?”
“커험. 이제 와서 뭐하러 직업을 바꾸겠어? 스스로한테 자신감이 없는 놈이나 바꾸는 거지.”
“맞아. 맞아.”
약탈자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별로 내키지 않는 척을 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 똑같았다.
‘내가 먼저 한다.’
‘이 새끼 말하는 꼴 보니까 가장 먼저 전직하려고 할 것 같은데….’
‘도망치려고 했다고 누명 씌워볼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 보이는 직업 이름!
기본적으로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도적, 암살자 같은 직업들을 매우 선호했다.
재빠르게 치고 빠질 수 있는 직업들!
교단 비전 암살자라니.
최소 희귀, 혹은 영웅 직업도 노려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암살자들의 마을에 직접 들어간다니.
이건 남들이 배우지 못하는 비전 스킬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 아닐까?
-그런데 교황 성하.
“?”
-교황 성하는 당연히 교단의 으뜸이시자 수장이시니 상관없습니다만, 저 뒤에 있는 자들은 아키서스 교단이 아닌 이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렇지.”
-그런 이방인들은 저희 마을에 들어올 때 시험을 받아야 하는데….
“아하. 그렇다면 시험을 하도록. 전통은 존중해야지.”
어차피 태현이 겪는 일 아니었다. 태현은 흔쾌히 허락했다.
암살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지금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시험이지?”
-저희가 죽이려는 걸 잘 피해서 살아남는 시험입니다.
“…오….”
[<은둔하는 암살자들의 거처>에 도착했습니다!]
[아키서스 교단 소속이 아닙니다!]
[시련이 시작됩니다!]
“?”
“뭐야?”
아키서스 교단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들한테는 메시지창이 떴다.
시련?
“무슨 시려ㄴ….”
푹! 푹푹푹!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화살 끝에 <황각의 겔>의 독이 묻어 있습니다. 중독 상태에 걸립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집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공격 속도가 느려집니다.]
[……]
[……]
쿵!
“으아아악!”
“김태현! 기습이다! 싸워야 해!”
“어. 나는 아키서스 교단이라 공격 안 한대. 너희들만 한댄다.”
“…….”
“…….”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말이냐 개소리냐?
“그게 뭔 컥!”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가 은신을 풀고 암습을 가합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합…]
‘와. 잘 싸우는데?’
태현은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들의 움직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교단에 이런 인재들도 있었구나!
‘연락이 끊긴 오지에 아키서스 교단 인재들이 있는 것 아닐까?’
[카르바노그가 손 한 번 잡았다고 후손 얼굴 생각하는 사람처럼 앞서나가지 말라고 지적합니다.]
‘…너무 신랄하잖아.’
“난 먼저 들어가도 되나?”
“앗. 저도 아키서스 교단 소속인데 들어가도 됩니까?”
-예. 들어오시죠. 같은 신앙의 형제끼리 무슨 시험이 필요하겠습니까?
태현과 아키서스 교단을 믿고 있는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바로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절규가 들려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야 이 의리 없는 새끼들아!!”
* * *
암살자의 마을은 말이 마을이었지, 작은 성 같은 형태였다.
밑에는 해자가 깔려 있고 들어가려면 그 위로 놓인 도개교 위를 지나야 하고….
성벽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올라오는 놈들을 막기 위해 살벌한 함정들이 장치되어 있었다.
[기계공학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성벽에 설치된…]
[기계공학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성벽에 설치된…]
-마을의 젊은이들은 여기서 뛰어난 암살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거듭하지요. 물론 아키서스 님에 대한 기도도 거르지 않는답니다.
젊은 인재들이 아키서스에게 기도도 열심히 하고 훈련도 열심히 한다니.
사실 여기가 아키서스의 천국 아닐까?
지하에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아키서스의 천국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
[카르바노그가 제발 정신 차리라고 말합니다!]
“같이 나가서 날 도와줄 수 있겠나?”
-영, 영광입니다만… 교단에 뛰어난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저희 같은 암살자들이 도움이 될까요?
암살자 NPC는 매우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교단에는 쟁쟁한 NPC들이 여럿이었던 것이다.
악마 공작의 직속 악마 여덟 마리를 붙잡아서 마차에 묶은 다음 팔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주교, 혼자 들어가 성 하나를 점령하고 있는 사악한 타락기사단을 전멸시키고 나온 성기사, 일곱 날 일곱 밤을 산봉우리 위에서 버티고 있다가 화살 한 방에 드래곤의 숨통을 끊은 궁수….
그런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 여기서 훈련하고 있는 암살자들은 아직 갈 길이 먼 애송이들일 뿐이었다.
“…아니 그런 놈들이 있었어??”
태현은 당황했다.
난 처음 듣는데?
“우리 교단은 꼭 능력 있는 놈만 받지 않고 충성심만 있으면 다 받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나와줬으면 좋겠군.”
[카르바노그가 사실 충성심 없는 놈들도 받아주고 있지 않냐고…]
-그렇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교단에 비전 암살자 NPC들이 대거 추가됩니다!]
[새로운 퀘스트들이…]
[암살 계열 퀘스트 명령이 가능해집니다.]
태현은 비전 암살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흉흉한 시대가 아니라서, 교단 NPC들도 다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그러면 교황 성하께서도 드래곤을 잡은 적이 없으십니까?
“드래곤을 잡은 적은 있지.”
-…악마 공작은…?
“악마 공작도 잡기는 했어.”
-혹시 강력한 악마들을 붙잡아서 부려먹기도 하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잠깐만.”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들이 긴장합니다!]
[암살자들 사이에 새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그들은 위대한 업적을 세우기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드래곤이나 악마 공작을 꼭 잡을 필요는 없다니까!”
태현이 아무리 말해봤자 설득력이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