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86화
놀랍게도 사람들의 생각은 다 비슷했다.
첫 번째 미션이 끝나가자 심사위원들 여럿이 동시에 생각을 한 것이다.
일단 태현은 보는 눈이 확실했다.
뛰어난 선수는 뛰어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건 태현한테 통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첫 시즌 때 팀 KL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간 것은 태현 아니었던가.
물론 지휘나 전술이 아닌, 태현 혼자서 다 쓸어버린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긴 했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 정도는 그런 생각을 하긴 했고.
하지만 이렇게 태현이 말하는 걸 보니 확신이 갔다.
김태현은 보는 눈도 있다는 것을!
만약 태현이 선수 선발에 별 욕심이 없다면, 미리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태현의 판단력을 빌림과 동시에 미션 선택할 때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홍보할 때도 태현의 명성이 있으니 훨씬 더 좋을 것이고….
‘할 만한데?’
“저. 김태현 선수.”
“?”
“혹시 게임단을 홍보하거나 선수를 뽑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어, 무슨 소립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저를 좀 도와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게 뭐 도와줄 게 있는지 의아한데…?
태현은 의아해했다.
이게 뭔 퀘스트나 서바이벌이면 이해라도 가지, 왜 심사위원이 다른 심사위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후후. 방법이야 다양하지요. 일단 김태현 선수가 그 뛰어난 눈으로 선수를 골라서 저한테 말해주시기만 해도 꽤나 도움이 될 겁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말이 됐다.
“그리고 미션 고를 때 서로 힘을 합치면 확률이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선수들을 평가할 때도 아무래도 둘이 입을 맞추면 좀 더 유리하겠죠. 남들이 저평가한 선수를 골라서 대박을 터뜨리면,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 평가는 하늘을 찌를 겁니다.”
태현은 정말 여기서 가장 속 편하게 앉아 있는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게임단을 대표하거나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
“도와주면 전 뭘 받습니까?”
“가능한 무엇이든지!”
태현이 물어보자 상대는 신이 났다. 일단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어딘가.
“판온 안이나 판온 밖이나 저희 게임단 시설을 전부 쓰셔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게임단 창고 쪽에 있는 아이템, 장비 등 중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김태현 선수 퀘스트에 필요하다면 저희 후보 선수들을 동원해서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오….”
생각보다 푸짐한 선물세트에 태현은 놀랐다.
하지만 따져보니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오사카 드래곤즈였던 것이다.
리그에서도 약팀으로 꼽히는 팀!
“일단 판온 밖 시설은 일본에 있는데 제가 거기 갈 일이 없으니 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판온 안 시설이 있….”
“판온 안 시설은 저도 왕국이 있어서….”
구로다는 시무룩해졌다.
오사카 드래곤즈도 나름 이것저것 길드 하우스나 훈련할 만한 던전을 갖고 있긴 했지만, 태현은 아예 왕국 통째로 갖고 있었다.
판온에서 저 스케일 따라갈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음,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까 싶습니다만….”
“실례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오사카 드래곤즈> 투자도 별로 못 받고 해서 창고에 갖고 있는 아이템이나 장비 질이 다른 게임단에 비해 밀린다던데….”
“…실례잖습니까!”
사실로 때리자 울컥한 구로다가 외쳤다.
물론 저 말이 다 사실이긴 하지만 저걸 대놓고 들으니 매우 분했다.
“저희가 성적도 낮고 관심도 못 받는 편이라 지원도 못 따오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습니까!”
“미, 미안합니다.”
태현은 드물게 사과했다.
약팀의 기획팀장이 저러니까 사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쓸 만한 건 제 퀘스트 도와주는 것 정도인데….”
구로다는 움찔했다.
사실 저것도 태현한테만 이득인 건 아니었다.
태현이 진행하는 퀘스트들은 영웅 등급, 전설 등급 등 심상찮은 난이도의 희귀 퀘스트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퀘스트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서로에게 윈윈!
