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51화
-으음. 정말 그냥 물어본 거겠지?
잘레르의 질문에 태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사라질 유령 NPC 아닌가.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저 난장판은 뭔가? 아키서스의 화신답다면 화신답지만….
“아키서스라고 무조건 난장판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아닌데? 아키서스는 보통 혼란과 난장판을 불러오던데.
“…….”
죽은 사람은 두려울 게 없었다. 잘레르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어댔다.
“됐고 뭐 도와주기나 하십쇼. 저 밑의 악마 놈을 잡아야 합니다.”
슬슬 잘레르가 귀찮아진 태현은 대충 대하기 시작했다.
국왕이든 말든 얻어낼 거 얻어냈고 시간도 없으니 빨리 단물만 뽑아낼 생각!
“근데 어떤 스킬 갖고 있습니까?”
-나는 활에 능하고 마법에 뛰어난….
“저런. 빨리 돕기나 하십쇼.”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어차피 계약한 거 아닙니까? 돕기나 하십쇼.”
남이 에랑스 왕국 조상이라고 해도 태현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에랑스 왕국 소속도 아니었고….
게다가 잘레르에게서는 느낌이 왔다.
[카르바노그가 무슨 느낌이냐고 묻습니다.]
‘도움 안 될 거 같은 느낌.’
구체적으로 펠마스 같은 느낌!
국왕이면 뭐 어떻단 말인가. 도움이 되어야 대접을 해주지….
-흥. 보고 있기나 하게.
잘레르는 태현의 푸대접에 분노했지만, 그래도 노래로 불려 나온 이상 능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에랑스 왕가의 활 소환!
[현재 <아키서스의 노래>로 불려 나온 상태라 힘이 제약됩니다.]
[<에랑스 왕가의 활 소환>이 실패합니다.]
“…….”
[…….]
-아, 아니. 이건… 나도 불려 나온 건 또 처음인데 실수 좀 할 수 있지 이 사람아!
“아. 예.”
“저 유령 별로 도움 안 되는 거 같은데….”
뒤에서 랭커들이 수군거리자 잘레르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에랑스 왕궁의 비전 찬미가!
[<에랑스 왕궁의 비전 찬미가>를 사용했습니다!]
[강력한 신성력이 담긴 빛이 쏟아져 내립니다!]
콰아아아아!
하늘에서 마지 빗줄기처럼 신성력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교급 NPC만이 할 수 있는 강력한 신성광역마법!
“!”
무시하던 태현도 놀랄 정도의 힘이었다.
‘오… 아키서스하고만 계약 안 했으면 좀 더 존경했을 텐데.’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꾸에에엑!
골라돈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울부짖었다. 가루다 전사들의 공격은 꾸준히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거기에 폭탄 장비까지 사용된 맹공!
그 상황에서 잘레르가 소환되자 슬슬 골라돈도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골라돈이 <골라돈의 회전 돌진>을 사용합니다!]
-피해! 놈이 날뛴다!
가루다 전사들은 호다닥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전사들이었기에 이럴 때 유리했다.
원할 때 공격하고, 불리하면 빠지는 편리함!
이세연도 감탄할 정도였다.
“와. 진짜 날개 있으니까 편하긴 하구나.”
종족 변환은 생각도 안 해봤지만 저걸 보니 솔깃해질 정도였다.
[불불이가 화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키서스의 성장> 스킬을 얻습니다.]
“응?”
태현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카르바노그가 대체 드래곤한테 뭘 가르친 거냐고 합니다!]
[<아키서스의 성장>으로 인해 불불이가 <골라돈의 회전 돌진>을 배웁니다!]
[불불이가 희박한 확률로 <골라돈의 회전 돌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키서스의 성장>
아키서스의 보살핌으로 인해 낮은 확률로 경험한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다.
“…….”
아니, 왜 하필 이런 걸….
‘차라리 사디크의 성장이 더 나았겠다!’
처음으로 사디크를 고평가해 주는 태현!
사디크가 들었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캬오!
[불불이가 스킬을 시전합니다!]
[사디크의 화염탄이 시전됩니다!]
[불불이의 MP가 0이 됩니다. 탈진합니다!]
