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09화
‘아차. 순간 넘어갈 뻔했네.’
태현은 정신줄을 붙잡았다.
요즘 주변에 카르바노그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보니 자꾸 카르바노그의 의견을 중시하게 됐다.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저건 너무 빈틈이 많은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고릴라들한테 말이 통할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내게 1왕자의 목만 주면 물러서겠다!’라고 외쳐봤자, 고릴라들에게는 ‘아니? 요리 재료가 1+1로 찾아왔잖아?’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냐고 카르바노그가 묻습니다.]
‘…어떻게든 빼내야 해.’
졸지에 1왕자를 저 강력한 몬스터들 사이에서 구출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니!
어이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저 몬스터들은 얼마나 강하길래 1왕자를 붙잡은 거지?’
1왕자의 호위 기사들도 레벨 5,600은 그냥 넘어가는 강한 보스 몬스터들이었지만….
1왕자 본인도 절대 약한 자는 아니었다.
무려 굶주린 혼돈과 직접 계약을 한 강자인 것이다.
에랑스 왕가의 혈통을 이은 사기 스킬+에랑스 왕가에 내려오는 사기 아이템+굶주린 혼돈과 계약=개사기 NPC!
태현 본인도 1왕자와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있었다.
드래곤 잡을 때 1:1로 정면 승부하지 않듯이, 1왕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1왕자가 지금 요리 재료가 되어서 붙잡혀 있었다.
저 정도쯤 되면 굶주린 혼돈이 무슨 힘이라도 내려줘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걸 보니….
[카르바노그가 저 밧줄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1왕자를 묶고 있는 밧줄도 상당히 사기 아이템이 분명했다.
“저… 저게 뭔 꼴이야?”
“요, 요리하려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뒤늦게 본 길드원들은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에랑스 왕국의 왕자가 솥에 삶아지는 꼴은 처음 보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냥 위협이거나, 괴롭히려는 거겠지. 설마 요리하겠어?”
“…저 고릴라 놈이 군침을 흘리면서 소스를 바르는 거 같은데…?”
고릴라는 신이 나서 거대한 항아리에 있는 녹색 소스를 1왕자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1왕자는 읍읍거리며 저항했지만 고릴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밧줄과 별개로 저 고릴라 놈들도 강하다고 봐야 해.’
이 섬의 몬스터들을 봤을 때 회피력만 믿을 수는 없었다.
태현의 회피력을 뚫을 수 있는 스킬들을 하나 정도는 갖고 있다고 봐야 했다.
‘숫자도 많고, 싸움 벌어지면 무조건 한 대 이상은 맞게 될 텐데, 아. 이데르고의 화신 상태니까 좀 더 맞아도 되긴 하겠군….’
HP와 MP가 미친 듯이 늘어난 상태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데르고가 고릴라의 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카르바노그가 토끼들의 신이라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지….’
그러는 사이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끝냈다.
1왕자가 잡힐 정도면 저 고릴라 몬스터들은 정말 센 게 틀림없었다.
“물러서겠지?”
“물러서야지.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다들!”
“!?”
그러나 할러스가 그런 길드원들에게 따끔하게 훈계를 내렸다.
“이미 다 계획을 세웠을 거야.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아니,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저걸 어떻게 뚫어? 물러서야지….”
“게다가 1왕자 굳이 구해줄 필요 없잖아? 어차피 우리 공격할 거 같은데.”
할러스의 말에 길드원들은 황당해했다.
사람인 이상 저걸 어떻게 공략하란 말인가.
저기 들어갔다가는 1왕자 옆에 사이좋게 묶여서 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보라니까. 지금 바로….”
쾅!!
-왕자님! 구하러 가겠습니다!
-이 사악하고 더러운 몬스터 놈들! 당장 그 솥에서 왕자님을 치우지 못할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1왕자 쪽 호위 기사들이 벼락같이 나타났다.
그들도 왕자를 찾아낸 것이다.