…물론 구로다는 태현이 사람을 어떻게 부려먹는지 잘 몰랐다.
“…그것도 뭐 다른 사람들 못 부르는 건 아니니까….”
“크흑… 약한 게임단은 김태현 선수도 섭외 못 하다니. 너무 서럽습니다.”
“아니. 강한 게임단이라고 섭외 가능한 건 아니니까 그러지 마시죠.”
구로다가 말을 거는 동안 다른 심사위원들은 눈빛을 번쩍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면 자기도 말을 걸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오사카 드래곤즈가 제안할 정도면 우리 제안은 훨씬 더 괜찮을 테니….’
‘오사카 드래곤즈가 먼저 나서줘서 다행이군. 그 뒤에 가면 우리가 돋보이겠어.’
다들 구로다가 들었다면 울컥해서 멱살 잡았을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어어어어! 클리어! 클리어한 선수가 나왔습니다!”
“!”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돌렸다. 태현을 노려보느라 화면에서 잠깐 시선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어, 저 선수는 누굽니까?”
“그러게?”
심사위원들은 수군거렸다.
치열한 예선을 뚫고 올라왔다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서 전부 이름을 다 기억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저 플레이어는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누구지?
“<오크아님> 선수! 대단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선수들 중 가장 먼저 통과합니다!”
이름이 오크아님인 것에 비해 종족은 오크였다.
심사위원들은 방송이나 게시판에서 본 적 있는 선수인가 싶어 찾아봤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명인가?
“진짜 누구지?”
“그러게 말입니다. 도저히 모르겠는데….”
심사위원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몇 명의 선수들이 더 통과하기 시작했다.
오크아님 선수가 앞에서 통과한 덕분에 난이도가 내려간 것이다.
뒤를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
생각보다 클리어한 사람이 여럿 나오자 태현도 신기해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이 모여서 시도하니 뭔가 되긴 되는군.’
안 될 줄 알았는데!
[많은 모험가들이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의 1층을 통과했습니다.]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이 한층 더 깨어납니다!]
[고대 제국 관련 NPC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을 부활시킨 사람으로서 숨겨진 시련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에 태현은 눈을 크게 떴다.
남의 대회 미션으로 이렇게 이득을 볼 수 있었다니.
‘…잠깐. 다음 미션에는 1왕자 사냥 같은 거 넣어봐?’
생각보다 이 대회, 건질 게 많다!
* * *
모든 나라의 팬들은 자기 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우승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냉정한 법.
입으로는 ‘목표는 우승!’이라고 해도 머리로는 현실적인 수준의 목표를 따로 잡기 마련이었다.
“최소한 4강, 아니 8강까지는 가야 하지 않을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16강만 가자!”
실력도 실력이지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운도 필요했다.
하물며 1차 본선부터는 32개 국가에서 나온 팀들이 4개씩 한 조로 묶여 치열하게 싸운 다음, 각 조에서 상위 두 팀만 위로 진출하는 것이다.
이 때 어느 나라와 만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렸다.
말이 32개였지, 나라마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제발 한국은 안 돼. 제발 한국은 안 돼.
-한국은 중국이랑 같은 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시아잖아.
└양심 없냐? 꼭 너희 나라랑 같은 조 해라.
시간이 되자, 판온 운영진은 각 나라의 대표팀 멤버를 실시간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별 관심 못 받는 나라 라인업은 다들 조용했지만, 한국 대표팀 멤버 발표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김태현에 이세연에 류태수에 이다비에… 미친 거 아니냐?? 저걸 어떻게 이기라고?
-진짜 내가 다 감격스럽다… 예전 한국대표팀 떠올라서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무리 월드컵이라지만 밸런스는 좀 맞춰야 하지 않나? 한국 선수들은 좀 찢어서 다른 나라에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봐.
