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94화
“제법 괜찮은데?”
“헉, 미친, 헉. 놈, 헉, 같으니….”
실베드는 옆으로 털썩 누웠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다!
예전에, 아직 실베드가 덜 유명했을 때, 태현의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 뭐가 힘들다고 저렇게 오바야? 저 케인이란 놈 진짜 못마땅하네.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저 난리야.
-김태현 파티는 근데 진짜 하드코어하다던데? 판온 1 때부터 유명했대.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거 다 설정이야.
케인이 ‘여러분 살려주세요! 저는 케인입니다! 여기 위치는 지하 광산 던전….’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설정인 줄 알았다.
랭커쯤 되면 밥 안 먹고 사냥만 하는 게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갖고 징징대다니!
…하지만 태현과 같이 하게 되자 그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미친놈…!’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와! 우린 자유다!’ 하면서 주변 정찰 도는 동안, 태현은 실베드와 함께 <외딴 섬의 비밀 요새>를 만들었다.
-실베드. 들어보니 네가 여기 사람들 중에서 힘 스탯이 좋다고 들었는데.
-잘 아는군. 그래. 내 힘 스탯이 좀 높은 편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현은 가장 유명한 랭커였다.
신진 랭커로서 지금 막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실베드 입장에서는 칭찬을 들어서 기분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고 지구력 스탯도 꽤 높다고?
-그래. 전사라면 지구력 스탯도 만만찮게 중요하니까.
-그렇군. 네 말을 들어보니 네가 맡아야 할 일을 알겠다.
-오. 뭐지? 몬스터 사냥?
-아니. 저기 가서 나무 잘라와.
-…농담하는 건가?
실베드는 순간 당황했다. 태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나?
-그렇지. 그런 농담은 하지 마라.
-딱히 농담은 아니었는데… 그래. 수레 만들어줄게. 수레에 올려서 갖고 오면 한 번에 많이 갖고 올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맨몸은 그렇지?
-아,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실베드는 ‘나 같은 랭커는 다른 할 일이 있다, 레벨 낮은 놈을 시켜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게 통할 사람이었다면 케인도 저렇게 고통받지 않았을 테니까!
-너는 왜 안 하는 거냐!?
-나는 건축하고 제작해야 하잖아. 네가 할 수 있냐?
-…….
치사하게 제작 스킬로 밀어붙이다니!
평소에 제작 스킬을 안 올린 탓에 실베드는 할 말이 없었다.
-흠.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뭐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한데.
-오… 뭐지?
-1:1로 뜨자. 그렇게 내 말 듣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수레 만들면 열심히 하겠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눈앞에서 태현이 싸우는 꼴을 봤는데 ‘그래 한 번 깃발 꽂자!’ 같은 소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실베드는 열심히 나무를 자르고 돌을 부수고 광물을 캐고 날랐다.
[벌목 스킬이 오릅니다!]
[힘 스탯이 영구히 오릅니다!]
[……]
[……]
[건축 스킬이 오릅니다!]
[……]
누가 봤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아무도 모르는 외딴 섬에서 혼자 노동을 하고 있다니!
‘내가 지금 판온을 하고 있는 거 맞나? 다른 게임 들어온 거 아니지?’
실베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옮겼다.
HP도 넉넉하고, 상태창도 멀쩡했지만, 계속 나무만 자르고 옮기다 보니 사람이 정신적으로 좀 피곤해졌다.
좀 쉬자!
“뭐하냐?”
“쉬는데?”
“왜?”
“…어? 피곤해서…?”
“몬스터를 잡은 것도 아니고 네가 레벨 10이 안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쉬지? HP가 낮아졌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정신적으로….”
“스탯적으로는 문제없다는 거지?”
“없긴 한데….”
“그럼 움직여.”
“…….”
아…!
실베드는 슬슬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케인 같은 선수들이 왜 그랬는지!
* * *
“아니 그 짧은 사이에 이걸 만든 겁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돌아온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요새의 모습에 감탄했다.
단둘이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그럴듯한 요새!
마을이 없는 외딴곳에 갔을 때는 이런 야영지를 먼저 만드는 게 필수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쉬고, 몬스터를 피하고, 각종 활동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야영지 정도 생각했지 이렇게 그럴듯한 요새를 만들어 낼 줄이야.
‘김태현이 제작 스킬 수준이 높다던데 진짜….’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요새를 만들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자서 요새를 만들다니….”
검은 바위단의 대장장이, 필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태현이 만들어 낸 아이템들도 그랬지만, 이런 식으로 결과물을 볼 때마다 황당하게 느껴졌다.
대체 캐릭터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런 게 되는 거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다 도운 거다.”
“…그, 그래. 네가 없었으면 김태현도 못 만들었겠지.”
“실베드 저놈 은근히 속이 좁다?”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수군거리자 실베드는 울컥했다.
여기서 그 혼자 유일하게 따로 놀고 있는 탓에 편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뭘 좀 찾았나?”
“아. 그게….”
태현이 요새 건설하는 동안 정찰 돌았던 길드원들이었다.
“일단 두 가지 알아낸 게 있어.”
“?”
“여기 숲이 좀 이상해.”
[신비한 숲에 들어왔습니다. 강력한 신비의 힘이 숲을 보호합니다!]
“뭐… 어디든 간에 가면 나오는 메시지창이잖아?”
어느 던전이든 저런 메시지창은 자주 떴다.
[이 던전은 고대 제국 시절부터 있던 역사 깊은 던전이고 고대 제국 시절의 마법이 걸려 있고…]
[이 던전은 무려 사디크 님께서 직접 지으신 던전인데 사디크의 화염이 던전을 뒤덮고 있고…]
그런 거에 일일이 겁을 먹으면 랭커가 아니었다.
