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05화
“김태현, 다 좋은데 우리 생각도 좀 해줘라!”
기사들을 막는 건 좋은데 이렇게 독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면 플레이어들도 뭘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독 기운 때문에 [뒤지기 직전입니다!] 메시지창이 날아오는 것!
“지금 정신 팔렸을 때 이렇게 독 깔아놔야 해! 붙은 다음에 쓰면 늦어!”
태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이렇게 불평을 할 수 있는 것도 기사들이 거대 토끼한테 달려든 덕분이었다.
그사이에 태현이 주변에 독을 미친 듯이 깔아놓은 것!
만약 기사들이 붙은 다음에는 이렇게 독을 쓸 수도 없었다. 독을 썼다가는 그들 먼저 쓰러질 것이다.
이 기회에 최대한 많이 때려야 한다!
할러스가 태현에게 달려와서 외쳤다.
“김태현 님! 저 토끼를 이용해서 기사들을 공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얘는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냐?’
태현은 의아했지만 일단 지금처럼 정신없는 상황에서는 필요한 말부터 해야 했다.
“토끼를 이용한다니 어떻게?”
“제가 갖고 있는 광란의 주문서가 있습니다. 이걸 사용하면 저 토끼가 미쳐 날뛰지 않을까요?”
[카르바노그가 매우 분노합니다!]
카르바노그는 할러스의 말에 분노했다.
탐험가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였다.
토끼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카르바노그. 난 토끼도 많이 잡았는데…?
[중요한 건 존중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현은 일단 대답했다.
“별로 좋은 방법 같지는 않다. 미쳐 날뛰면 이쪽에도 피해가 올 거야.”
“하지만 김태현 님이라면 그 상황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날 뭘로 보고 있는 거니?”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 섬 몬스터들은 뭘 잘못 먹었는지 입에서는 브레스를 내뿜고 발을 한 번 구르면 지진이 일어나는 수준인데 태현이 뭘 이용한단 말인가.
“어, 안 됩니까?”
할러스가 ‘왜 엄살이세요?’ 같은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자 태현은 한층 더 어이가 없어졌다.
‘이 자식 검은 바위단에서 믿음직한 에이스 맞아?’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애가 능력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그보다는 저 토끼를 달래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보자.”
“…예?”
이번에는 할러스가 황당해할 차례였다.
뭘 누구 편으로 만든다고?
“아니. 김태현 님. 지금 잘 생각해 보십쇼. 여기 섬에 있는 몬스터들은 설득하거나 길들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조련 스킬도 없지 않으십니까?”
“고급 조련 스킬이 있긴 해.”
고급 레벨인, 사디크의 화염 조련술!
“…아, 아니. 그게 왜 있…?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최고급 조련 스킬이 있어도 힘들어 보이는 몬스터 아닙니까.”
몬스터를 길들이는 것도 이빨이 먹힐 것 같은 상대한테 하는 짓이었지, 여기 섬에 나오는 괴물들한테 할 건 아니었다.
보통 길들이기 전에 친해지거나 먹이를 주는 식으로 서로 교감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지 않은가.
“괜히 시도했다가 다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해봐야겠어. 비켜봐라.”
태현은 자욱한 독 안개를 뚫고 토끼한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할러스는 걱정 섞인 표정으로 뒤를 쫓았다.
아무리 태현이 대단한 플레이어라지만 신은 아니었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득 불가능한 몬스터와 교감을 나누고 친해지는 게 가능할까?
“콜록, 콜록.”
“아. 미안. <이데르고의 역병 방어막>, <방어막 증폭>, <역병의 가호>.”
너무 능숙하게 마법을 거는 모습에 순간 할러스는 태현이 마법사였나 착각했다.
…마법사 아니었지?
[이데르고의 힘으로…]
[……]
[……]
-쿨럭, 쿨럭! 이 몬스터 놈! 뭐 이리 생명력이 질기단 말이냐!
-켁, 케엑… 독의 기운이 점점 퍼지고 있다! 빨리 쓰러뜨려야 한다!
