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92화
“왜 그런 표정을… 설마 내가 잡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태현은 농담으로 말했다.
설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망상을 했겠는가?
“물, 물론이지.”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지.”
“그렇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랭커 자격 없지.”
“…….”
“…….”
태현의 말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시무룩해졌다.
[카르바노그가 피비린내가 지독하다고 말합니다.]
‘꽤 치열하게 싸운 모양인데.’
탑 입구 쪽부터 이렇게 기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있으니 꽤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왕자가 설마 미쳐 날뛰기라도 했나?’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1왕자는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상태.
원래 저런 계약을 하면 사람이 언제 미칠지 모르는 법이었다.
[카르바노그가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굶주린 혼돈과 계약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 언제 이성을 잃을지….]
[이데르고 교단의 암살단, <역병의 손아귀> 소속 암살자들을 발견했습니다!]
[<역병의 손아귀>는 이데르고 교단의 암살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들로서, 교단의 가장 위협적인 적들과 아키서스의 화신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데르고 교단의 성기사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데르고 교단의….]
카르바노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데르고 교단에서 나온 최정예 NPC들이 우르르 발견되었다.
“…….”
[카르바노그가 사실 굶주린 혼돈 때문이 아니라 이데르고 교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을 바꿉니다.]
‘그렇구나.’
불운 중 다행이게도 이데르고 교단에서 나온 NPC들도 전부 죽어 있었다.
1왕자의 호위 기사들이 만만찮게 강한 탓에 서로 싸우다가 공멸한 것이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저놈 아키서스 교황이다! 저놈 아키서스 교황이다!’하면서 살벌하게 덤벼들었을 것!
‘그러면 이데르고 교단이 1왕자를 습격하러 온 건가?’
[설득하거나 매수하려고 한 걸 수도 있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현재 이데르고 교단은 (언데드가 되어 돌아온) 필립 3세한테 공격받은 상태.
그런 교단 입장에서 1왕자와 손을 잡는 건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1왕자도 아쉬우면 누구든 손을 잡았을 텐데….
‘왜 안 잡았지?’
[굶주린 혼돈과 계약했는데 잡는 건 힘들지 않겠냐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계약하고 또 손을 잡으면 되지 않나?’
[그렇게 자유로운 건 아키서스 교단말고는 보통 없다고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도 좋고 사디크도 좋은 분이니 두 분 다 믿으면 되지 않나요? 같은 발상은 보통 다른 교단에서는 허가되지 않았다.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주제에 이데르고 교단과 손을 잡으려고 한다면 당장 굶주린 혼돈이 1왕자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었으리라.
‘그렇군. 그래서 이 난장판이….’
이데르고 교단이 찾아왔는데, 1왕자가 거절했고, 둘 중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싸움이 벌어졌고….
이렇게 입구부터 난장판이 될 정도라니. 정말 크게 싸웠던 게 분명했다.
“!”
생각에 잠겨 있던 태현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1왕자 목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안 되잖아?’
태현의 직업 퀘스트는 1왕자 목을 확보해야 했다.
만약 이데르고 교단이 이겼을 경우 태현의 퀘스트는 해결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더 불길한 건, 1왕자가 사라졌다고 알려진 점이었다.
만약 1왕자가 이데르고 교단 상대로 이겼다면 사라졌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큰일 났다!’
“다들 따라와라!”
태현의 외침에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의아해했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의아했는데, 김태현 눈에는 뭐 다른 게 보이나?
‘일단 상황 파악하기 전에는 기다려야 하지 않나?’
‘기사들도 그렇고 죽은 놈들 레벨이 꽤나 높아 보이는데… 위에 뭐가 있는지 알고.’
‘김태현이니까 파악 끝냈겠지.’
‘하긴 김태현은….’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별다른 대꾸 없이 따라가자 실베드는 황당해했다.
“잠깐. 지금 무슨 적이 있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나? 여기 이렇게 날뛴 거 보면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닌데….”
그러나 길드원들은 그냥 무시하고 달려갔다.
그 중 한 명은 실베드에게 구박했다.
“네가 아는 걸 김태현이 모르겠냐?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
할 말이 없어진 실베드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김태현 정도 되는 랭커가 그런 기본도 모르고 행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검은 바위단 길드원 놈들이 구박을 하는 게 기분 나쁘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김태현 덕분에 퀘스트 빨리 깨고 들어올 수 있었으니….
‘그래. 내가 참아야지.’
실베드도 뒤를 쫓아 빠르게 달려갔다.
* * *
[탑의 최상층에 도착했습니다!]
[<1왕자의 숙소>에 들어갈 경우 1왕자가 매우 분노할 수 있….]
[….]
[….]
화려한 문 앞에는 살아 있는 NPC가 없었다.
기사들과 이데르고 교단 NPC들 시체뿐!
그 모습에 태현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파아아앗!
[강력한 역병의 기운이 뿜어져 나옵니다!]
[강력한 혼돈의 기운이 뿜어져 나옵니다!]
[역병의 기운으로 인해 이데르고의 조각이 더욱 강한 힘을 내뿜습니다!]
[….]
드넓은 층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가운데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혼돈의 구체 하나만이 떠있을 뿐!
태현은 하늘성 최상층에 있는 <냉기의 핵>을 떠올렸다. 여기 있는 혼돈의 구체도 그 비슷한 게 분명했다.
