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88화
뛰어난 선수들은 몇 가지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으면 대충 70, 80%는 이겼다’ 싶은 전략!
그리고 태현 같은 경우는 그게 바로 이런 1:1 상황이었다.
뒤에 따로 떨어져 있는데 쌩쌩한 태현과 1:1로 대면해서 살아나갈 수 있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망했다…!’
뒤의 망루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플레이어는 울고 싶었다.
태현이 이렇게 멋대로 파고들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데, 저 오크 놈들 등장으로 그게 다 꼬여 버린 것이다.
“김태현…!”
“?”
상대의 눈빛이 불타오르자 태현은 살짝 의아해했다.
보통 저런 눈빛을 갖고 있는 선수는 약하지 않았다.
무언가 노리고 있다!
“쫓아오지 마라!”
타타탓!
“…….”
바로 도망치는 그 모습에 태현은 황당했지만, 몸은 곧바로 반응했다.
거기 서라!
-레어오니 선수, 뒤로 물러섭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일단 안 잡히는 게 중요합니다. 한 번 잡히면 잃는 게 너무 많아지죠!
한 번 죽으면 부활해서 돌아올 때까지 팀원들이 힘들어지는 건 물론이고 잡은 상대에게 버프가 들어갔다.
태현 같은 플레이어한테 버프 들어가는 건 호랑이한테 날개 달아주는 수준!
“으아악! 쫓아오지 마! 쫓아오지 말라고!”
[웅혼의 저주 토템이 발동합니다.]
[약멸의 저주 토템이 발동합니다.]
일본 팀에게 행운인 점은, 첫 시즌 동안 태현의 플레이를 넘치도록 봐왔다는 점이었다.
태현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만 상대는 태현을 어떻게 상대할지 머릿속으로 수천 번은 그리고 온 것!
…그럼에도 이 꼴이 났지만….
[저주가 발동됩니다. 일시적으로 이동 속도가 내려갑니다!]
[저주가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시야가…]
‘아. 갑옷 그립군.’
약한 저주는 다 무시하던 때가 그리웠다. 태현은 투덜거리며 내달렸다.
아마 상대 팀의 주술사가, 태현 일행이 오기 전에 이 근처에 토템을 잔뜩 깔아 놓은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데미지는 플레이어를 잡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귀찮고 성가시게 만들거나 다치게 만들 정도는 충분했다.
한 마디로 태현이 들어왔을 때 시간을 끌고 다치게 만들어서 물러서게 만들려는 의도!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니까!”
‘직업이 달리기 선수인가?’
쫓던 태현은 황당했다.
아무리 봐도 탱커 계열 직업인데, 이동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각종 이동 스킬들을 써가며 쭉쭉 도망치는 상대!
-고대 제국의 저주, 냉기의 저주, 이데르고의 역병 안개!
태현은 갖고 있는 마법들을 써가며 상대를 공격했다.
여기서 더 확실하게 때리려면 권능이나 언령 마법을 쓸 수 있겠지만….
‘언령 마법은 MP 소모가 너무 크니까 아껴둬야겠군.’
히든 카드, 언령 마법은 제한 걸리는 투기장에서는 더욱더 사용이 까다로워졌다.
화려한 접근전 컨트롤 때문에 잊기 쉬웠지만 태현의 MP는 절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태현이 언제나 완벽하게 계산하면서 MP 소모 적은 스킬들 위주로 싸워서 그렇지, 강한 마법들 쓰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윽! 큭! 크아악! 크으윽!”
상대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근성 있게 내달렸다.
한 십 초 정도도 안 지났는데 기분으로는 한 시간 넘게 도망친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태현은 거리를 좁히면서 쫓아오는 중!
“탱커면서 뭐 이리 도망을 잘 쳐? 거기 좀 서봐!”
뒤에서 태현의 외침이 들려왔다.
-난 이번 경기에서 목적이 있어.
-뭔데?
-김태현이 날 기억하게 할 거야. 인터뷰에서 최소한 내 이름을 말하게 할 거라고.