-기사의 명예로 독을 물리쳐라! 독의 기운이 오지 못하도록 스킬을 써!
왕국 기사들을 중독된 상태에서도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도 저 토끼가 태현 쪽 소환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태현은 토끼에게 달려가면서 외쳤다.
“공격해! 맞고 있지 말고! 저 사악한 침략자 놈은 널 잡으러 온 거다!”
-꾸우…?
거대 토끼는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태현의 겉모습도 그리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온몸에서 역병과 독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화신 상태!
아무리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러 온 침입자 같이 생겼던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하필 왜 그딴 겉모습으로 말을 거냐고 한탄합니다.]
상황을 뒤늦게 깨달은 태현은 다급히 변명했다.
“아니, 이건 오해다! 내 모습이 이런 건 섬에 온 이데르고 교단 놈들 때문이야! 놈들이 내게 저주를 걸었어!”
-꾸우.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카르바노그의 권능을…]
[칭호…]
[토끼…]
[설득에 성공합니다!]
[정체불명의 섬에 있는 토끼가 당신의 말을 믿어줍니다!]
다행히 검술 같은 여러 스킬들이 봉인된 상태에서도 화술 스킬은 남아 있었다.
거기에 여러 칭호들과 업적, 카르바노그의 힘까지 합쳐지자 거대 토끼는 태현의 말을 일단 믿어주었다.
되게 수상쩍게 생기긴 했지만….
일단은 믿어준다!
“어쨌든 저 사악한 놈들을 공격해! 그대로 맞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꾸우.
[카르바노그가 황당해합니다. 저 토끼는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 왜??’
놀랍게도 저 거대 토끼는 덩치와 별개로 매우 평화로운 심성을 갖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패더라도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는 마음!
‘아니 카르바노그는 성질 더러운데 왜 쟤는 저렇게 순해빠졌어?’
[…방금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묻겠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덩치만 크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태현은 혀를 찼다.
일단 태현의 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꽤나 큰 성과긴 한데….
싸우지 않는다면 지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흠. 그냥 광란 주문서를….’
일단 지금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걸 보니, HP와 체력 회복 속도가 어마어마한 게 분명했다.
저 정도로 잘 버티는 것도 드문 것이다.
체력만 따지고 보면 예전에 만났던 보스 몬스터인 갈르두가 떠올랐다.
<영원한 불사의 목걸이>를 찬 덕분에 때려도 때려도 계속해서 HP가 차오르던 괴물!
그런 스펙을 갖고 있으니 딱히 전투 스킬 없이 몸만 굴려도 꽤 강하지 않을까?
[카르바노그가 하지 말라고 정색합니다.]
‘알겠어. 알겠어.’
[카르바노그가 자기를 믿어보라고 합니다. 저 토끼가 자신을 믿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가 교단 이끌면서 고생을 안 했지. 카르바노그.’
처음 보는 사람한테 새 종교 믿으라고 하는 난이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게 쉽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길에서 ‘아키서스 님 믿으십니까?’ 하고 다니겠는가.
[거대 토끼가 카르바노그와의 대화 끝에 카르바노그를 믿기로 합니다.]
“??”
[카르바노그가 우쭐해합니다!]
* * *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찾아갈 때, 우직하게 바다만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낚시에 환장한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육지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 배 모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육지에서 하도 폭탄 많이 터뜨려서 바다로 도망친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등등.
이런 이들이 흘러오는 곳이 바로 해저 왕국 아란티스였다.
판온 플레이어들에게 공개된 왕국 중 유일한 바다 왕국이자, 플레이어들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왕국!
망망대해를 돌다 보면 가장 필요한 게 머무를 곳이었다.
물 떨어지고 먹을 거 떨어지면 괴식 요리도 그립기 마련.
그럴 때는 작은 섬도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초보 어부인데, 멀리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런… 아란티스 왕국을 추천합니다. 가는 길은 멀어도 한 번 도착하면 거기서 스킬 올리기 쉬울 겁니다.
-항해 스킬을 올리고 싶은데 힘듭니다. 특히 바다에 이상한 괴물들이 너무 많아요.