└넌 월드컵이 뭔지 모르냐?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네. 한국 팀이랑 같은 조 들어가는 나라는 죽음이야.
-지옥의 조…!
보통 한국, 미국, 중국, 유럽 쪽 팀들은 강팀으로 꼽혔다.
한국은 한때 E스포츠 종주국이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미국이나 중국한테 밀렸지만, 판온에서는 화려하게 부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팀들과 같은 조로 묶인다는 건 지옥이었다.
4개 팀이 한 조 안에서 싸워 2팀만 올라가니 나머지 2팀은 확실히 탈락하는 것 아닌가.
-A조. A조 발표합니다… 한국. 한국.
└!!!!
└└시작부터 한국이냐???
└└└제발 신이시여, A조 안 걸리게 해주세요. 중국 놈들 들어가게 해주세요.
└└└└미국 놈들이 A조 들어가게 해주세요.
수많은 나라 팬들이 자기네 나라 말로 시끄럽게 싸워댔다.
그 순간 다음 나라가 나왔다.
-…중국. 중국.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중국을 제외한 수많은 나라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린 살았다!
우린 안 걸렸다!!
-아직 안 끝났어, 개자식들아! 너희 나라도 A조로 오게 될 거다. A조로 오면 확정 탈락이나 마찬가지야!
중국 팬들은 매우 빡쳤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왜냐하면 4팀 중 2팀은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
1차 본선에서는 한국 팀한테 지더라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조에서 2등만 차지하면 됐다.
-캐나다. 캐나다.
└아….
└└아아….
└└└캐나다는… 끝났네….
└└└└캐나다 무시하지 마라. 나름 잘하는 선수들 있다.
└└└└└저 라인업에 비하면 허접 그 자체지 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식했다. 심지어 캐나다 팬들도 절망해서 울 정도였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쪽 대표팀도 어마어마한 저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일본.
이걸로 A조의 편성이 끝났다.
한국, 중국, 캐나다, 일본.
-동아시아 조네?
-이건 뭐 거의 답이 나왔는데.
-한국, 중국이 16강 가겠네.
-캐나다나 일본은 너무 선수 풀도 좁고 약체라….
-한국이랑 같은 조 됐다고 놀린 놈들 다 어디 갔냐? 흥. 16강은 쉽게 가겠군.
중국 팬들은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한국 대표팀과 같이 묶였을 때는 절망스러웠는데, 나머지 두 팀을 보니 갑자기 다시 기운이 돌아온 것이다.
-캐나다가 중국 이기고 올라갈 가능성은 없습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어디 1부 리그에 게임단도 없는 허접한 나라가.
└└더럽게 잘난척하네.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안 떨어지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게다가 16강으로 올라가면 한국과 바로 안 만나니 차라리 전화위복이군!
다음 조가 발표되는 동안, 운 좋게 걸린 나라 팬들은 남들 앞에서 신나게 잘난 척을 해댔다.
중국 쪽이 대표적인 예시!
16강 확보는 기정사실인 데다가 올라가도 한국 대표팀은 나중에 만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게 걸린 나라 쪽 팬들은 이를 갈며 저주할 뿐이었다.
-꼭 실수해서 1차에서 탈락해라.
-선수들 출전하기 전에 PK당해서 출전 못해라.
-캐나다! 지지 마라! 판온에 절대란 건 없으니까!
-일본은 왜 응원 안 해?
-너무 약해서… 차라리 캐나다가 가능성 있을 듯.
-캐나다는 1부에 팀이 없어도 다른 게임단에서 뛰는 캐나다 선수 모으면 그래도 뭐라도 좀 나오잖아. 일본은 그런 선수들도 없고.
-일본은 1부에 팀 있는데.
-…어? 그래?
-오사카 드래곤즈 있다고…!
-헉. 오사카 드래곤즈가 일본 팀이었어? 중국 팀인 줄.
다른 나라 팬들의 반응에 일본 팬들은 매우 서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