-…김태현이 네 이름 말하게 하려면 니가 경기 도중에 김태현 부모님 욕하는 정도의 개매너 짓거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동료들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태현은 그를 인상 깊게 여기고 있었다!
…그 방법이 좀 추잡하기는 했지만!
* * *
싸움은 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오크들과 플레이어들의 싸움.
하나는 플레이어들과 플레이어들의 싸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태현과 레어오니의 쫓고 쫓기는 도주극!
전부 다 치열하고 살벌했지만 마지막만큼 흥미진진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와 김태현이 학살쇼 뭔가 보여주나 보다’ 하던 팬들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매우 놀라워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런 전술이?
-왜 이런 전술을 아무도 안 썼지?
-야 지금 1분도 못 튀었는데 저걸 어떻게 써. 다른 팀들이 바보라고 안 쓰냐? 도망쳐도 될 정도로 만만치 않다고.
도망치는 걸로 버틸 만큼 투기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레어오니의 플레이는 놀라웠다.
딱 봐도 무겁게 입고 나와서 탱커인 줄 알았는데 엄청 빨라!
정말 대놓고 준비한 게 보일 정도였다.
-근데 레어오니 왜 본진으로 안 돌아오냐? 팀한테 합류해야지 자꾸 옆으로 도네.
-죽더라도 혼자 죽겠다는 마음인가?
-…?
-그게 아니야. 멍청이들아. 해설 나오잖아.
해설자들이 그 의문을 곧 친절하게 풀어주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김태현 선수가 뒤에서 쫓고 있지만 동시에 각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도 레어오니 선수가 틀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달려 나갑니다!
태현은 절묘하게 방향을 잡고 쫓아가고 있었다.
상대가 팀원들 사이로 도망치려고 하면 바로 부딪힌다!
-쫓습니다, 김태현 선수 토템 파괴하고 따라붙습니다, 아, 레어오니 선수 아직도 스킬이 남아 있었나요? 또 탈출합니다! 정말 잘 탈출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혹시 술래잡기인가요?
최대의 대회에서 일어나는 웃기는 상황!
분명 도망치는 레어오니는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피하고 있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좀 웃겼다.
진행자들도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냥 권능 쓸까?’
태현은 아키서스의 저주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 쓰고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상대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하긴 월드컵에 나올 정도면 다들 필사적으로 준비했겠지. 내가 너무 얕본 걸지도 모르겠군.’
상대가 자기보다 약하더라도 순순히 잡혀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태현은 아키서스의 저주를 걸어서 발을 묶은 다음 확실하게 잡을 준비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잡고 돌아간다!
[오크 정예 전사들이 나타납니다!!]
“!!”
달리던 레어오니는 앞에서 나타나는 오크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저쪽만 아니라 여기에도 있는 오크들!
퍼퍼퍽!
몇 대 맞으면서도 레어오니는 살짝 기대했다.
이 오크들이 태현도 공격해 준다면 발이 묶이지 않을까?
[오크들이 일시적으로 두려움에 질립니다!]
[오크들이 공격하지 않습니다!]
“…왜 도망치냐!?!?”
레어오니는 도망치는 오크들을 보며 당황해서 외쳤다.
무슨 ‘우린 할 일 다 했으니 퇴장할게!’ 하고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되면 레어오니만 발 묶이고 맞은 셈 아닌가.
“드디어 잡았다.”
-치명타 폭발!
콰아앙!
레어오니가 든 방패 사이로 치명타가 찔러 오면서 데미지가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행운의 일격과 각종 검술 스킬로 만들어진 딜 사이클은, HP 많은 탱커도 잘못 걸리면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전사의 뜨거운 심장, 되살아 오르는 피, 튕겨 나가는 공격, 아키서스의 중급 축복…!
레어오니는 방패를 들고 허겁지겁 버티기를 시전했다.
‘희망은 있다! 김태현도 달려오면서 토템에 많이 맞았어. 버티다 보면 먼저 물러설 수도 있다!’