└이런… 아란티스 왕국을 추천합니다. 아란티스 왕국 근처에는 강한 몬스터도 적고, 낚시꾼들도 많아서 뭐가 나오면 다들 달려들어서 잡으실 겁니다.
-에랑스 왕국 남쪽 해안에서 배 타고 교역하는 상인입니다. 여기 원래 이렇게 경험치 안 오르나요? 길드 동맹 소속인데 요즘 길드도 그렇고 힘들어 죽겠네요.
└세상에… 그냥 접으시지 그러세요?
└└…????
이렇듯 게시판에서 바다 관련된 직업들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보통 아란티스 왕국이 꼭 나왔다.
온갖 화끈한 이벤트들이 벌어지는 대륙에 비해 관심은 좀 떨어져도, 그에 못지않게 조용히 관심을 받는 왕국!
그런 이 왕국에도 소란이 찾아왔다.
“요즘 왜 이렇게 배가 많이 나가지? 그것도 장거리 용 항해선이?”
유 회장은 의아해하며 장부를 뒤적거렸다.
그룹 경영은 사실상 손을 놓은 뒤였지만, 노년에 들어서 제2의 시작을 한 유 회장이었다.
바로 왕국 경영!
그룹 경영만큼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질이 가능하다는 게 좋았다.
태현이야 운영비 벌려고 온갖 개고생을 다 했다지만 유 회장은 그냥 좀 부족하다 싶으면 현질을 해버리면 되는 것!
게다가 유 회장 주변 사람들은 큰손이 많았다.
은퇴하고 할 일 없어서 적적한 사람들이 판온 시작하면 남는 돈을 여기다 쏟는 것이다.
아란티스 왕국 사업 중 하나는 바로 함선 건조와 판매였다.
어부들에 낚시꾼들이 수두룩하니 배가 그만큼 많이 나갔다.
하지만 장거리 용 항해선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많이 팔리는 일이 적었다.
이 근처만 해도 충분한데 뭐하러 저 멀리까지 간단 말인가.
“아.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그 김태현 선수 데리고 오면 고대 제국 대학 입장 허가 뜨는 거요.”
“그거랑 항해선이 뭔 상관이지?”
“머리 좋은 친구가 분석글을 올렸거든요.”
“…?”
판온에는 별의별 쓸데없는 능력자들이 많았다.
태현이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과 섬에서 헤매는 영상을 올리자, 그 영상에 나오는 해의 높이와 별의 모양을 보고 어느 방향으로 날아갔는지 파악한 것이다.
그 결과 나온 답은….
-서쪽이다! 중앙 대륙에서 훨씬 더 서쪽!
-거긴 바다밖에 없잖아?
-가다 보면 섬이 나오는 모양인데?
중앙 대륙에서 동쪽은 아스비안 제국이나 거인 산맥 등 이런저런 땅덩어리들이 나왔지만, 서쪽은 끝없는 바다일 뿐이었다.
겁 없는 탐험가 플레이어들이 가끔 소형선 몰고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며 나갔지만, 모두 다 바다 위에서 굶어죽거나 말라죽거나 배 박살 나 죽곤 했다.
굳이 자살할 게 아니라면 비싼 돈 들여가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긴 아직 공략 불가능한가 보다.
-나중에 레벨 더 높아지면 방법이 생기겠지.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기다리면 언젠가 가능해지겠지’ 같은 느긋한 마음으로는 안 된다!
지금!
바로 지금 남들보다 더 빨리!
“그래서 지금 서쪽으로 배 타고 가다 보면 김태현 있는 섬 나오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 많습니다.”
“아니, 바다가 얼마나 넓은데 그런 멍청한 짓들을 해? 다들 바보인가?”
유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에 플레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
다들 지금 현상금 걸 정도로 경쟁이 붙어서 그렇지,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욕망에 다들 눈이 먼 것이다.
“뭐하나? 안 따라오고?”
“예? 어디 가시게요?”
“남들보다 먼저 가야지. 배 꺼내게.”
“…….”
아니 멍청한 짓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