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28화
카르바노그도 말리지 않았다.
복잡하고 조그만 기계장치 꼼지락거리면서 매달리는 것보다는 부수는 게 속 시원했던 것이다.
‘으음. 그런데….’
태현은 고민에 잠겼다.
휘두르는 건 좋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손해였던 것이다.
기계공학 스킬을 올릴 기회를 날려 버리는 짓!
‘그래. 다시 해보자.’
[…….]
지겨워진 카르바노그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오늘 안에 끝나기나 할까?
* * *
“정말 특종 중의 특종이란 말입니다! 선배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창욱이 말이 맞습니다. …잠깐만. 너 왜 내 명예를 걸어 이 자식아?”
기자, 송대승은 조창욱을 보며 황당해했다.
많고 많은 물건들 중에 왜 하필 그의 명예를 건단 말인가.
“진짜라니까요! 유성 그룹의 2인자가….”
어느새 부풀려진 담당자의 위치. 송대승은 후배를 진정시킨 뒤 말했다.
“2인자가 아니라 비서실 쪽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유성 그룹에서 비서실이 얼마나 핵심 위치인지.”
유성 그룹 내에서 두뇌의 역할을 맡고 있는 비서실은 온갖 인재들이 모이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회장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그 파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런 사람이 김태현하고 만났다고?”
“그냥 만난 게 아닙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이런저런 종이를 주고받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냥 서로 의사 타진만 한 게 아니라 계약이 거의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
연예부 부장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창욱이야 그렇다 쳐도 송대승은 허언을 할 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태현이 열애설이나 찾아오길 원했는데 생각 복잡하게시리….’
한 1% 확률 정도로 생각하고, 김태현한테서 뭐라도 뜯어오라고 보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특종을 물어왔다.
김태현이 유성 게임단으로 간다?
아니, 김태현 성격에 아무리 봐도 그냥 갈 거 같지는 않았다.
‘김태현이 없으면 팀 KL은 솔직히 의미가 없다. 바로 해체될 거야.’
선수 한 명 없다고 게임단이 해체되는 게 말이 되냐고 할 수 있었지만, 팀 KL은 그게 말이 됐다.
태현이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고 키운 팀이었으니까.
자본, 숙소, 광고, 비용 등 전부 다 태현이 맨몸으로 뛰어서 만든 셈 아닌가.
가끔 판온 관련 방송에서 팀 KL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걸 혼자 만들었다고요?? 아무 기업 투자도 없이??
-대체 왜 그런 짓을? 김태현 선수는 그때도 스카우트 받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팀원들과 같이하기 위해서라고요? 아니, 그런데 케인 선수는 집안일도 안 한 겁니까?
-그건 농담이겠죠 물론.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만 나오면 놀란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가 황당무계하다는 뜻이었다.
일개 선수가 만들다니!
‘그렇다면 정말 인수??’
유성 게임단이 팀 KL을 인수하면 한국에 정말 독보적인 팀 하나가 생기는 셈이었다.
명문 팀 수준을 넘어선 초 명문 팀!
“아, 부장님! 쓰기 싫으시면 제가 쓰겠습니다. 제 이름으로!”
“저 멍청한 놈 입 좀 다물게 해라.”
부장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나도 어지간하면 그냥 기사 냈을 거다. 내가 안 그러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게 뭡니까, 부장님?”
“일단 첫 번째로. 상대가 유성 그룹이라서다. 만약 우리가 잘못 건드리면 광고 자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제재가 들어올 거다.”
“…….”
“…….”
두 기자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국내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그룹이 유성 그룹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일개 기자들은 개미 짓밟듯 밟아버릴 수 있었다.
연관 있는 기업들에게 요청을 넣어서 광고를 자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법정 제재나 고소까지.
유성 그룹 법무팀의 명성은 살벌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사람을 죽여도 무죄로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을까.
“그… 그래도 이게 딱히 유성 그룹에 안 좋은 기사는 아니잖습니까.”