“…봤지?? 이게 계획이라고!”
“…?!?”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유도한 거지?
같이 있었는데?
“잠깐만, 이건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들어간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뒤의 쓰잘데기 없던 대화를 무시하고 있던 태현은 날카롭게 외쳤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걸!
* * *
1왕자의 호위기사 vs 정체불명 섬의 고릴라.
하나하나가 던전 보스쯤 되는 강자들의 미친 싸움!
기사들은 돌격하면서 각종 사기 스킬들을 켜고 주변을 갈아엎었다.
-에랑스 왕가를 향한 충성! 위대한 기사의 검!! 갈락트라코 검술! 응축된 마나의 심장, 심장 폭발, 죽기 직전의 광휘!
‘와. 나랑 안 싸워서 다행이다.’
태현은 오랜만에 소름이 끼쳤다.
충성심으로 뭉친 호위기사들은 1왕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력을 깎는 스킬들을 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레벨 높은 괴물들이 몇 배로 버프되자 무슨 드래곤도 때려잡을 것 같은 살기가 풍겨났다.
…원래라면 저걸 태현이 맞상대해야 했다니!
-쿠어어어어…!
[황금고릴라가 <세계를 울리는 포효>를 사용합니다!]
[황금고릴라가 <원시의 힘>을 사용합니다!]
[황금고릴라들의 힘이 공명합니다! 더욱더 증폭됩니다!]
[섬에 흐르는 신비로운 기운이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황금고릴라들이 <원시의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황금고릴라…]
그에 맞서 고릴라들도 닥치는 대로 사기 스킬을 쓰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버프가 걸린 고릴라들이 팔을 휘두르자, 거대한 충격파가 쏘아져 나가 바닥을 박살 냈다.
콰콰콰콰쾅!
온갖 파편이 날아왔지만 기사들은 무시하고 달렸다. 온몸을 방어막으로 보호하고 오러를 날렸다.
카카카캉!
-괴물 자식들, 죽어라!
-감히 왕자님을!!
고릴라들은 워낙 단단해서 그렇게 공격을 날렸는데도 데미지를 별로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왕자를 위해서!
-크아아아앗!
마나를 쥐어짜자 더욱더 강한 오러가 나와 고릴라들을 공격했다.
충성심 넘치는 기사들이 하나, 하나 쓰러지면서 고릴라들을 때려눕히는, 실로 비장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태현 일행이 조심스레 은신 걸고 접근하고 있었다.
“…….”
“…….”
-숨 크게 쉬지 마.
-아, 알고 있어.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판온하면서 이렇게 무서운 적도 드물었다.
‘젠장.’
가까이 접근한 태현은 혀를 찼다.
1왕자는 혼자 묶여 있지 않았다. 요리사 역할을 맡은 고릴라가 1왕자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싸우는데, 이 고릴라는 싸우지 않고 1왕자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궁리하고 있었다.
[고릴라들의 우두머리를 발견했습니다!]
[요리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
[상대의 정보를 확인하는데 보너스를 받습니다!]
‘요리 스킬이랑 적 보스 몬스터랑 무슨 상관이라고…?’
[황금고릴라의 우두머리, 움바카는 매우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고릴라입니다.]
[놈은 이 섬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요리해서 먹으려고 하는 미식가입니다. 그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하. 이래서.’
같은 요리사로서 친해질 수 없어 보였다.
상대는 태현을 먹이로 생각할 테니까!
[섬에 대한 정보가 늘었습니다.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신비로운 원시의 섬-아키서스 교단 퀘스트>
중앙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이제까지 대륙 주변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몬스터들이 살아 숨쉬는 야생의 땅이다.
아직 아무런 신앙도 없는 이곳에 신전을 세우고 신앙을 퍼뜨리는 것이 어떨까?
지금은 힘들고 고되지만 분명 먼 훗날에는 보람찬 결과가 되어 돌아오리라!
보상: ?, ???
