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39화
재칼은 소름이 돋았다.
어디서 저런 무시무시한 놈이 나온 걸까?
‘암살자 랭커 중에 저런 놈이 있었나? 악명 스탯이 살벌한 거 보니 한두 놈 죽인 게 아닌 거 같은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신진 랭커가 등장하는 판온이었지만,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암살자 랭커들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앞에 있는 놈 같은 랭커는 모르겠다!
‘길드에서 키운 비밀병기인가?!’
재칼이 망상을 하고 있는 동안 태현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케인과 같은 길드 출신인 놈이 왜 저렇게 잘 싸우지?’
이건 나름 진지한 고민이었다.
케인의 옛 길드, 레드존 길드가 어떤 길드인지는 태현도 잘 알았다.
태현이 직접 개박살을 내지 않았던가.
거기 소속 길드원들은 다들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태현의 카운터를 피하고 옆으로 빠져나올 정도의 실력이라니.
그런 놈이 있었나?
-케인. 케인.
-으악! 악! 으아아악! 감독님! 악!
-…케인.
-어? 어? 으악! 김태현 네가 말 걸어서 한 대 더 맞았잖아!
케인을 귓속말로 부르자 케인이 요란하게 대답했다.
던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현과 사베트가 케인을 위해 준비한 훈련은 바로 혼자서 던전 돌기!
태현이 생각하기에, 혼자서 던전 도는 것만큼 실력 키우기 좋은 훈련도 없었던 것이다.
혼자서 싸우니까 HP 관리 능력도 늘고, 어그로 끌고 딜 넣는 능력도 늘고, 각종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능력도 늘고….
그러다 죽으면?
안 죽게 잘 해야지!
-몬스터 상대하면서 대답해라.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군.
-미친놈아으악악!
-너 예전 길드에 재칼이란 놈 있었냐? 대충 이렇게 생긴 놈인데.
태현은 재칼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케인은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놈 처음 들어어으악! 감독님! 구해줘요! 지켜보지만 말고 어그로라도 좀 끌어주세요! 아니! 진짜! 진짜! 죽게 생겼다고! 진짜로!
-모르는 놈이라 이거지?
-그래악!
-그래. 열심히 해라.
-야! 야!
태현은 귓속말을 끊고 재칼을 쳐다보았다.
태현이 빤히 쳐다보자 재칼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뭐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길드 지원을 부르려는 건가?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가 케인하고 아는 사이인데, 케인한테 물어보니까 너 같은 플레이어는 모른다던데? 너 누구냐?”
“…!”
재칼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 * *
“무, 무슨 소리야. 난 케인하고 정말 친했다. 지금은 서로의 길이 달라지긴 했지만… 진짜다. 사진도 있다고.”
어떻게든 우겼지만 재칼은 자기 말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케인을 모르는 사이면 모를까 아는 사이라면 이런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가짜군.”
“타협, 타협하자! 뭘 원하냐? 뭘 내놓으면 비밀을 지켜줄 거냐?”
“어?”
태현은 의아해했다.
딱히 뭘 노리고 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상대가 먼저 악명 스탯 높다고 시비 걸어온 것에 가까웠는데….
“딱히 까발리고 다닐 생각은 없는데. 궁금하긴 하군. 뭔 목적으로 그러고 다니는 거지?”
“뭔 목적이냐니. 당연히 명성 때문이지.”
“…뭔성?”
태현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재칼은 진지했다.
“거친 놈들 사이에서 안 밀리려면 허세가 필요하다고.”
약탈자 플레이어들끼리 모이면 보통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대단한지로 다투곤 했다.
이럴 때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남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할 것들이 필요했다.
“어떤 멍청한 놈들은 자기가 김태현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거나 싸웠던 사이라고 하는데 난 그러지 않았지. 너무 유명해서 들키기 쉽거든.”
“그, 그렇군.”
태현은 너무 유명해서 거짓말이 들키기 쉬웠다.
재칼은 그 점을 잘 알았기에 살짝 낮춰서 케인의 이름을 팔았다.
태현과 싸워본 적 있다고 하면 거짓말 같았지만, 케인의 길드에 있었다고 하면 좀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하긴 그런 미묘한 선을 지키는 게 좋은 거짓말이지.”
“잘 아는군! 그래. 그래서 그런 거지.”
“근데 효과가 있었나?”
태현은 궁금했다.
별로 효과가 없었을 것 같은데….
“효과가 엄청 좋으니까 쓰고 있지.”
“뭐? 진짜??”
태현은 깜짝 놀랐다.
진짜 효과가 있다고?
“그래. 시비가 붙었을 때 이름만으로도 멈출 수 있고, 다른 길드와 부딪혔을 때도 케인과 아는 사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뒷걸음질친다고. 이게 다 케인이 가진 힘이지.”
“와….”
이 자리에 케인이 있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재칼은 케인에 대한 존경심과 미안함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케인하고 아는 사이라고 했나? 미안하게 됐어. 내가 이름을 이용하고 다닐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텐데.”
“걔는 좋아할걸.”
“뭐라고 했나?”
“아니. 아무것도.”
둘이 싸우지 않고 떠들기만 하자 거리를 두고 있던 다른 파티원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재칼?”
“오해가 풀렸다. 알고 보니 아는 사이였어!”
재칼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외쳤다.
그러자 파티원이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저놈도 케인이 있던 길드 출신이었나?!”
“…….”
태현은 정색했다.
지금 누구를 어디 누추한 곳에….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허어억…!”
“대단한 놈이었군!”
“역시, 실력이 보통이 아닌 이유가 있었네.”
파티원들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실력이 대단하더라!
* * *
“이 던전에 가려고 하는데.”
태현은 기왕 재칼의 파티와 알게 된 김에 써먹으려고 했다.