“그게 평범한 메시지창이 아니더라고. 이상한 일이 자주 생겼어.”
길드원들은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앞이 안 보이는데 마법 좀 걸어줘. 시야 높여야겠다.
-오케이. <지혜로운 독수리의 눈>….
[<지혜로운 독수리의 눈>을 사용했습니다.]
[강력한 신비의 힘으로 인해 마법이 강화됩니다!]
“…좋은 거 아닌가?”
마법 공짜로 강화되는데?
“아니. 그게 끝이 아니라니까.”
* * *
-잘 보인다. 고마워.
-야. 너 언제 이렇게 스킬 레벨 올린 거냐? 장난 아닌데?
-내가 건 게 아니라 여기 숲이… 어. 토끼다.
-너 토끼 좋아했냐? 왜 뜬금없이 토끼 타령이야?
이런 숲에는 강한 몬스터 말고도 약한 잡몹들도 여럿 있기 마련.
토끼, 사슴, 들쥐 등 이런 몬스터들은 초보자들의 좋은 상대였다.
하지만 랭커쯤 되면 이런 약한 몬스터들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경험치도 안 되고, 고기나 가죽 같은 게 필요하면 더 높은 거 잡으면 되니까!
-아니. 토끼가….
-그래. 숲에 토끼 있을 수도 있지.
-미친놈들아! 앞에 토끼 보라고!
-???
그제야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집채만 한 토끼가 걸어오는 모습을!
-…….
-…….
-저, 저거 뭔 괴수 몬스터냐?
어지간한 괴수 몬스터 뺨치는 덩치에 길드원들은 긴장했다.
웬만해서는 토끼한테 겁을 먹지는 않겠지만 이건 좀….
너무….
무섭잖아!
-후퇴! 후퇴!
-여기 무슨 <거대토끼의 숲> 같은 건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사슴이 뛰어나왔다.
토끼 만만찮게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슴!
-…미친!!
-일단 빠져나가!!
* * *
“허.”
말을 들은 태현은 신기해했다.
여기 숲에 사는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강화된 상태였다.
‘온갖 특이하고 강한 몬스터들이면 모를까 그냥 일반 몬스터가 강화된 숲이라니.’
생각해 보니 일반 몬스터들이 저 정도면, 강한 몬스터들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끔찍했다.
[카르바노그가 그래도 토끼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응? 아.’
태현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가 바로 이해했다.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권능부터 시작해서 토끼 관련 칭호까지 갖고 있는 사람.
여러 몬스터들 중에서는 그나마 토끼를 상대하기 가장 좋았다.
[…카르바노그가 잊고 있었던 거 같다고 말합니다.]
‘하하.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네 권능은 언제나 챙겨 놓고 있다고.’
“숲 안으로 들어가려면 작정하고 들어가야 할 거 같아.”
“그렇군….”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막 나가는 숲의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진 않았다.
태현과 힘을 합친다면 차근차근 뚫고 나갈 수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태현을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한테 이 사실을 따로 알려주면 매우 질색을 하겠지만….
“그런데 1왕자나 이데르고 교단 놈들은 못 찾았나?”
“안 보이던데. 김태현.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놈들은 다른 곳으로 간 게 아닐까?”
검은 바위단 길드원 중 하나인 할러스가 입을 열었다.
할러스는 유명한 탐험가 플레이어.
검은 바위단 내에서 어려운 퀘스트를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만큼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예리한 판단을 할 줄 알았다.
“다른 곳으로?”
“그래. 원래 그런 공간이동 하는 아이템은 랜덤으로 보낼 때도 있잖아.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는 거지. 내 감에 따르면 거의 99% 확실하다.”
다른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럴듯하군.”
“역시 할러스가 머리가 좋다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자 태현도 ‘그런가?’ 하고 흔들리고 있을 무렵.
해변에서 너덜너덜해진 이데르고 교단 사제 NPC가 나타났다.
[이데르고 교단의 결사단 사제가 나타났습니다!]
[결사단 소속 사제들은 이데르고의 역병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다루는…]
“…다른 곳으로 갔다고?”
실베드가 할러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잘난 척하더니 뭐 이런 어이없는….
그러나 태현은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실수할 수도 있지.”
“맞, 맞아! 실수할 수도 있지. 넌 실수 안 하냐??”
“왕자한테 줄 잘못 타서 공적치 포인트 다 날린 놈이!”
“아니, 이 새끼들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온갖 비난을 받자 실베드는 분노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태현이 편들어주자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공격을 멈췄다. 실베드는 순간 감동했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졌다.
‘…이딴 거에 감동을 받으면 안 되는데…!’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지!
얼마 전까지는 에랑스 왕국 군대를 이끌면서 영주의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거 어떻게 하지?”
“공격해야 하나?”
“일단 한 놈인 거 보니 따로 떨어진 놈일 수도 있겠는데.”
태현은 빠르게 견적을 냈다.
장비도 너덜너덜한 데다가, 혼자 있고, 게다가 상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데르고 교단이 보낸 게 아니라 그냥 혼자 떨어진 놈일 가능성이 높다!
“잡아서 요새 안에 가둬야겠다.”
태현은 최고급 찍은 전술 스킬로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전부 끌고 나왔다.
괜히 싸움 길어지면 위험해지니 한 번에 잡으려는 생각!
-3, 2, 1, 들어가!
쾅!
플레이어들은 재빨리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상대는 사제니 가까이만 붙으면….
“움직이지 마라!”
-으어어억! 누구십니까?
“…잠깐. 나를 모른다고?”
태현은 멈칫했다.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도 뭐하지만, 이데르고 교단이 태현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교단 내부 게시판에 태현 얼굴을 올려놓은 다음 매일매일 저주하고 있어도 모자라지 않을 텐데….
-저, 그런데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