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72화
진행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초일류 선수는 유우머 센스도 초일류구나!
물론 태현은 매우 진지했지만 진행자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김태현 선수. 지금 수많은 팬들이 여길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진행자의 자리를 정말 많은 방송국들이 탐냈는데, 제가 맡게 되어서 영광처럼 느껴집니다.
-진행 잘하시네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태현의 말에 진행자는 반색했다.
지금 이 중계를 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던가.
오죽하면 판온 주최 측에서 그냥 신청한 방송사들 중에 제비뽑기로 결정해 줄 정도였다.
그런 자리인 만큼 그 책임감이 매우 막중하게 느껴졌다.
-김태현이 맡았구나!
-와, 왜 김태현한테 시키냐? 이거 차별 아니냐? 김태현보다 잘나가는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많은데?
└꼬우면 시즌 우승을 하시지 그랬음?
└판온에서 방송 좀 한다고 김태현보다 더 잘나간다고 우기는 거임?
공식 방송뿐만 아니라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개인 방송에서 지금 투기장 공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진진 그 자체!
그중 몇몇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씹고 헐뜯었다.
-김태현은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한국 팀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날 안 뽑은 김태현은 눈이 없다!
태현은 언제나 이름만 넣어도 조회수를 몇십, 몇백 배로 늘리는 사람이었다.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태현을 욕하면 일단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
태현이 봤다면 ‘와 예전에는 날 그냥 싫어하던 놈들이 날 싫어했는데, 이제는 조회수 벌려고 싫어하나?’ 하며 놀라워했을 것이다.
판온 1때 상관없는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물고 뜯고 늘어지다니!
덕분에 그런 방송에는 사람들끼리의 다툼이 치열했다.
-김태현은 거품이다. 첫 시즌에는 진짜 랭커들이 참가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제 곧 드러날 거다!
└그 거품이 혹시 언빌리버블 같은 거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김태현 만나면 일 초 컷 당하실 것 같은 분이 입만 살아서….
└ㄴㄴ 꼭 이렇게 떠드는 놈들 중에 김태현한테 PK 거는 놈들 없더라.
└ㄴㄴㄴ 김태현이 장비 좋고 NPC들 뒤에 있다고 핑계 대는 놈들임. 절대 안 나섬.
사람들이 구박을 퍼부었지만 플레이어들은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태현과 1:1을 붙을 법도 했다.
지더라도 엄청나게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플레이어는 정말 드물었다.
태현은 워낙 PK를 많이 당해서 그런지, 1:1로 덤비는 플레이어는 ‘판온 1때 원한이 있는 놈이구나!’ 하면서 정말 확실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방송 한 번 관심 받자고 장비 잃어버리고 레벨이 깎이는데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태현이 투기장 안을 돌기 시작했다.
-투기장은 어떠십니까?
-맵이 더 크고, 넓어지고, 장비는 기본인데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흠. 좀 더 봐야 알 거 같습니다만….
태현은 기본 장비 들고 맵을 걸어 다녔다. 어지간한 던전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정말 맵을 넓게 쓰겠는데….’
점령 룰이면 모를까, 호위 룰이라면 정말 맵 전체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복잡한 지형을 파악하고 그걸 유리하게 사용하는 건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어라도 연습이 필요했다.
‘월드컵 반응이 괜찮으면 다음 시즌은 이 투기장으로 갈 것 같은데. 걱정이군. 적응을 잘할 수 있으려나?’
태현은 현실적이었다.
첫 시즌 때 무패우승을 했다고 해서 다음 시즌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게임은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는 법.
태현이 판온 1에서 계속 이기다가 이세연한테 진 적 있듯이, 태현도 질 수 있었다.
지금도 신진 랭커들이다 뭐다 하면서 계속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나오고 있었고 이들 중 태현만 연구하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태현도 최대한 많이 숨기고 새 스킬이나 콤보를 익히려고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대방이 더 유리하기 마련.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
‘한 번 패배하면 그다음에는 지지 말아야 하는데. 음. 정말 선수 여럿 두고서 전술을 다양화시켜야 하나… 케인이 이런저런 롤을 소화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킬까? 근데 지금도 솔직히 빠듯한데 가르쳐 봤자 더 역효과만 날 거 같기도 하고.’
-김태현 선수가 말이 없어졌는데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이 맵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아. 그런 건 절대 혼자 생각하면 안 되지. 김태현 선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진행자는 안타깝다는 듯이 외쳤다.
태현의 생각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한 참고 자료였다.
이걸 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요청이었다.
‘아니. 케인이 멍청해서 여러 롤 못 맡는다는 걸 말해야 하나?’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귀를 찢는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
“!”
-!
명백한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보고 있던 사람들은 대흥분 했다.
-몬스터다!!
-달라졌다는 게 이거구나!
투기장에 몬스터가 추가된 것이다. 진행자도 깜짝 놀라서 외쳤다.
-김태현 선수! 몬스터! 몬스터의 울음소리죠?
“이거 학카리아스의 울음소리인데?”
-…….
-…….
보고 있던 판온 쪽 운영진들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저거 어떻게 맞춘 거야?”
“글, 글쎄요?”
“김태현 놀라는 얼굴 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운영진들 사이에서는 태현의 팬들이 많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태현의 놀라는 얼굴은 보고 싶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현은 울음소리 하나 듣더니 바로 어떤 몬스터인지 알아맞혔다.
-아니, 김태현 선수! 학카리아스의 울음소리라뇨? 그게 파악이 되나요?
“잡아본 적 있으니까 대충은 가능하죠.”
-학카리아스는 어떤 몬스터입니까?
“블랙 드래곤인데… 아니, 투기장에 얘를 놓으면 잡을 수가 있나?”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약하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아. 하긴 잡았던 몬스터의 환상 같은 거겠군요.”