“맞습니다. 거기 사장 비자금 터졌다는 기사도 아닌데.”
인수 이야기가 딱히 이미지에 안 좋은 기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긴 해.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어지간해서는 괜찮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더 걱정하는 건 두 번째다. 다른 상대가 김태현이란 말이지.”
“…그게 왜 걱정입니까?”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선수잖냐. 멍청이들아. 잘못 기사 냈다가 실수라도 하거나 김태현이 저격이라도 하면 팬들이 우리 회사에 찾아와서 불 지른다.”
“…에, 에이. 설마… 아니… 물론 그렇긴 한데….”
둘은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태현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고민하던 셋은 적당히 타협을 했다.
“평소 하던 식으로 적당히 말끝을 흐리죠?”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김태현은 유성 그룹 관계자와 접촉해….”
“나쁘지 않군. 이 정도면 욕 안 먹겠지?”
“그럴듯합니다.”
기껏 모아온 증거를 쓰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자도 사람인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김태현, 유성 게임단에게 팀 KL 매각하나? 팀 떠나고 싶다는 의사 밝혀…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아. 또 조회수 장사하네.
-여기 기사는 나도 쓰겠다. 앉아서 인터넷 글 몇 개 검색하고 쓱 하면 완성임.
-김태현이 머리에 총맞지 않고서야 왜 팀 KL을 매각해? 그럴 거면 진작 했지.
-여러분 이런 쓰레기 기사에 관심 주지 맙시다!
…물론 증거 없이 올라간 기사에 대한 반응은 매우 냉정했다.
* * *
“뭐 보고 있어?”
“세상에! 큰일 났어! 팀 KL이 유성 게임단에게 매각되나 봐! 다음 시즌은 어떡하지!?”
캐나다 선수들의 호들갑에 통역이자 안내인 역할을 맡은 직원이 급히 대답했다.
“그 기사는 믿을 필요 없는 기사입니다. 그, 타블로이드 같은 거죠.”
“아하. 그랬었군요.”
그제야 캐나다 선수들은 안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캐나다 국가대표팀 일행은 한국에 와있었다.
“저번 패배는 많이 배웠어.”
“맞아. 졌지만 얻은 것도 맞아.”
얼마 전에 한국대표팀은 일본팀과의 경기에 이어서 캐나다팀과 경기를 치른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한국대표팀의 승리였다.
캐나다팀은 일본팀보다는 선전했지만, 전체적인 전력에서 나는 차이를 뒤집진 못했다.
태현이 밴으로 빠진 2번째 라운드에서 두세 번 정도 몰아붙이긴 했지만 이세연이 멱살을 잡고 캐리한 덕분에 결국 다시 재역전!
그렇게 패배를 했지만 캐나다팀은 그렇게 절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한 수 배우겠다는 각오로 싸웠던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한국이나 중국은….
-저 멤버로 본선 진출 못하면 감독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
-솔직히 나 감독 시켜라!
-한 라운드 이기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다니 김태현 이제 퇴물 아님?
-김태현도 이제 은퇴할 때 됐나 왜 1:3도 못 이김??
-애들아 너희가 지금 미친 소리 하고 있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한국 팬들이 이렇듯 기대가 매우 드높았다.
본선은 당연히 진출해야 하는 기본 같은 것!
중국 팬들도 다르진 않았다.
-비싼 세금 들여가면서 경기장 짓고 훈련소 만들었는데 본선 진출 못하면 나라의 수치 아니냐?
-이기지 못하면 장강에 뛰어들어서 죽어라!
-E스포츠를 국기(國技)로 선정해서 그렇게 지원해 줬는데 본선 진출 못하면 진짜 다 뒤질 줄 알아!
오히려 중국이 더 살벌한 편이었다.
한국이야 딱히 지원도 없고, 해외 게임단에 비교하면 자금도 불리한 상황.
지금도 몇몇 천재 선수들이 나와서 그런 거지 패배해도 변명할 건 많았다.
