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90화
지금 중요한 건 진영 안을 확인하고 (가능하면) 플레이어들을 빼오는 거였다.
“1왕자 어디 갔는지 확인하는 것도 꽤 중요한데 말이야.”
“1왕자가 이대로 사라지면 어떻게 되지?”
“음….”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2왕자나 3왕자들이 있긴 한데 1왕자에 비하면 좀 존재감이 약한 놈들이었다.
지금도 언데드 국왕이 미친 존재감으로 귀족 NPC들을 끌어모으고 있는데 1왕자가 사라지면?
2왕자나 3왕자가 남아서 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망치거나 항복하려나?’
“어… 그러면 필립 3세가 다시 왕좌에 앉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사실 태현은 필립 3세가 다시 왕좌에 앉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일단 언데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필립 3세가 다시 왕좌에 앉아서 다스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설마 1왕자가 이대로 사라지겠어? 당연히 돌아오겠지.”
“안 돌아와서 필립 3세가 다스리면 에랑스 왕국 위험한 거 아닙니까?”
류태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국왕이 언데드면 그 나라 위험한 거 아닌가?
“꼭 그런 건 아니지. 아스비안 제국도 황제가 언데드였는데 잘 돌아갔잖아.”
“잘 돌아가진 않았지….”
옆에서 이세연이 중얼거렸다.
우이포아틀 때문에 랭커 몇 명이 고생했는지 기억 안 나니?
하지만 확실히 태현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국왕이 언데드라고 해서 딱히 왕국이 크게 달라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왕궁 퀘스트로 <시체 구해오시오> <흑마법사 구해오시오> <죽음의 힘이 담긴 보석을 구해오시오> 같은 게 뜰 수야 있겠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한테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아닌가.
‘앗. 잠깐만… 이거 나한테도 좋은 거 아닌가?’
이세연은 문득 생각했다.
새로 언데드로 태어난 필립 3세와 가장 친한 플레이어는?
→(그나마) 태현 일행.
새로 언데드로 태어난 필립 3세가 가장 좋아할 직업은?
→네크로맨서.
보통 네크로맨서는 어딜 가든 구박 좀 받는 게 국룰이었다.
-어서 오… 으악! 냄새 나는 네크로맨서잖아! 저리 가!
-악명만큼이나 무시무시하구나! 저리 꺼지지 못할까!
레벨과 상관없이 맨날 NPC만 보면 시비 털리는 이런 특성이 좀 짜증 날 때도 있었는데….
국왕이 언데드면 이런 게 바뀌지 않을까?
태현은 이세연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 왜 그렇게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어?”
“…사악한 표정 아니거든…! 어쨌든 이대로 왕자가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국왕하고 친하니까 앞으로 에랑스 왕국에서 여러모로 도움받을 수 있을 거고, 퀘스트 보상도 나올 거 아냐.”
국왕을 돕는 퀘스트도 만만치 않은 전설 퀘스트였다. 클리어하는 순간 보상이 어마어마하리라.
“나쁘진 않지.”
태현도 동의했다.
“그렇지만 난 1왕자의 목이 필요해.”
“왜?”
“직업 퀘스트라서….”
“…….”
“…….”
류다영과 이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신성 관련 직업일 텐데 왜 모가지 잘라가는 게 직업 퀘스트…?
* * *
태현은 데리고 온 부하들과 검은 바위단 같은 랭커들을 총동원해서 1왕자의 요새 정문을 강하게 타격….
하는 대신에 변장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난 베스고 백작의 아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 베스고 백작의 아들께서 오시다니!
[화술 스킬이 매우 높…]
[명성이…]
[베스고 백작에게 양자로 인정받…]
[……]
설득에 통과합니다!
-그러면 갔다 온다.
“…….”
“…….”
요새 근처 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전력 두고 안 싸워요?
“저, 저희 여기 있는데.”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솔직히 태현한테 억지로 끌려오긴 했지만, 또 사람 마음이란 게 대형 퀘스트 하다 보면 바뀌게 되어 있었다.
