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85화
감독은 감탄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것도 계산한 거라면 김태현 선수는 정말 대단합니다.”
“예? 뭐가요?”
케인은 울컥했다.
노드란체의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은 케인도 잘 알고 있었다.
케인이 이 섬의 영주였으니까!
이 섬이 갖고 있는 (그나마)의 명물이었고, 사실 이 섬에 새로 찾아오는 플레이어들은 저 탑을 깨러 오는 사람들이 70, 80%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진지하게 깨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보통 방송용으로 찍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내가 해봤자 개망신만 당할 텐데…!’
김태현 아니면 솔직히 개망신 안 당할 사람이 드물었다.
-자! 팀 KL의 영원한 방벽! 세계 최고의 탱커! 케인 선수가 시범을 보여주겠습니다!
-오오오…! 케인 선수가 시범을 보여준다니! 너무 멋있습니다!
-정말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다들 잔뜩 기대할 텐데….
-케인 선수! 떨어집니다! 죽습니다! 함정을 밟습니다! 아니, 아까 밟은 함정을 또 밟다니,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죠? 웃기려고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우우우우!
-케인 선수 믿었는데!
-내 롤모델이었는데!
자리에 모인 선수 지망생들한테 엄청난 치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근데 대단하다고?
“알다시피 이번 중국 쪽에서 주최하는 <판온 올스타 슈퍼 플레이어>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프로그램이잖습니까?”
중국 쪽 투자자들이 거액을 던져 넣은 만큼, 중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광고를 때리고 영상을 틀어대고 있었다.
괜히 미국이나 유럽 쪽 게임단 관련자들까지 참석한 게 아닌 것!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에 팀 KL 선수를 넣을 기회를 만들어냈다.
천만금을 줘도 얻을 수 없는 기회를 쉽게 만들어 낸 것이다.
“저보다 어리지만, 김태현 선수를 볼 때마다 존경하게 됩니다. 저렇게 혼자 게임단을 만들고 꾸려가고 한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감독은 말하면서 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선수까지 케어하면서….’
“…그런데 방금 왜 저를 힐끗 쳐다보셨…?”
“착각 아닐까요?”
“어쨌든 이런 기회 정말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기회를 살려야 기회죠! 그거 난이도 미친 듯이 빡세다고요! 나가봤자 망신만 당할 텐데!”
“음. 그건 생각지 못했습니다.”
“…감독님….”
“뭐 제 일 아닌데 케인 선수가 알아서 잘 하셔야… 그리고 꼭 잘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나가서 망가지는 것도 방법 중 하나고….”
“감독님!?”
감독은 프로답게 냉정했다.
모두 다 멋진 역할, 활약하는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라면 웃기는 역할, 망가지는 역할이라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수두룩 할 것이다.
감사하면서 해야지!
“…제가 하겠다고 안 했는데….”
“기회 오면 하는 거죠.”
* * *
‘김태현 선수가 넣은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김태현이….’
‘역시 김태현밖에 없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은 노드란체와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 설명을 듣고 나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90% 태현이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넣을 사람이 태현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와 관련이 있는 게임단 쪽 훈련장을 골랐을 테니….
“여러분. 이 1차 미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넣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좀 실패한 선택 같습니다. 모름지기 전투가 있어야 판단하기 좋은데. 몬스터도 안 나오는 던전이라니.”
보스턴 타이거즈 전 수석코치, 에임스가 시작을 열었다.
과연 코치 출신답게 깐깐하고 까다로운 성격!
그 말에 매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임스는 그걸 보고 ‘훗. 역시 매킨리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나’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꼭 몬스터가 있고 싸움이 있어야 판단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오히려 이런 참신한 던전을 과감하게 꺼냈다는 것 자체가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넣은 게 누군지는 몰라도 참으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닐지….”
매킨리는 ‘헛흠헛흠’ 기침을 하면서 태현에게 슬쩍슬쩍 눈빛을 보냈다.
거의 구애 수준의 눈빛!
이건 순수한 방송이 아니었다.
각 게임단들이 자신들을 홍보하는 마케팅의 장이었고, 치열한 경쟁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기회가 있다면 태현의 호감을 사둬야 한다!
뒤통수를 맞은 에임스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매… 매킨리 이놈. 그러면 왜 뉴욕 라이온즈에서는 이런 훈련을 안 시키는데?”
“이제까지 안 시켰다는 게 너무 분할 뿐. 오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에임스가 매킨리의 멱살을 잡으려고 달려들자 매킨리가 스킬을 써서 피했다.
두 중년의 투닥거림에 진행자는 감탄했다.
이야, 알아서 이슈를 만들어주다니!
매킨리의 말을 듣고 눈치를 챈 다른 심사위원들도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확실히 이 선택에는 품격이 있….”
“누가 골랐는지 칭찬을 해주고 싶….”
“…….”
졸지에 혼자만 반대의견 낸 에임스는 시무룩해졌다.
나쁜 새끼들…!
워낙 불쌍해 보여서 옆에 있던 태현이 위로해 줬다.
“에임스 씨. 저는 의견 존중합니다. 전투나 몬스터가 있는 것도 좋죠.”
“김태현 선수…!”
에임스는 울컥했다.
이것이 초일류 선수의 품격인가!
“에임스. 사실 나도 네 의견을 존중했….”
“입 닥쳐라.”
* * *
“…….”
“…….”
미션이 시작되자 심사위원들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묵직하고 근엄한 표정!
하지만 속으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젠장. 웃기잖아…!’
‘오기 전에 영상 봤는데도 웃기군!’
‘웃긴 걸 떠나서 큰일이다. 평가하기가 힘들어.’