‘미쳤냐??’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냐고 외칩니다!]
두 신과 화신은 발끈했다.
지금 고릴라한테 수프 재료 되냐 마냐의 순간인데 무슨 신앙을 퍼뜨리는 퀘스트를 줘??
돌았냐???
‘신앙 퍼뜨리려면 여기에 사람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여기에 사람이 살 수가 있기나 해?’
백 명 불러오면 90명 정도는 죽을 거 같은데?
퀘스트는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정보를 얻었다는 점이었다.
이 원시의 섬은 아직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정체를 밝혀낸 사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정보가 부족한 곳.
이렇게 얻는 정보 하나하나가 매우 귀중했다.
<원시의 섬을 정복하라-아탈리 왕국 국왕 퀘스트>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기 위해 나선 당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국왕이다.
‘…장난하냐??’
진정하기도 전에 새로 추가되는 퀘스트!
…이 섬을 정복해 영토를 늘린다면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보상: ?, ???
두 퀘스트 모두 절대 깰 엄두가 나지 않는 퀘스트였다.
‘일단 여기가 새로운 지역이긴 한가 보군.’
판온의 미발견 지역 중 하나!
중앙 대륙 서쪽에는 바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섬을 보니 이런 곳들이 더 많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더 많이 나오면 좀 많이 끔찍할 거 같긴 했다.
‘원래 섬에 숨겨진 던전이나 비밀 같은 걸 최대한 많이 챙기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 보면 그냥 빨리 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아키서스 직업 퀘스트 하라는 대로 다 했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태현은 일단 가장 우선적으로 1왕자의 목만 챙긴 다음에 튈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했다.
뭐 나중에 다시 올 수도 있을 거고….
[정말 다시 올 거냐고 카르바노그가 묻습니다.]
‘내가 미쳤니?’
그렇게 빠르게 생각을 끝내는 사이, 움바카는 1왕자 요리 방법을 고민 끝냈는지 1왕자의 발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휘둘러 데미지를 주기 시작했다.
퍽퍽퍽!
“막아!!!”
태현은 다급하게 외쳤다.
태현 일행은 은신을 풀고 재빨리 나타났다.
원래는 몰래 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읍읍읍!
1왕자는 구출대가 나오자 기쁨으로 눈을 크게 떴….
…??
‘?????’
1왕자는 당황으로 눈을 깜박였다.
어….
이데르고 교단 같은데…?
“1왕자를 구해!! 은신 있는 놈들 옆으로 돌아! 어떻게든 빼내!”
“광역기는 조심해!”
일단 이데르고 교단 같아도 자기를 구해주러 온 것 같자, 1왕자는 안심했다.
웬 고릴라 놈한테 삶아지는 것보다는 이데르고 교단과 계약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역병 기사! 앞으로!”
-크르륵!
태현은 말과 함께 움바카한테 뛰어들었다.
상대가 당황한 지금, 최대한 데미지를 먹이고 1왕자를 뺏어 와야 한다!
퍽퍽퍽-
1왕자를 바닥에 휘두르던 움바카는 태현을 보더니 놀라서 1왕자를 들고 휘둘렀다.
‘아니 이런 비겁한 고릴라 자식이?’
태현은 상대의 비열한 수법에 분노했다.
인질을 잡다니 네가 그러고도 고릴라냐??
[카르바노그가 근데 1왕자 꼭 살려둘 필요 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아. 그러게?’
목이 필요한 거지 살아 있는 1왕자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깨달은 태현은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진정한 역병의 손길!!!
태현은 갖고 있는 근접 폭딜 스킬 중 가장 강력한 걸 꺼냈다.
역병의 힘을 소모해서 일격을 갈기는 강력한 마법!!
[<진정한 역병의 손길>로 인해 1왕자가 크게 데미지를 입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1왕자가 쓰러집니다!!!]
막타!
움바카가 다 잡아 놓은 1왕자의 숨통을, 태현이 정확하게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