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40화
최상층의 언데드들도 토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기군.’
국왕이 갇혀 있는 곳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복도 끝에 위치한 휘황찬란한 입구!
아예 여기서부터는 감옥이 아닌,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에 가까웠다.
[<발타로르의 궁전>에 입장합니다.]
[명성이…]
[……]
궁전 가운데에, 고라키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죽었나?’
[카르바노그가 힘을 충전하고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오래 산 언데드인 만큼, 맹세를 지킬 때 말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저기 앉아 있는 게 분명했다.
‘덕분에 편하게 지나갈 수 있겠군.’
-아버지!
“!”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현은 움찔했다.
1왕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뭐야. 국왕을 협박하고 있나?’
태현은 쪼르르 달려가 방 앞에 멈췄다. 드넓은 방 안에서 익숙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에랑스 왕국 국왕이 분명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1왕자는….
“!”
태현은 깜짝 놀랐다. 1왕자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가 칠해져서 일렁거리고 있던 것이다.
‘뭐야. 저놈 얼굴 어디갔어?’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부작용이 분명하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무시무시하군.’
1왕자가 왜 밖에 안 나오고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대놓고 돌아다녔다가는 다들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 저렇게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갈 때는 가면이나 축복 마법으로 가리려나?’
“빨리 왕국의 왕관과 검을 내놓으란 말입니다! 어디에 숨기신 겁니까!”
“으으… 으으으… 못난 놈 같으니… 넌 캐인보다 못난 놈이다….”
“이 망할 늙은이가!”
‘케인?’
[그 케인 말고 4왕자 캐인 말하는 거라고 카르바노그가…]
‘깜짝 놀랐네.’
아무리 그래도 자식한테 ‘케인보다 못하다’는 심하지!
‘왕관과 검을 숨겼나? 역시 국왕. 잘하는군.’
태현은 국왕의 행동에 만족했다.
자식들한테는 유산을 빨리 물려주면 안 됐다.
그러면 아쉬울 거 없는 놈들이 저렇게 날뛰는 법.
김태산에게 빌딩을 받은 태현은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에랑스 왕국의 왕관과 검은 고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던 강력한 아이템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왕관과 검은 카르바노그도 알 정도로 유명한 아티팩트였다.
소문에 따르면 왕국의 보물창고들을 열 수 있고, 귀족과 기사들을 부릴 권한을 주며, 숨겨진 마법과 힘을 꺼낼 수 있다고….
그것 없이 그냥 왕국을 이어받아봤자 반쪽짜리를 이어받는 셈.
1왕자가 국왕을 죽이지 않고 협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떻게든 뺏어야 한다!
“왕관과 검을 내놓으면 편하게 해준다니까!”
“헛소리… 그만해라… 네놈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어디 한번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릴 수 있나 보자고. 입을 열 때까지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주지 않을 테니까!”
‘저 저 나쁜 새끼 같으니.’
아무리 대역죄인이어도 밥은 굶기지 않는 법이었는데.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사악한 1왕자의 행동에 분노했다.
굶주린 혼돈 놈과 계약했더니 아주 막 가는구나!
쾅!
“!”
1왕자가 갑자기 나오자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기겁했다. 다행히 놈은 태현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기회인가?’
태현은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국왕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파앗-
토끼에서 사람으로 돌아오자 국왕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 아니…?”
“접니다. 국왕 폐하.”
“아키서스의 교황!”
“구하러 왔습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나…!”
[에랑스 국왕이 매우 감동합니다!]
[명성이…]
[친밀도가…]
[공적치 포인트가…]
“내가… 왕자 놈들이 너무 시원찮아서 영웅인 자네를 양자로 삼아 왕국을 물려줄까 했었는데….”
“예?”
태현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언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진작 말해주지!
“저놈들이… 감히 이 아비를… 붙잡고…!”
“아주 죽일 놈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왕 폐하. 밖으로 나가서 진실을 밝힌 다음 저 왕자 놈들 모가지를 전부 잘라버리고 저한테 왕국을 넘겨주시면 됩니다.”
[카르바노그가 어떻게 그런 말이 1초도 고민 안 하고 바로 튀어나오냐고 당황합니다.]
그러나 에랑스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
‘뭐야. 주기 싫어졌나?’
“난… 틀렸네. 움직일 힘이 없어.”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 보약들이 있는데….”
“아니… 아들놈들이 부린 저주 때문에….”
국왕을 납치하면서 국왕에게 굶주린 혼돈의 힘을 쓴 것이다.
“풀 수 있을 겁니다.”
“난 이미 틀렸어. 자네에게… 뒷일을 맡기겠네. 부디 저 왕자 놈들을….”
“정신 차리게 하라는 거라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죽여 버리고….”
“아. 그런 거라면야.”
국왕도 이런 부분에서는 칼 같았다.
근위대 죽이고 저주 퍼붓고 밥 못 먹게 하고 물 못 마시게 한 부분에서 이미 부자(父子)간의 정은 사라진 것이다.
“…왕국을 부탁하네.”
“괜찮습니다. 조금만 버티시면….”
[에랑스 왕국 국왕이 사망합니다!]
[국왕, 필립 3세는 에랑스 왕국을 다스린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할 것입니다.]
[칭호 <왕의 죽음을 목격한…>]
[이 일을 알리면…]
[……]
[퀘스트, <국왕의 죽음을…>]
[퀘스트, <왕의 장례를…>]
[퀘스트, <왕의 복수…>
“…….”
태현은 얼어붙었다.
‘아. 아니.’
진짜 죽다니!
너무 갑작스럽게 죽어서 태현의 머리가 멈출 정도였다.
‘이거 어쩌냐?’