-아니, 저 민폐 덩어리 같은 빨간 드래곤 놈!
흑흑이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불불이가 쓰러지면 그걸 보살펴야 하는 건 흑흑이였던 것이다.
-캬오오오….
-그러니까 왜 사디크의 권능 같은 네가 다루지도 못하는 스킬을 쓰고 그러는 거냐! 사디크의 힘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캬오오….
-만, 만만하다고? 지금 할 말 다 했냐??
-캬오….
-아니… 물론 주인님은 만만하다고 하긴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라 농담 같은 거지! 사디크의 권능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흑흑이는 울컥했다.
용용이가 아키서스한테 호구 잡혔어도 아키서스에 대한 자부심이 있듯이, 흑흑이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블랙 드래곤은 골드 드래곤들처럼 사기계약당한 것도 아니었다. 나름 정당한 계약이었다.
그걸 무시하다니!
“흑흑아. 조용히 해! 시끄럽다!”
-넵….
* * *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골라돈이 슬슬 지치면서 반격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걸 본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간다.”
랭커들은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김태현하고 합을 맞춰보는구나!
나름 랭커 반열에 든 플레이어들 중에서 태현과 파티 플레이를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종의 꿈!
슈퍼카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것보다 더 짜릿할 것 같았다.
“평소 하던 대로 골골이와 흑흑이는 옆에서 돌고, 용용이는 정면에서 스킬 쓰면서 들어가자. <아키서스의 주사위>!”
[11! <위대한 명중의 가호>가 파티 전체에 걸립니다!]
[명중 관련에 크게 보너스가 들어갑니다!]
[최고급 전술 스킬로 인해 파티 전체에 추가 능력치가 부여됩니다!]
[전술 스킬이 오릅니다.]
[최고급 전술 스킬 레벨이 오릅니다! 최고급 전술 스킬 2로 변합니다.]
[동료끼리 서로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공유합니다!]
“!”
각 플레이어한테 나오는 서로의 위치 창.
그 모습에 모두 깜짝 놀랐다.
“이런 게 있었나?”
“어, 이런 거 특수 퀘스트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세연 선수. 이런 게 원래 있었나요?”
“나도 처음 봐. 뭐야 이거.”
“?!?!”
이세연도 처음 보는 것 같자 다들 당황!
“무슨 효과야? 괜찮은데?”
서로의 위치를 간단하게라도 볼 수 있는 스킬은 많지 않았다.
보통 시간 제한이 있거나 특수한 상황에서만 공유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태현의 스킬은 그런 제약 없이 바로 위치를 공유해 줬다.
간단하지만 매우 편리하고, 무엇보다 리그에서 필요한 스킬!
“최고급 전술 스킬 찍으면 나오는 추가 효과.”
“…….”
“…….”
전술 스킬은 또 언제 최고급을 찍은….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김태현. 지휘 내려줘.”
“들어가서 딜 넣을 테니까, 네가 알아서 보고 상대 발 좀 묶어줘.”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듣고 있던 류다영이 당황해서 말했다.
“…그게 다입니까?”
“어? 여기서 뭐 더 지시할 게 있나?”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휙 내려가 버렸다.
* * *
-아키서스의 돌격, 아키서스 검법, 아키서스의 첫 번째 공격, 치명타 폭발!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꾸에에에에에엑!
태현의 공격은 손맛부터가 달랐다.
게다가 새로 만든 검은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
저번 대만불강검보다 더 강력해진 검의 힘에 골라돈은 비틀거렸다.
[MP가 부족합니다!]
“???”
태현은 당황했다.
몇천번 넘게 해왔던 MP 계산이 왜 갑자기?
‘아니, 이런 젠장!’
태현은 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잘레르 때문이었다.
“언제 역소환됩니까?!”
-5… 4… 3… 2… 1….
펑!
[<아키서스의 노래>가 끝납니다! 위대한 영웅이 사라집니다!]
‘젠장. 생각해 보니 MP 소모가 없을 리가 없었어.’
이제는 노래 한 번 부를 때마다 강제로 영웅 얼굴 보고 MP 빨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부르게 된 셈 아닌가.