퍼퍼퍽, 퍼퍽, 퍼퍽!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전사의 뜨거운 심장>으로 인해 스턴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되살아 오르는 피>가 HP를…]
드디어 부딪힌 두 선수의 충돌에 해설자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부딪혔습니다! 처음으로! 김태현 선수와 레어오니 선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건 아니지 않나…?’
옆에 있던 다른 해설자는 순간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김태현이 잡냐, 못 잡냐의 문제였지 팽팽한 싸움은 아니었던 것이다.
보라!
레어오니 선수는 아예 공격을 포기한 듯이, 방패로 공격을 최대한 막아내며 버티고 있었다.
-레어오니 선수가 저렇게 막아낼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나요?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마 김태현 선수의 공격 패턴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것 같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스킬 몇 개는 미리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놀랍습니다!
태현은 몰랐지만,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전부 다 태현의 플레이를 달달 익혀서 온 상태였다.
정말 집요할 정도!
-김태현 선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실, 딜러 입장에서는 이게 치명적입니다. 원래라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어야 하는데 끝내지 못하면 멘탈이 흔들리고 스트레스가 쌓이거든요.
-리그에서 최고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되는 왕관의 무게! 김태현 선수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지….
그런 멘탈적 부분은 태현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들고 있던 검이 [갑작스러운 불운으로 부러졌습니다!] 하고 뚝 끊어지고, 잘 쓰던 스킬들이 [갑작스러운 불운으로 실패했습니다!]가 떠도 태현은 바로 다음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이제까지 수천 번, 수만 번도 넘게 그래왔으니까.
태현이 진화하듯이 상대도 진화했다. 그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99.9% 확률로 성공하는 아이템이 0.1% 확률로 실패하는 걸 받아들여야 하듯이!
‘날로 먹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예전에는 상대 앞에 붙으면 수십 번의 공격을 연속으로 쑤셔 넣고 샌드백처럼 패서 잡아버릴 수 있었다.
정말 순식간!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태현의 패턴을 달달 익혀 온 덕분에 몇 번 막히고 턱턱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콤보가 잠깐 끊기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자기 스킬을 쓰고 버틸 시간을 버는 것이다.
태현을 상대로 그 정도면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못 잡는 건 아니지!’
순간 태현의 움직임이 변했다. 눈빛이 살벌하게 빛나더니 갑자기 공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
레어오니는 순식간에 줄어드는 HP에 경악했다.
분명히 똑같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들어오는 데미지가 갑자기 훅 뛰었다.
‘스킬도 안 썼는데?!’
특별한 스킬도 없이 그냥 공격만 하고 있는데도 데미지가 갑자기 많이 들어온다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김… 김태현 선수! 놀랍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밀어붙입니다! 지금 스킬 안 썼죠?
-MP를 아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레어오니 선수가 실수를 한 건가요?
아니었다.
레어오니가 실수를 한 게 아니라, 태현이 싸우면서 레어오니의 패턴을 파악한 것이다.
그 다음은 상대의 빈틈을 집요하게 노렸다.
방패 휘두를 때 드러나는 빈틈, 스킬 쓸 때 잠깐씩 들리는 방패….
레어오니가 자기한테 약점이 있다고 깨닫는다면 그 부분을 체크하겠지만 태현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끝이군.’
한 번 흔들었을 뿐인데 상대는 패닉에 빠져버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데미지가 들어오는 거지?!’
태현은 아까 만들었던 간이 폭탄을 꺼내 던졌다.
간단한 아이템 하나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패턴은 또 다양해졌다.
혼란에 빠진 상대가 그걸 막는 건 무리였다.
콰아아앙!
[상대를 쓰러뜨렸습니다!]
[<세계수의 축복> 버프가 걸립니다.]
[……]
-잡았습니다! 잡았습니다, 김태현 선수! 빠르게 침투해서 한 명을 잘라내는 데 성공합니다!
-수많은 선수들이 김태현 선수를 쓰러뜨리겠다고 공언했지만 과연 그런 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실로 완벽한 플레이였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빨리 물러서야 합니다! 김태현 선수까지 합류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전멸은 피해야 해요!!
태현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일본 팬들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뒤로 빠져! 뒤로 빠져!!!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