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17화
구시렉이 분노해서 외치려고 하자 태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야. 상황 파악해라.”
-…….
구시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세연이란 흑마법사도 어마어마하게 강했지만, 그보다는 그 주변에 모인 교단 관련 NPC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대주교들이 한자리에 여럿 모여 있는 희귀한 장면!
어지간해서는 각 교단의 대주교급 되는 NPC들이 이렇게 모이는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악마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상성인데 구시렉은 지금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에게 고문 받느라 전체 능력의 10% 미만으로 저하된 상태!
회복하기 전에는 싸움이고 뭐고 숨어야 했다.
“너 지금 싸우면 바로 죽고 마계에서 한 천 년 정도는 회복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악마 공작들이 네 영역 뺏어먹겠지. 아니, 지금 여기서 죽는 건 차라리 낫지. 저 라인업 보면 봉인되거나 어디 갇힐 수도 있어.”
대륙으로 나온 악마에게 가장 두려운 건 죽어서 마계로 쫓겨나는 게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건 교단 영웅들에게 붙잡혀 봉인되는 것!
마계로 돌아가면 힘을 회복해서 돌아올 수나 있었지만, 붙잡혀 봉인되면 그런 것도 없었다.
영원히 꽁꽁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악마가 봉인되면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
-…알고 있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리에 봉인되어서 필요할 때마다 마력을 착취당하고, 시도 때도 없이 성수 세례를 맞는다고.”
-???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데?
구시렉은 당황했다.
처음 들어보는 봉인 방식!
교단 놈들이 방식을 바꿨단 말인가?
이름만 들어도 실로 무시무시했다. 악마를 우리에 넣고 다니면서 굴욕감을 주는 동시에 마력을 계속해서 착취하다니….
악마보다 더 악마 같다!
-대체 어느 교단에서 그런 같잖은 짓거리를??
“파이토스 교단이 그런 짓을 하더라. 걔네가 유행시켰지.”
-감히…!
구시렉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안 그래도 저기 파이토스 교단 대주교와 성기사단이 있었다.
더위로 헉헉대면서 땀을 닦는 성기사들은 악마가 노려보자 의아해했다.
“저놈은 왜 노려보는 겁니까? 아키서스 교황이 부리는 악마가 아닙니까?”
“악마 놈들 성질이 오죽 난폭한가. 계약 맺은 악마도 저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성기사들은 당연히 태현이 부리는 악마라고 생각했다.
흑마법사는 언데드만 부리지 않았다. 악마를 불러내서 계약하는 흑마법사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키서스 교단 교황이 악마를 부리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구시렉, 어떡할 거냐? 멍청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봉인된 다음 파이토스 교단 놈들한테 끌려 다니면서 마력 착취를 당할 거냐? 아니면 현명하고 지혜롭게 하급 악마 구시락인 척을 할 거냐?”
[카르바노그가 이미 다 정해놓고 뭘 묻냐고…]
[최고급 화술 스킬을…]
[악마 공작, 구시렉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하급 악마 구시락인 척을 합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업적입니다!!]
[악마 공작을 쓰러뜨린 자는 있어도 악마 공작의 자존심을 꺾은 자는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칭호, <악마 공작을 굴복시킨 자>를 얻었습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이 4에서 5로 변합니다!]
[모든 화술 스킬이 강화됩니다!]
[스킬, <화술의 근원>을 얻습니다!]
<화술의 근원>
짧은 시간 동안 화술 스킬들의 MP 소모를 없앱니다.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시간이 길어집니다.
<화술의 근원> 스킬은 최고급 화술에서 나온 스킬답게 사기적인 성능을 가졌다.
화술 스킬들의 MP 소모를 0으로!
얼핏 보면 화술 스킬들 대부분이 MP 소모가 없어서 쓰레기 스킬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냥 쓰레기 맞다고 카르바노그가…]
하지만 태현에게는 언령 스킬이 있었다.
<화술의 근원>을 켜면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 마법 폭격이 가능한 것이다.
쓰레기도 모으다 보면 강해진다!
‘흠. 내 수준 언령 스킬로 대마법 펼쳐봤자 효율도 안 나올 거 같고. 짧게 단타로 여러 번 치는 게 낫겠군.’
<냉기 증폭> 같은 거 수십 번 빠르게 말한 다음 <냉기의 저주>를 쓰거나, <화염 증폭>과 <사디크의 화염>을 엮거나….
태현이 고민하는 사이 다음 메시지창이 나왔다.
아직 보상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화려한 보상 세례들!
누가 보면 구시렉을 잡은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시렉을 잡은 게 아니었다. 그냥 구시렉이 하급 악마인 척을 하게 만들었을 뿐.
‘별의별 방법으로도 레벨 업 못 했는데 거 참….’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보면 매우 난이도가 높은 업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법!