[카르바노그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뚜벅, 뚜벅, 뚜벅-
마침 1왕자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태현은 일단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카르바노그가 왜 거기 들어가냐고 외칩니다!]
‘숨을 곳이 없잖아!’
“…아버지. 아까는 제가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습니다.”
1왕자는 이번에는 채찍과 당근 중에서 당근을 써보려고 하는지 찾아왔다.
“제가 아버지의 근위대를 전부 죽여 버리고 호위기사들도 목을 매달았지만, 어차피 하찮은 놈들 아닙니까. 기분 푸십시오.”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동시에 감탄했다.
저런 개새끼 보게!
“아버지?”
“…용서할 수 없다!”
카르바노그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숨어 있어도 모자랄 시간에 뭐하는 짓??
태현은 국왕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네놈이 저지른 짓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국왕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흉내 냅니다!]
[1왕자가 완전히 속아 들어갑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칭호, <왕 사칭자>를 얻습니다!]
판온에서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칭호!
왕을 사칭해서 성공한 플레이어!
그게 바로 태현이었다.
“아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네놈에게 한 가지 임무를 주겠다.”
“뭡니까?”
“2왕자나 3왕자 놈들을 전부 공격해서 박살 내라!”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왕관과 검을 갖고 싶지 않느냐?”
“…….”
“왕관과 검을 갖고 싶다면 가장 강한 놈이라는 걸 증명해 봐라! 그렇다면 네놈을 용서하고 두 보물을 물려주마.”
“…정말 약속하신 겁니다?”
“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자 1왕자도 믿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한 건 다른 사람이었지만….
“…좋습니다! 그 놈들을 박살 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니 말입니다.”
“이제 꺼져라! 혼자 있고 싶다.”
“마실 거라도 들여보낼….”
“필요 없다고 말했다!”
국왕이 성질을 내자 1왕자는 침을 뱉더니 나가버렸다. 태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들키는 줄 알았네.’
[카르바노그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급한 나머지 1왕자한테 2왕자, 3왕자랑 싸우라고 한 건 좋았는데….
‘하고 나니 좀 후회가 되는군.’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 때문에 대륙 전체가 지금 전쟁 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오스턴 왕국이랑 스미스 놈이 싸우는 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오스턴 왕국이랑 에랑스 왕국이 싸우는 건, 음. 내 잘못이 조금 있긴 하지만….’
이제는 에랑스 왕국도 전쟁 나게 생겼다!
‘어쩔 수 없지. 지들끼리라도 싸워야 상황이 나아지니까.’
보아하니 1왕자 2왕자 3왕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태현을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어느 놈들이든 간에 오스턴 왕국 끝나면 태현도 공격할 게 분명!
차라리 지들끼리 싸우게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국왕이 죽은 걸 알게 되면 1왕자가 명령을 안 들을 수도 있다는 건데.’
왕관과 검을 받으려고 하는 건데 국왕이 죽어버리면 말짱 황이었다.
그렇다면?
‘국왕을… 음… 살게 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고민하던 태현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국왕의 시체를 갖고 이 성을 빠져나간 다음 아탈리 왕국으로 내달리자!
일명 <죽은 국왕이 산 왕자들을 속이는> 계책!
‘이것밖에 없군.’
[…카르바노그가 진짜 아키서스의 화신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 * *
-이세연.
-대답 없어서 걱정했잖아! 뭐하고 있었던 거야?
-음….
-고민하는 거 보니 이것저것 일어난 모양인데, 걱정하지 말고 하나씩 말해.
이세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원래 난이도 높은 퀘스트들은 시시때때로 진행상황이 달라지는 법.
짧은 순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도 놀라면 안 됐다.
게다가 김태현은 기상천외 그 자체.
이세연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태현은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해 줬다.
이세연은 멍하니 듣다가 사레가 들렸다.
-…쿨럭, 쿨럭, 커흐읏!
-이세연? 이세연?
-뭔… 미친… 짓을….
-태현 님. 국왕 폐하 죽였어요!?
-안 죽였어!
태현은 해명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지금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데, 언데드들이 너무 많단 말이지. 아무래도 지원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
-밖에 있는 기사들 들여보낼 생각이야?
-아니. 걔네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랭커들한테 성으로 오게 할 수 있을까?
태현의 말에 이세연은 생각했다.
발타로르 성은 아직 랭커들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성.
그런 곳을 열어준다면?
-…확실히 오긴 할 것 같아.
-잘 됐네. 불러줄 수 있을까?
예전이었다면 ‘왜 네가 안 부르고?’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세연은 이제 알았다.
왜 직접 안 부르는지!
상냥한 배려심의 마음으로, 이세연은 묻는 대신 랭커들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 * *
-발타로르 성 선착순 공략 파티 20명 모집.
└어떤 미친놈이 이딴 장난을….
└이세연이 올렸는데?
└…으로 11행시 해보겠습니다.
└발타로르 성?? 지금 간다!!
└야, 발타로르 성 열었다고? 와, 진짜 이세연은 전설….
└지금 다들 대답 없는데 이 새끼들 달려가고 있는 거 맞지?
└쳇. 눈치 빠른 놈 같으니.
에랑스 왕국에 있던 랭커들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내달렸다.
발타로르 성 오픈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대박이었다.
‘이세연 어떻게 연 거지?’
‘정말 대단하군. 월드컵도 준비하고 있을 텐데.’
‘김태현도 아니고 이 시기에….’
-도착한 사람은 바로 성 안으로 들어와. 아까 11행시 한다는 놈은 꼭 하고.
└…….
└암. 랭커라면 자기가 한 말은 지켜야지.
└너 이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