태현이 진행하는 퀘스트가 워낙 사람 가슴 웅장하게 만드는 게 있었던 것이다.
요새 올 때만 해도 ‘정말 어려운 퀘스트겠군. 각오를 다지자. 김태현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싸움 하나 없이 태현이 말 한 마디로 정문 열고 들어가 버린 것!
허무하다!
-어? 같이 가고 싶어?
태현이 의아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배려해 줘서 빼놨는데 왜 굳이?
-네! 가고 싶습니다!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어… 그래. 뭐 그러면야….
태현은 요새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새 출입이 허가되었습니다!]
“!”
“가자!”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달려갔다.
-잠깐.
“?”
병사들이 갑자기 가로막자 길드원들은 당황했다.
뭐지?
들킨 건가?
-하인들이 그렇게 건방지게 입고 다니면 안 된다. 윗사람들이 보면 혼이 날 수 있어요.
-자. 여기 이 <낡은 하인의 세트> 아이템을 받아라.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요새 안에서는 <낡은 하인의 세트>를 착용해야 합니다. 착용하지 않은 모습이 발각될 경우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
길드원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태현의 하인으로 위장하고 들어온 것!
‘아… 그래서….’
‘그래서 안 데리고 오려고 한 거구나…!’
-후.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하다니. 어울리지 않게.
-자네답지 않게 너무 상냥한 것 아닌가? 저 하인들이 감동해서 말도 못 하는 걸 보게!
* * *
안으로 들어왔지만 태현은 1왕자의 거처로 접근하지 못했다.
눈에 들어오는 다른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1왕자 좋다고 한 놈들을 매달자!”
“저놈이 1왕자 좋다고 한 놈입니다!”
“잘 걸렸다 이놈! 매달아라!”
한쪽에서는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다른 플레이어를 쫓아가고 있었고….
“탈출 경력 10년 전문가 랭커가 당신을 탈출시켜드립니다! 탈출 퀘스트 선착순 다섯 명! 무조건 선금만 받습니다!”
“어, 판온 생긴 지 10년이 안 되지 않았…?”
“판온 1부터 따진 거야!”
그리고 한쪽에서는 수상쩍은 복장을 한 플레이어가 다른 사람들 상대로 이상한 퀘스트 장사를 하고 있었으며….
“요새 안의 상점보다 무조건 10% 싸게 팔고, 10% 비싸게 사드립니다. 각종 물약, 스크롤, 장비, 잡템 등 다 삽니다!”
“어… 못 보던 사람인데 언제 들어온 거지?”
“장사하려고 1왕자 세력에 가입했습니다.”
“…미친 거 아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목숨 걸고 아이템을 사 모으고 있었다.
혼란 그 자체!
“자. 모두들 일단 진정해라.”
“?”
“네가 누군데?”
“내가 누구 명령 들을 사람으로 보이냐?”
바로 돌아오는 날 선 반응들!
플레이어들의 신경은 매우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몇 번 속고 탈출에 실패한 탓에 누가 말해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
태현은 가면을 벗고 원래 장비를 꺼냈다.
“…….”
“…아! 김태현 님이셨습니까!”
“사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는 누구 명령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1초 만에 바로 반응 바꾸는 플레이어들!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감탄했다.
보통 저렇게 고렙쯤 되면 자존심이 있어서 쉽게 돌변하기 어려웠는데, 태현 앞에서는 사람들이 그 자존심을 쉽게 집어던졌다.
죽는 것보단 자존심 좀 구겨지는 게 낫지!
“모두 진정하고 모여라.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 탈출시켜주려고 온 거니까.”
“…!!!”
태현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태현이 국왕 밑에서 퀘스트를 하고 있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들을 구해주러 왔다고?
“…왜??”
“대체 왜?”
“뭐야. 필요 없었나? 그럼 비켜. 다음 필요 있는 놈?”
“아니야! 아니야!”
“필요 있어! 필요 있습니다! 필요 있어요!”
플레이어들은 호다닥 달려들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도와준다는데 거절하는 게 미친놈이지!