이 마을에 꽤 먼저 와 있었으니 지리에 대해 익숙하리라.
“아, <태양이 지는 곳의 던전>말인가? 여기는 지금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지?”
“어떤 미친놈들이 뭘 건드렸는지 던전 안이 이상하게 변했거든.”
마을 근처의 던전, <태양이 지는 곳의 던전>은 이미 몇 차례 클리어가 되어 있는 평범한 던전이었다.
새로 파티 맺은 플레이어들이 합을 맞춰보기 위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중급 난이도의 던전.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던전의 지형이 기괴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지하로부터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통로들이 무너져 내리고 길이 막히고….
‘해머맨인가?’
의심가는 건 해머맨 파티밖에 없었다.
해머맨 파티가 이 던전 지하에 내려가서 마법 함정을 해체하고 아키서스 암살자의 갑옷을 갖고 나오지 않았던가!
‘암살자의 흔적을 찾으려면 내려가긴 해야겠군.’
“어? 어딜 가나? 들어가기 힘들다니까?”
태현이 던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재칼이 당황했다.
“힘들다고 포기할 거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와… 개멋있군.”
“역시 케인과 같은 길드였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렇지 않냐?”
태현의 말에 파티원들은 수군거렸다.
역시 명문 길드 출신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을 해도 멘탈에 흠집 하나 가지 않는 태현이었지만, 이들의 말은 태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이봐. 우리가 도와줄게.”
“뭐? 왜?”
“신세진 것도 있고 그래서….”
재칼은 우물쭈물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케인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어… 그, 그래.”
아무래도 재칼은 마음의 빚을 도와주는 걸로 풀려는 모양이었다.
태현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긴 한데.’
“역시 케인과 같은 길드 나온 사람들답게 의리도 끈끈한 거 봐라.”
“저게 의리지.”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 레드존 길드 어떻게 망했는지 모르지?
* * *
“이 던전에 나올 거 다 나오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해머맨 패거리 놈들이 여기 들락날락거리기 전에는 말이다.”
<루돌프> 길드.
에스파 왕국의 길드 중 하나로, 나름 대형 길드였지만 평판이 안 좋은 길드였다.
영지가 없긴 했지만 그건 판온의 수많은 대형 길드들이 그랬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고….
바로 길드의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질 나쁜 플레이어들이 많을수록 길드의 평판은 깎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수준이라면 약탈자 계열 직업보다는 멀쩡한 직업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
사실 꼴리는 대로 사는 약탈자 플레이어는 겉으로는 편해 보여도, 속으로는 의외로 살기 팍팍했다.
이미지 안 좋아서 광고도 못 받지, 마을이나 퀘스트도 제한되지, 방송하면 욕 많이 달리지….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약탈자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자존심!
“해머맨 놈들이 대박을 치고 나간 다음에 던전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게 뭐겠냐?”
“!”
“마을 노인한테 부탁해서 조사 퀘스트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 던전 제일 밑의 지하에 다른 던전의 입구가 있다더라.”
히든 던전.
던전의 끝에 새로운 던전의 입구가 있는 거라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해머맨은 대장장이 파티라서 새로운 던전 입구는 발견 못한 게 분명했다.
“거기 먼저 들어가는 거다.”
“방송 켜도 됩니까?”
새로운 던전이라면 제법 시청자들이 모일 것이다.
그러나 파티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 방송 켰다가 욕 절반에 도배 절반 달려서 망신만 당했잖냐. 저저번에는 우리 위치 들켜서 우리 노리는 놈들이 붙었고.”
“그, 그래도 우리 길드 팬도 꽤 많습니다.”
“에이… 그래. 켜라.”
파티장도 결국 허락했다.
길드원들이 왜 방송을 키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주변이 그리 사람 많은 곳이 아니었는데 요즘 부쩍 늘었어.”
“오스턴 왕국이 지금 개판나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아니, 미친놈들. 전쟁을 얼마나 살벌하게 했길래 산적들이 쫓겨나는 거야?”
“쉿. 소리 줄이고 스킬 준비해라. 누가 우리 뒤쫓으면 바로 알아내야 하니까.”
“오랜만이다! 보고 있는 놈들아! 우리 <루돌프> 길드가….”
“방송멘트는 이따가 하고 준비부터 해!”
“옙.”
<루돌프> 길드를 노리는 건 다른 길드나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었다.
근처의 약탈자 플레이어들!
아이러니하게도 현상금 사냥꾼보다 약탈자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죽이는 게 더 많았다.
서로 죽여도 페널티 없고, 보상은 더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부쩍 많아진 지금, <루돌프> 길드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파티장님. 재칼입니다!”
“뭐? 재칼 그놈이 왜?”
<루돌프> 길드원 중 몇몇이 재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려 케인과 같은 길드 출신이었다는 게 위협적이었다.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위험한 놈!
“저놈도 던전 들어가려는 것 같은데요…?”
“이런 젠장!! 역시 이런 퀘스트는 꼭 경쟁이 붙는다니까!”
좋은 퀘스트는 언제나 경쟁이 붙었다. 파티장은 이를 갈았다.
역시 케인과 같은 길드 출신답게 냄새를 맡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 한번 경쟁해 보자고. 우리가 먼저 찾는다. 놈이 만약 방해하거나 뺏으려고 한다면 가차 없이 밟아버려!”
“하, 하지만 케인과 같은 길드 출신인데….”
“그런다고 안 죽냐? 쫄지 마! HP 0이 되면 누구나 죽어!”
<루돌프> 길드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이 시청자 숫자가 평소보다 몇 배로 뛰고 있었다.
-야! 루돌프 길드가 케인 길드 소속이었던 놈이랑 싸운대!
-진짜?!
사람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대화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