쓸 만한 버프 스킬 중 하나였는데….
[<파워 워리어 특제 최상급 마나 회복 포션>을 마셨습니다!]
[<파워 워리어 특제 최상급 마나 회복 포션>을 마셨습니다!]
꿀꺽꿀꺽-
태현은 골라돈의 맹공을 피하면서 포션을 마셨다.
보통 포션 마시다가 공격 받으면 취소되거나 효과가 팍 줄었기에 일단 피하고 마시는 게 보통이었는데….
태현은 그러지 않았다.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해 상대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포션으로 MP 회복!
랭커들은 경악했지만 태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해냈다.
“저게 딜러야 탱커야??”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회피에 성공…]
[공격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
[……]
골라돈의 어그로를 끌자, 태현은 공격이 아닌 방어에 몰두했다.
공격을 피하고, 돌려보내고, 안 될 때는 회피를 믿고 빗겨내고….
흔히들 태현을 세계 최고의 딜러라고 표현하지만, 태현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탱커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저, 괜히 뽑힌 거 아닌가 싶습니다.”
류다영이 할 말을 잃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세연과 이다비는 급히 대답했다.
“아니지, 아니지!”
“류다영 선수는 류다영 선수의 역할이 있어요!”
“그래. 동생아. 네가 김태현 선수보다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저런 거 보고 굳이 기죽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
류다영은 류태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류태수가 당황해서 물었다.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그건 설명하려면 좀 길고… 지금 김태현 지원해 주느라 정신없으니까 둘 다 좀 알아서 멘탈 붙잡고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슬슬 성가셔진 이세연은 빠르게 문제를 끝내 버렸다.
류다영은 놀란 눈으로 이세연을 쳐다보았다.
평소 방송에서 자주 봤던, 공손하고 예의 바르고 차가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아니, 이것도 차가운 이미지긴 한가?
-사악한 어둠의 저주, 네크로노미콘의 위대한 힘, 골렘 연쇄 소환….
콰드드드득!
이세연은 훌륭한 원거리 딜러였다.
스킬을 추가적으로 퍼붓자 골라돈 위로 마치 폭격이 날아오는 것처럼 마법이 날아왔다.
-놓치지 마! 다 잡았다!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해!
가루다 전사들은 흥분했다.
딱 봐도 골라돈이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태현이 폭딜을 넣고 발을 묶는 사이 다른 랭커들이 추가적으로 공격을 하니 HP가 10% 미만으로 떨어진 상황!
-꿀… 꿀꿀! 항복! 항복!!
“???”
“뭐야? 왜 항복해??”
갑작스러운 악마의 항복에 모인 사람들은 당황했다.
보통 끝까지 버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게 악마 아니었나?
이 정도 되는 악마가 항복한 건 처음 봤기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흠. 항복하는군. 하긴 항복할 수도 있지.”
“그러네요.”
그러나 태현과 이다비는 태연하게 항복을 납득했다.
요즘 악마들은 많이 맞다 보면 항복하더라!
* * *
-꿀꿀! 랄그갈 님 필요 없으니 풀어만 줘라! 돌아가겠다!
“녀석. 항복한 지 얼마 안 되어가지고 룰을 잘 모르는구나.”
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많은 선배 악마들과 달리, 저 골라돈이란 악마는 아키서스 밑에 있을 때의 규칙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르면?
배워야지!
“가루다 전사들. 너희들이 좀 도와줘야겠다.”
-???
-우리는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데?
“걱정 마라.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태현은 근처의 나무를 잘라 몽둥이를 만든 다음 아키서스의 성수를 붓고 사디크의 화염을 붙였다.
즉석 예절 주입기!
이제 여기서 더 심화단계로 가면 골짜기에 있는 <아키서스의 포병대>를 끌고 와서 마력을 쫙 뽑아버리면 됐지만, 굳이 그런 심화단계를 지금부터 배울 필요는 없었다.
“이걸로 때리면 된다.”
-실로 간단하군!
-아키서스 교단에는 이런 좋은 문화가 있었나!
퍼퍼퍼퍼퍼퍽!
가루다 전사들은 신이 나서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꿀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