태현도 납득했다. 죽은 몬스터를 불러내는데 실제 살아 있는 몬스터는 아닐 것이다.
“그래. 김태현 선수! 약하니까 한 번 가봐!”
“학카리아스를 보고 당황해 줘!”
운영진들은 속으로 외쳤다.
태현이 빨리 가서 학카리아스를 대면해줬으면 했던 것이다.
“흠. 학카리아스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데….”
태현은 머뭇거렸다.
-왜 그러신가요?
“그야 제가 학카리아스를 잡았으니까, 학카리아스가 분노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태현은 학카리아스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투기장을 소개하기로 한 이상 밥값은 해야지!
[검은 묘비 산맥의 지배자, 학카리아스가 포효합니다!]
[울부짖음으로 인해 움직임이 멈춥니다!]
[회피에 성공…]
“!”
학카리아스는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놈은 살벌하게 울부짖으며 태현을 쳐다보았다.
[학카리아스를 잡은 적 있습니다!]
[학카리아스를 상대하는 데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학카리아스가 더욱 더 당신에게 분노합니다.]
[……]
[……]
‘오?’
태현은 의외의 메시지창에 놀랐다.
학카리아스 상대에 보너스를 준다고?
물론 거기에 학카리아스 분노도 보너스로 들어오지만, 일단 보너스를 준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아. 그렇군. 그러면 몬스터에 따라서 관련 칭호 갖고 있는 사람이 더 유리해지는 건가?’
태현은 의도를 깨닫고 감탄했다.
다양한 맵과 몬스터들이 나올 테니, 거기에 맞춰 이런저런 변수들이 생기지 않겠는가.
태현처럼 그 몬스터를 잡은 사람일 경우 한결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아키서스의 화신 이놈!!!!
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학카리아스는 분노해서 추격을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주변이 순식간에 화염으로 뒤덮이고 거무튀튀한 저주들이 닥치는 대로 날아들었다.
태현은 검으로 튕겨내고 아키서스의 권능을 사용해 막아낸 다음 거리를 벌렸다.
‘장비도 없는데 붙어서 싸워도 되려나? 놈도 약해졌다고 하지만….’
태현은 일단 거리를 벌린 다음 상대의 약점을 하나씩 노려볼 생각이었다.
상대도 약해졌다지만 태현도 많이 약해진 것이다.
그런데 학카리아스가 쫓다가 우뚝 멈춰섰다.
“…아하.”
태현은 씩 웃었다.
학카리아스가 쫓아오지 못하는 데에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구역이 정해져 있군!’
맵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구역만!
태현은 다시 달려가서 학카리아스 앞에 섰다.
-블랙 드래곤의 증오!
콰르르르륵!
강력한 독 마법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지만 태현은 다시 한번 거리를 벌렸다.
학카리아스는 이빨만 뿌득뿌득 갈 뿐 쫓아오지 못했다.
슬쩍-
-지옥의 일곱 화살!
슬쩍-
-암흑의 용혈 저주!
태현은 재미가 붙었다. 상대방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놀리고 나오는 재미가 있었다.
[계속해서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민첩 스탯이 오릅니다.]
이런 보너스는 덤!
-저, 김태현 선수?
“아. 죄송합니다.”
전 세계 앞에서 학카리아스 갖고 노는 걸 생중계한 태현은 멈췄다.
사람들은 이미 미친듯이 웃어대고 있었지만….
-이번 월드컵에 임하는 소감 한마디 해주셨으면 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한 경기 한 경기 열심히 뛰려고 합니다.”
-혹시 우승 예상되는 나라가 있다거나, 활약이 예상되는 선수가 있습니까?
“어….”
말하려던 태현은 멈칫했다.
팀 KL의 주장이었던 태현이라면 그냥 편하게 말했겠지만, 지금 태현은 국가대표팀의 일원이었다.
게다가 이세연하고 한 약속도 있었다.
-어디 나가서 말할 때 너무 세게 말하지 마. 알겠지?
-도동수 앞으로 만나지 말자, 만나면 뒈질 각오해라 이 정도도 안 되나?
-응. 안 돼.
-저런….
-좀 자제해. 팬들은 그런 것들도 좋아하지만, 모두 다 네 팬은 아니잖아.
이세연은 태현이 괜히 욕을 먹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태현은 물론 가장 인기 좋은 선수였지만, 그런 선수라고 안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최고의 선수였기에 더욱 안티가 생겼다.
이제까지는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그럴 때를 대비해서라도 말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생각해 놓은 선수는 있지만 비밀로 하겠습니다.”
-…!
진행자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왔던 태현이었다.
그런데 비밀로 하겠다니!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혹시 힌트라도 주실 수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이야… 정말 궁금하네요. 김태현 선수가 높게 평가하는 팀, 아니면 선수가 누구인지!
태현은 별 생각 없이 말했지만 이걸 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대체….
대체 누구지?
-김태현. 고맙다. 우리나라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다니… 김태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 캐나다 국가대표팀이 좀 잘나가긴 해.
-개소리 하지 마라. 선수도 얼마 없으면서. 김태현은 우리 중국 국대팀을 말한 게 분명해. 우리만큼 선수가 많은 나라도 없는데.
-선수 많으면 뭐 달라지냐? 숫자로 승부하는 경기도 아닌데. 김태현이 말한 나라는 미국이다. 바로 스미스가 이끄는….
-아니거든? 김태현은 나라 아니라 선수 말한 거거든?
-설마 그 선수가 자기란 소리는 아니겠지?
-…왜 그러면 안 되냐??
-저런 양심 없는 놈 같으니!
-김태현 불러! 김태현한테 물어봐!
-좋다! 어디 한 번 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