그에 비해 중국은 정부 단위에서 E스포츠를 중국 대표 국기로 만들겠다고 밀어주고 있는 상황.
각종 투자와 세금이 들어가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변명하기도 힘들다!
그만큼 압박이 심했다.
하지만 이런 두 나라와 달리 캐나다나 일본은 상당히 훈훈했다.
물론 지면 욕먹긴 했지만 애초에 팬들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저 죽음의 조에서 본선을 어떻게 가겠냐.
-졌지만 잘 싸웠다!
하지만 이런 느슨한 분위기와 별개로, 캐나다팀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지금 1패를 한 상태지. 일본 팀을 만나서 1승을 한다고 쳤을 때, 최소한 중국 팀 상대로 1무는 얻어야 해.”
캐나다 팀의 계획은 이랬다.
한국 상대로 1패를 얻었지만, 비교적 약세인 일본 팀을 상대로 1승을 얻고, 중국 팀 상대로 1무를 얻는다.
한국 팀이 중국 팀과 아직 싸우진 않았지만, 만약 이긴다고 치면….
한국 팀은 3승.
중국과 캐나다는 1승 1패 1무.
이럴 경우는 승점으로 겨뤄서 더 높은 팀이 본선에 가게 됐다.
중국 팀은 일본 상대로 1승을 거뒀지만, 무패로 1승을 따낸 게 아니라 한 번 지고 3라운드까지 가서 1승을 따냈다.
이럴 경우 승점에서 불리해졌다.
“한국 팀이 중국 쪽에 지거나, 혹은 무승부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 3세트까지만 가도 계획이 꼬이지만…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우린 한국 팀이 중국 팀을 잡는다는 가정하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맞아.”
지금 목표는 단 하나.
중국 상대로 무승부 이상을 얻어내는 거였다.
1라운드, 2라운드까지 무승부를 가면 예선에서는 무승부로 기록이 났다.
그러기 위해서 캐나다 대표팀이 선택한 건 가르침을 받는 거였다.
그것도 최강의 선수에게!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한국대표팀도 바쁠 텐데, 이렇게 부탁을 받아주실 줄은….”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선수분들이 허락을 해서 가능했던 일이죠.”
직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표팀 선수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나타난 건 태현과 팀 KL 선수들이었다.
* * *
“그런데 캐나다 선수들은 왜 도와주겠다고 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대회 도중인데?”
“그걸 몰라서 묻냐?”
최상윤이 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케인은 1초 정도 고민한 다음 즉답했다.
“…어. 모르겠는데.”
“이제 태현이는 단지 한 명의 선수가 아닌, 판온의 아이콘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있는 거지.”
“뭔 개소리래?”
“잘 들어봐라. 그런 마음이 없다면 중국 쪽에서 주최하는 선발 대회에는 왜 나갔겠냐?”
“돈 많이 줘서 아니야?”
“…물론 돈도 많이 줬겠지만, 여기서 뛰는 선수로서 다른 선수들을 이끌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 거지.”
“아니…?”
케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왜 다른 놈들한테 책임감을 가진단 말인가?
케인이라면 누가 어떻게 하면 판온 잘 할 수 있을지 물어보면 ‘안 가르쳐줘!’라고 단칼에 잘라 대답할 것 같은데….
그놈이 만약 강해져서 케인을 뛰어넘으면 배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판온 1 때부터 태현이하고 같이 해왔냐?”
“이 자식이 치사하게 시간으로….”
“판온 1 생각해 보면 지금도 이상한 거야. 절대 팀플레이 안 했다고. 정말 많이 변한 거지.”
최상윤은 자신의 추측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여러 모습들.
친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짊어져 가며 그릇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일개 선수가 아닌 판온의 아이콘으로서….
“야. 김태현. 진짜 책임감 때문에 도와주는 거야?”
“?”
태현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이 케인을 쳐다보았다.
“캐나다 쪽에서 도와주면 전폭적으로 홍보 도와준다고 약속해서 하는 건데?”
“…….”
케인은 최상윤을 노려보았다. 최상윤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