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02화
태현으로서는 드물게 위로해 준 셈이었지만 실베드 입장에서는 약올리는 것처럼 들렸다.
“장난하냐? 내가 아무리 절박해도 그렇지 파워 워리어 같은 곳에는….”
말하던 실베드는 멈칫했다.
뒤에서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지 마! 너 그러다 죽는다!
-네 목숨을 생각해!
‘?’
아!
생각해 보니 파워 워리어는 김태현 길드 아니냐고 할 정도로 사이가 친한 곳이었지…!
“같은 곳에는? 같은 곳이 무슨 뜻이지?”
태현의 목소리가 어쩐지 서늘하게 들렸다. 실베드는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같은 곳에는 내가 들어갈 자격이 없어서, 부끄러워서 못 들어갈 거 같다는 거다.”
“아. 그런 뜻이었나.”
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실베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스킬 수십 개를 걸고 비싼 장비를 덕지덕지 입고 와도 안 무서운데, 김태현은 그냥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뭐 파워 워리어가 그렇게 빡빡한 곳은 아니지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실베드 일은 실베드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찬성.”
“…….”
태현과 검은 바위단이 1초만에 관심을 끄자 실베드는 뭔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이 자식들 나 혼자 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건 아니겠지…?
“일단 지금 이데르고 교단이라고 속여서 사제 놈을 꼬드겨놨다. 이걸로 1왕자와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찾는 거야.”
검은 바위단의 탐험가, 할러스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런데 놈은 대부분의 기억을 잃지 않았습니까?”
그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고 공손해져 있었다.
태현이 이데르고 교단 사제 상대로 사기치는 솜씨를 보고 감동한 것이다.
화려한 화술 스킬을 기반으로 한 멋들어진 퀘스트 진행 솜씨!
탐험가 아닌 놈들은 ‘저게 뭐가 대단한 건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NPC한테서 원하는 정보 얻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놈들!
하지만 수많은 NPC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고생을 해왔던 탐험가라면, 저걸 보고 감동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긴 했지만 조금씩 찾는 걸 보니까, 특정 조건 만족할 때마다 기억이 회복될 가능성이 높아 보여.”
“과연…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놈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우리도 이데르고 교단인 척을 하면서 데리고 다니면 되겠지. 1왕자를 먼저 만나면 속일 필요도 없을 거고, 이데르고 교단을 먼저 만나면… 그건 그때 상황 봐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과연… 과연…!”
할러스는 신이 나서 메모했다.
오늘 탐험가로서 많이 배우는구나!
하지만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오해했다.
‘할러스가 저렇게 많이 따지는 걸 보니까 정말 불만이 많은 거 같은데.’
‘계속 묻는 거 봐. 하긴 답답하긴 하겠지. 평소에 길드 퀘스트는 언제나 앞장서서 해결했잖아.’
‘김태현이 멋대로 하니까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이고 그러겠지.’
잘 모르는 길드원들 눈에는 할러스가 불만을 가지고 따지는 걸로 보였다.
김태현이 교단 관련 직업에, 각종 제작 스킬들도 갖고 있는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탐험가보다 퀘스트를 잘 진행하진 못할 테니까!
‘근데 저러다가 김태현한테 맞으면 많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많이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로그아웃이 문제지. 저번에 할러스가 말렸지만 우리가 나서줘야겠다.’
‘맞아. 아무리 김태현이 무섭다지만 같은 길드원이잖아.’
검은 바위단의 끈끈한 우정은 이럴 때 힘을 발휘했다.
할러스가 ‘아니! 김태현한테 말할 필요 없다고! 상관없다고!’라고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 우정!
“크흠. 크흠. 김태현.”
“?”
“저…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보통 그런 소리를 하는 놈들은 오해를 하게 만들던데. 일단 들어는 보겠다.”
“저기 저 할러스란 친구 있지? 저 친구가 저래 보여도 우리 길드 최고의 탐험가야. 몇몇 굵직한 퀘스트들을 다 깼다고.”