‘1왕자 어디갔냐? 설마….’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혼돈의 구체가 갑자기 폭발하듯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를 중심으로 뻗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혼돈의 가시!
[<혼돈의 구체>가 파멸의 가시를 사용합니다!]
메시지창까지 뜨는 걸 보면 보통 스킬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황급히 움직이며 피했다.
“뭐하는 몬스터야 저거!?”
“1왕자 미친놈이 왜 탑에서 저런 걸 키워!?”
플레이어들은 기가 막혔다.
솔직히 태현의 뒤를 쫓아서 달릴 때만 해도 탑 최상층에 1왕자나, 1왕자가 없더라도 1왕자가 남긴 보물들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괴상한 공 하나만 있으니….
“방패로 막지 마라!”
탱커 한 명이 방패 들고 돌격하려다가 태현의 말에 깜짝 놀라서 멈췄다.
태현도 직감으로 외친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
[파멸의 가시에 접촉했습니다!]
[장비를 빼앗깁니다!]
“야!!!”
가시에 닿았다고 부츠를 그냥 뺏어가다니!!
사기적인 스킬에 길드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저런 놈이…!
“닿지 말고 원거리에서 스킬만 넣어!”
“데미지 들어가고 있는 거 맞아?!”
“김태현! 명령! 명령 내려!”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자신도 모르게 태현의 이름을 외쳤다.
원래 사람이 위기가 닥치면 가장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마련.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건 태현이었던 것이다.
‘…빠져나가야 할 거 같은데.’
사방이 소란스러웠지만 태현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1왕자를 노리고 온 거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뭘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뭐하는지도 모르는 놈.
일단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아 보였다.
“일단 뒤로 빠져나간다! <아키서스의 축복>!”
[아키서스의 축복이….]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 모두에게 강력한 행운이 부여되었다.
상대 공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태현이 줄 수 있는 버프 중에는 최상급!
그러나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혼돈의 구체>가 아키서스의 힘을 느끼고 경계합니다!]
[<혼돈의 구체>가 스스로의 힘을 모아 자폭합니다!]
“…아니, 잠ㄲ….”
파아아아아앗!
순간 번쩍하더니 <혼돈의 구체>가 폭발하며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전부 휩쓸기 시작했다.
[강력한 혼돈의 힘으로 인해 끌려갑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혼돈의 구체>가 아키서스의 권능을 느끼고 먼저 자폭부터 하리라고는!
* * *
번쩍!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태현 일행들, 그리고 진영을 빠져나온 플레이어들은 한가운데 있던 탑이 번쩍하더니 무너지기 시작하는 걸 목격했다.
“????”
“뭐야?”
마치 위에서부터 녹아내리듯이 사라진 탑!
그뿐만이 아니라 요새의 건물도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1왕자의 요새가 무너져 내립니다!]
[1왕자 세력의 명성이 크게 내려갑….]
[1왕자 세력의 힘이 크게….]
[….]
[….]
안 그래도 1왕자가 사라진 탓에 불리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요새까지 녹아내리자 충격으로 명성과 세력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1왕자의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에랑스 국왕, 필립 3세가 승리를 선포합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명성이….]
[….]
[….]
[….]
하도 많은 메시지창들이 나와서 다 확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얘 들어가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세연은 당황했다.
1왕자가 어디 갔는지 확인하러 들어가 놓고, 갑자기 요새를 통째로 날려버리다니.
퀘스트가 완료되긴 했는데….
-나 지금 이상한 곳 와 있다.
-…?!
마침 태현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이상한 곳이라니? 어디? 마계? 미발견 지역? 스크롤이나 마법 써서 빠져나올 수 있어?
-지금 써보니까 안 돼. 일단 주변 좀 둘러본 다음 다시 연락할게.
[필립 3세가 부활에 크나큰 도움이 된 당신들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필립 3세를 만나 보상을 받으십시오!]
[….]
* * *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1왕자의 요새를 무너뜨렸….]
[<혼돈의 구체>를 파괴하는데 성공….]
[명성이 미친듯이 크게 오릅니다!]
[신성이….]
[칭호, <혼돈 파괴자>를….]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태현에게 있어서 한 번에 5레벨이 올랐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1왕자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세력을 몰락시킨 것도 몰락시킨 것이지만, <혼돈의 구체>를 파괴하는 게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
…물론 딱히 태현이 파괴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갑자기 상대가 자폭해서 그렇지.
[카르바노그가 그것도 실력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자폭하는 건 심하지 않냐?’
심지어 태현은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아키서스 이름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어쨌든 최악은 면했다.
일단 대형 퀘스트 하나는 클리어했고, 태현도 죽지 않았으니까.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한 곳으로 오긴 했지만….
‘마계 같은 다른 차원으로 온 거 같지는 않은데. 카르바노그, 혹시 아는 곳이야?’
[카르바노그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 어디로 온 거지?”
“김태현. 여기가 어디야?”
옆에 있다가 재수 없게 같이 끌려온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과 실베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예전에도 잘못 걸려서 같이 마계 여행하지 않았나?
‘쟤네 때문에 온 거 아냐?’
[카르바노그가 아무리 그래도 저 모험가들에게 책임을 넘기는 건 좀 그렇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키서스 때문이지 저자들 때문은 아닌 것!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
놀랍게도 바닥에 이데르고 교단 NPC의 장비가 떨어져 있었다.
‘얘네들도 먼저 왔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