심사위원들은 플레이어들이 훈련용 탑 1층에서 버둥대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몬스터도, 싸움도 없다.
있는 건 빠르게 날아오는 장애물과 변화하는 지형지물뿐!
플레이어들은 맨몸 하나로 저걸 피하고 튕겨내고 막아내고 뚫어내야 했다.
재밌고 흥미롭긴 했는데….
‘음. 이걸 어떻게 평가해야 하지?’
“시베르 선수는 반응이 괜찮군. 지금 옆에서 날아오는 말뚝을 그대로 타고 오른 다음 위를 붙잡아 넘어갔지 않나.”
‘아하. 저렇게 하는 건가.’
‘확실히 저런 식으로 하면….’
스킬은 못 보더라도 저런 식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주목하면서 컨트롤 칭찬을 하면 될 것 같다!
“시베르 선수가 지금 가장 앞에 있는 걸 보니 잘 할 것 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베르 선수는 말뚝에 부딪혀서 추락했다.
-으아아아아아!
탈락!
“…….”
“…….”
민망해진 심사위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진행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심사위원들을 쳐다보았다.
‘뭐하는 거야 이 사람들?’
어느 선수가 탐나고 어느 선수가 재능이 있는지 신나게 떠들어야 할 것 아닌가.
딱히 들어오는 사람 없으면 중국 쪽 선수 후보나 좀 띄워주지….
“여러분. 말씀을 해주셔야죠?”
“흠흠. 플레이에 집중을 하다 보니… 미션이 끝난 다음에 한 번에 말하려고….”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하는데 진지하게 답을 해줘야….”
‘이 인간들이 비싼 돈 받고 뭐하는…?’
그나마 입을 열어주는 건 태현밖에 없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탑 1층을 클리어 한 태현이었기에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저기 시베르 선수가 센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탑은 머리로 생각하고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면서 주변에 날아오는 공격에 대응할 수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이게 바뀌는 패턴도 있다 보니까….”
“김태현 선수는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이 던전을 공략한 적이 있으십니까?”
“저야 1층 깼었죠.”
“…!”
“!”
이미 태현이 깼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지만, 몰랐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걸 깼다고?
‘뭘 어떻게 깬 거지?’
‘특별한 방법이 있나?’
“놀, 놀랍습니다. 깰 수 있는 던전이었군요?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그냥 달리면서 장애물 피하는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한 방법이….”
“…….”
“…….”
주변 심사위원들은 한 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이잖아…!
국영수 중심으로 예습복습 철저히 하란 말도 저 말보다는 영양가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날아오는 거 보면서 반응하고 쳐내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스킬에 의지하지 않고 컨트롤로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가 이 던전의 핵심이죠.”
태현의 말을 듣던 심사위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현이 그냥 중국 놈들 엿먹이려고 여기 데리고 온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럴듯했던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이야.’
‘스킬도 레벨도 직업도 중요하지만 결국 컨트롤이 핵심이지.’
잊기 쉬웠지만 판온은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게임.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같은 레벨 같은 직업 같은 스킬을 갖고 있어도 컨트롤이 차이 난다면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
게다가 리그나 대회처럼 어느 정도 차이가 보정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태현은 위, 아래, 옆에서 날아오는 장애물 피하거나 쳐내는 걸 보면서 컨트롤이 좋은지 나쁜지를 이야기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그 말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난감한 분위기는 어딘가 사라지고 의외로 그럴듯한 모습이 나왔다.
‘휴. 그래도 돈 받고 가만히 있지는 않는군.’
만약 계속 입 다물고 있었다면 뭐라도 시켜야 했었을 것이다.
여유를 되찾은 진행자는 슬쩍 물었다.
“구텅하오 선수는 어떻습니까?”
중국 쪽에서 나름 유명한 플레이어로, 아직 선수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중국 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은 플레이어였다.
진행자는 태현이 좋은 평가를 해주기를 기대했다.
말만 해주면 매스컴이 알아서 더욱 부풀려줄 것이다.
-김태현, 구텅하오 좋게 평가…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다’.
-김태현, 구텅하오 극찬! ‘이 선수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김태현, ‘내 후계자는 구텅하오다’… 구텅하오가 한국인이 아니어서 너무 아쉽다고 밝혀….
물론 김태현이 보면 빡쳐서 기자 멱살을 잡을 소리긴 했지만, 김태현이 중국 기사까지 어떻게 보겠는가.
“어, 누굽니까?”
“…저기 저 선수 말입니다.”
“안 보입니다만?”
“앗. 방금 떨어져서….”
“…….”
민망한 분위기가 흘렀다. 태현은 못 들은 척 해줬다.
태현이 말하는 걸 듣던 심사위원들은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이 미션은 오래 갈 거 같지도 않고, 아마 클리어도 아니라 많이 간 사람을 뽑게 될 거 같은데….’
‘김태현 선수는 욕심도 없나?’
이 던전은 태현이 고른 게 거의 확실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태현이 너무 욕심이 없어 보였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게임단 관련 홍보나, 심사위원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애썼을 것이다.
남들이 다 별로라고 판단한 선수를 발굴해내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가 되는 법!
그 감동적인 스토리는 또 얼마나 게임단에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태현은 딱히 자기네 게임단 홍보도 안 하고, 결과도 그냥 쉽게 나오는 던전 고르고….
이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 수 있었다.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가장 잘 한 것 아닌가.
‘팀 KL은 여기서 뽑을 생각이 없는 걸지도…?’
‘김태현 성격이라면 가능성 있지. 어느 선수가 마음에 들겠어.’
‘…잠깐. 그러면 김태현 선수하고 손을 잡으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