“오. 진짜?”
길드원들의 고평가에 태현은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할러스는 갑작스러운 길드원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뭐하는 거야 지금…!
-다, 다들 뭐해?! 뭐하는 건데?!
-할러스. 사양할 거 없다. 우린 길드원이잖아.
-네가 퀘스트 주도하고 싶어하는 거 알아. 네가 주도하게 해줄게.
-아니야! 괜찮다고! 진짜 괜찮다고!
-아니긴 뭐가 아냐. 가만히 있어. 우릴 믿어라.
-…….
할러스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그냥 김태현이 하는 거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걸 말하기에는 할러스도 자존심이 있었다.
‘김태현이 나보다 너무 퀘스트 잘해서 그냥 보고 싶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할러스한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한 번만이라도.”
“맞아. 우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할러스라면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한 번 솜씨를 볼까?”
태현은 의외로 선선히 할러스한테 양보했다.
태현은 이런 부분에서 욕심이 없었던 것이다.
잘 할 수만 있다면 남이 퀘스트를 진행해 줘도 상관없었다.
‘할러스란 길드원이 그렇게 잘한다면 잘 됐네. 귀찮은 건 맡겨놓고 전투에만 집중해도 되겠군.’
태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길드원들은 신이 나서 할러스에게 말을 걸었다.
“할러스! 우리가 허락을 받아왔어!”
“할러스! 잘 됐지? 이제 네 실력을 보여주기만 하면 돼!”
“모두… 까득득… 고마워… 뿌드득….”
할러스는 표정관리하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이제 그는 김태현 앞에서 자신의 화려한 탐험가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어떡하냐!
* * *
“괴물 들쥐 나왔다. 모두 소리 죽여!”
섬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일반 몬스터인데도 무시무시한 강함을 자랑했다.
“은신 마법 걸어줘!”
“걸었어!”
[<신비로운 괴물 들쥐>가 나왔습니다.]
[<들쥐의 후각> 스킬을 사용합니다. 걸릴 경우 발각될…]
[……]
집채만 한 들쥐는 섬에서 만난 몬스터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래봤자 쥐지’라고 덤벼들었던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신비로운 괴물 들쥐>가 <야생의 회복력>을 사용합니다. HP가 회복됩니다.]
[<신비로운 야생의 힘>으로 들쥐의 힘이 크게 증가합니다!]
[<들쥐의 비명>을 사용합니다!]
[신비로운 힘으로 인해 회피가 불가능합니다. 데미지가 들어옵니다!]
[<신성 권능>으로 데미지를 줄입니다!]
[……]
[……]
태현 같은 경우가 가장 놀랐었다.
물론 판온의 몬스터들이 얼마나 많은데, 태현의 회피력을 뚫을 수 있는 적도 당연히 있었다.
태현 본인도 그럴 상황을 각오하고 몇 가지 대비를 해놨었고,
데미지를 대폭 감소시키는 <신성 권능> 스킬이나 강력한 아다만티움 갑옷 등등이 바로 그런 대비였다.
하지만 이런 들쥐가 저렇게 사기적인 스킬을 쓸 줄이야!
간신히 잡긴 했지만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가능하면 굳이 싸움 만들지 말자.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 이후로 태현 일행은 굳이 괴물 들쥐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한다!
할러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괴물 들쥐는 보통 발자국으로 먼저 발견하고, 그 다음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때 미리 은신 스킬을 써두지 않으면 위험하고… 놈이 탐색 스킬을 써도 괜히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기다리면 놈이 지나가니까….
-오. 잘하는데?
태현은 감탄했다.
역시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자기들 이름 걸고 보증을 설 만했다.
몬스터와 싸우지 않고 피하는 방법을 저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니!
-…….
할러스는 매우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지금 말한 건 전부 다 태현이 먼저 말했던 것이었으니까!
처음 괴물 들쥐를 잡고 나서 태현이 말했던 것이다.