“김태현! 김태현! 판온 1에서부터 인성으로 소문난 플레이어!”
“야. 그건 욕이야…!”
옆에서 친구가 아부하는 말에 깜짝 놀란 판온 1 출신 플레이어가 다급하게 말렸다.
판온 2 뉴비들은 잘 몰랐지만, 태현에게 붙은 ‘판온 1에서부터 인성으로 소문난 플레이어’는 보통 칭찬이 아니라 욕으로 쓰였던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 김태현이니까 판온 1부터 정말 인성 좋기로 소문났나 보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태현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요새에 퍼져 있던 플레이어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탈출하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폭탄이죠?”
“아니….”
“당연히 폭탄이겠지.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냐?”
질문한 플레이어한테 구박이 쏟아졌다.
“아마 저 요새 벽에 구멍을 내겠지.”
“아니. 요새 벽을 통째로 날려 버릴걸.”
“너희들은 어떻게 스케일이 그렇게 작냐? 요새를 통째로 날려 버리겠지.”
“…그냥 내 하인으로 위장한 다음 요새 성문 빠져나가면 된다.”
“…?!?!”
플레이어들의 상상과 달리 태현은 간단한 방법을 선호했다.
그냥 플레이어들 데리고 성문 왔다갔다만 하면 되는데 굳이 폭탄으로 사방에서 어그로를 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 안 터뜨려요?”
“성문을 터뜨리는 건가?”
“조용히 하고 주사위 굴려서 순서나 매겨라. 탈출시켜줄 테니까.”
태현은 빨리 플레이어들을 내보낸 다음 1왕자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놈들은 빨리 치워버려야 한다!
* * *
-진짜 구해주러 온 거라고?
-저거 김태현 아닌 거 같은데??
└네가 뭘 안다고 나불대?
└└김태현이 누군지도 모르는 뉴비 같은데 ㅉㅉ
-내… 내가 김태현을 모른다고? 내가 판온 1에서 김태현한테 직접 맞아 본 사람인데…!
요새 안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태현의 등장에 수군거렸다.
처음에는 왜 왔나 의아해했지만, 보다 보니 정말 구해주러 온 것이 맞았다.
“비켜, 이 자식들아! 내가 먼저 나갈 거야!”
“주사위 굴려서 순서 뽑으랬잖아!”
“조용히 하지 못해?”
딱히 어려울 거 하나 없는 퀘스트였지만 언제나 사람이 문제였다.
태현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 데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탈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먼저 탈출하는 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계속 다투자 기다리다 지겨워진 태현이 입을 열었다.
“주사위 결과 나왔잖아? 그 순서대로 하라니까.”
“김태현. 이딴 저렙들보다 내가 먼저 나가야 한다.”
“…넌 뭐 얼굴에 철판 깔았냐?”
태현은 웬 뻔뻔한 개소리에 당황했다. 뭘 믿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미쳤나?
“내가 너 안 데리고 가면 그만인데 뭔 억지야?”
하지만 상대도 역시 믿는 게 있었다.
“김태현. 잘 들어라. 내가 먼저 나가지 못하면 저기 NPC들한테 일러바칠 거다. 아무도 못 나가고 싶진 않겠지?”
“…!”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치를 떨었다.
아니 저런 치사한 새끼를 보았나!
자기가 먼저 나가지 못한다면 판을 엎겠다니.
“태현 님.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그냥 앞에 가라고 해요.”
“저도 양보하겠습니다.”
주사위 눈 높게 나온 플레이어들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제야 진상을 부린 플레이어는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해결됐다. 자. 김태현. 출발….”
푹푹푹푹푹!
태현은 검을 들어 버프 최대로 건 다음 플레이어를 닥치는 대로 찔러버렸다.
[치명타가 터졌…!]
[……]
[……]
[플레이어가 로그아웃…]
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집어넣고 주변을 보며 말했다.
“또 진상 피울 놈 있으면 지금 나와라.”
“…!!”
선량하게 구하러 오긴 했어도 김태현은 김태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