-보니까 발자국이 있는 데다가 소리까지 먼저 들렸었어. 아마 은신 스킬을 먼저 써뒀다면 괜찮았을 거다. 게다가 아까 뒤로 은신 써서 돌아갔는데 눈치 못 챈 거 보면 탐색 스킬은 약해 보이는데. 다음에 싸울 때는 굳이 싸울 필요 없겠어.
…라고!
태현이 말해놓은 걸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내가 뭐라고 했어, 김태현? 할러스는 대단하다니까.
-우리도 믿고 의지한다고.
-…….
할러스는 배가 따끔따끔 아파오는 걸 느꼈다.
‘미친 듯이 부담된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사람도 이렇게 부담되지는 않을 것이다.
크으윽!
* * *
-!
[이데르고 교단 사제가 신성력을 감지합니다.]
[이데르고 교단 사제의 기억이 조금 회복됩니다!]
-이 근처에서 이데르고 님의 힘이 느껴집니다!
“오. 그래?”
태현은 무기부터 꺼냈다.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부터 시작해서, 살벌한 폭탄들이 여럿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터지면 주변을 화염으로 뒤덮어버리는 광역 폭탄인, <사디크의 지옥 화염 폭탄>.
한 번 터지면 수십 수백 개의 파편을 날리며 그 공격 하나하나마다 치명타를 터뜨리는 폭탄인 <아키서스의 행운 파편 폭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폭탄을 하나씩 만들어서 가방에 저장해놓는 태현의 솜씨는 장인 그 자체였다.
-…어, 무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같은 교단 사람들을 만났는데?
-네가 충격받을까 봐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사실 아키서스 교단 놈들 중에 이데르고 교단으로 변장하는 놈이 있다.
[카르바노그가 바로 네 앞이라고…]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아키서스 놈들이 흉악하더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있긴 하겠군요!
[이데르고 교단 사제가 납득합니다!]
‘…은근히 기분이 나쁜데?’
이데르고 교단도 악신 교단인 주제에 아키서스 교단을 저렇게 나쁜 놈 취급하는 게 살짝 기분이 나빴다.
너희는 뭐 선량한 줄 알겠다?
-그러니까 같은 교단처럼 보여도 의심부터 해야 해. 다행히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
-과연… 실로 대단하십니다.
-자. 확인을 해봐야 하니 길을 안내해라.
-여기입니다. 신성력이 이쪽으로 이어지는군요.
이데르고 교단 사제는 늑대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순진무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데르고 교단 임시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파아앗!
숲을 헤치고 지나가자 거대한 나무와 바위를 낀, 버티기 좋은 지형에 지어진 임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데르고 교단의 임시 신전!
거기 있던 교단 NPC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데르고 교단 정예 사제들이…]
[이데르고 교단 정예 성기사들이…]
저들도 상당히 고생했는지 반쯤 거지꼴!
-누구냐! 몬스터… 몬스터가 아니다! 사람이다!
-아니, 우리 교단 사제잖아? 모험가 놈들이 우리 교단 사제를 데리고 있다!
-이봐! 정체를 밝혀라! 당장 풀어놓지 못해!
NPC들의 반응에 사제는 안심했는지 태현을 보고 말했다.
-저걸 보니 같은 교단 사람들 같습니다. 아닙니까?
“어설프군!”
-예?
“저건 위장이다.”
-!
기억을 잃은 사제는 깜짝 놀랐다.
저게 위장이라고?
“잘 봐라. 후줄근한 꼴에, 놀라서 당황하는 모습. 우리가 나타날 줄 모르고 방심하고 있다가 당황한 게 틀림없다.”
-과연…!
[기억을 잃은 상태입니다. 설득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묘하게 납득되는 논리!
그러던 도중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 중 한 명이 기억을 잃은 사제를 보며 말했다.
-잠깐, 저분은….
“내가 저놈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방법을 알고 있지.”
-그게 뭡니까?
“전부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