-나… 저는 하급 악마… 구시락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덩치가 커?”
“얘 특수 능력이라서.”
“그래?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데. 꼭 저런 악마와 계약해야 해?”
이세연은 구시렉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흑마법사 랭커쯤 되면 악마 눈만 봐도 그 악마의 견적을 낼 수 있었다.
보통 오만하고 당당하고 입만 열면 시건방을 떠는 악마일수록 강하기 마련.
저렇게 부들부들 떨고 굴욕스러워하는 악마면 보통 약한 놈이었다.
김태현 같은 랭커가 왜 저런 악마를 골랐을까?
“내가 도와줄게.”
“아냐. 정도 들었는데 그냥 데리고 있지 뭐.”
“웬일로 그런…?”
이세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차.’
태현은 후회했다. 너무 착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서로 착한 짓하면 의심하는 사이!
“사실 기회가 되면 살아 움직이는 폭탄으로 쓰려고 하고 있지.”
“아. 역시. 그랬구나?”
이세연은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이 웃었다.
옆에 있던 이세연의 길드원들은 괴상망측한 꼴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방금 대화에서 웃을 부분이 있었어??
‘길마님은 뭐가 웃긴 거지?’
‘폭탄이 웃긴 건가?’
‘나도 모르겠다!’
구시렉을 일단 속인 태현은 상황 설명을 했다.
…최대한 간단하게!
-흑마법사 요새에 들어갔다가 어찌어찌하다 보니 자기들끼리 싸워서 요새 날아가고 간신히 탈출했다!
“???”
“아니 뭔….”
-아키서스는 사실 불화의 신인가?
교단 NPC들도 수군거렸다.
대체 뭔 재주가 있어서 가는 곳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내분이 나는 거지?
-그러면 잘 된 것 아닙니까? 적들이 스스로 자멸한 건데?
데메르 교단 주교가 말하자 다른 주교들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저 아키서스 교황 놈이 날로 먹는 꼴을 봐야 한다니…!’
‘누가 행운의 신 아니랄까 봐 이런 부분에서는 운이 좋군!’
하필이면 아키서스 교단 교황이 크게 공적을 세우는 걸 옆에서 두고 봐야 한다니!
노력해서 공적을 세운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건 인정이라도 할 수 있지.
하지만 저 말을 들어보면 그냥….
날로 먹은 거잖아!
“아키서스 교단은 원래 행운의 힘으로 싸우지. 너희들도 억울하면 행운의 신 하지 그랬냐?”
태현은 당당했다.
운이 좋은 것도 능력이지!
-확실히 맞는 말….
-무슨 맞는 말입니까 저게! 데메르 교단 주교! 정신 차리십시오!
-아니 맞는 말 아닌가요?
순진무구한 데메르 교단 주교는 태현의 말에 넘어갔다.
확실히 행운의 신인데 행운으로 날먹하는 게 이상하진 않잖아?
다른 교단 NPC들은 뒷목을 잡았다.
원래 이세연의 요청에 그들이 따라 나온 건, 태현이 곤란에 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기도 했다.
아키서스 교단 교황 놈 곤란해하는 꼴 좀 보자!
그거 보고 겸사겸사 빚도 좀 지워두려고 했더니….
‘와. 쟤는 어떻게 교단이 나보다 더 미워하는 거 같지?’
이세연은 감탄했다.
교단 NPC들이 태현에게 보여주는 태도가 무슨, 흑마법사 싫어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거 같다!
-폐하. 흑마법사 요새가 붕괴했다지만 혼돈의 수하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 주변을 찾아서 잡아야 합니다.
교단 주교들은 강하게 주장했다.
여기 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냥 돌아가면….
또 아키서스 교단 혼자 공을 독점하게 된다!
‘흠. 주교들은 뒤가 안 보이나?’
태현은 주교들을 보며 생각했다.
뒤의 성기사들이 무거운 갑옷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사막의 열기가…]
[……]
[……]
“그런데 이다비. 쟤네 저러고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 신성 마법 버프 받아서 버틴 건가?”
교단에서도 최정예로 뽑히는 이들이니, 각종 버프로 버티면 이 사막의 지독한 열기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요. 물이랑 먹을 거 사면서 버텼죠.”
“이 사막에 상인이 어디 있… 아.”
태현은 이다비를 보고 감탄했다.
그런…!
“훌륭해!”
“별, 별거 아니었어요.”
이다비는 부끄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교단 놈들이 이제 안 사려고 해요.”
“저런. 못된 놈들 같으니.”
태현은 분개했다.
양심적인 가격에, 이런 험지에서 장사를 해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살 것이지!
감히 사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니. 천벌을 받아도 모자랐다.
“산 걸로 버티는 건가?”
“네. 조금씩 먹으면서 버티더라고요. 워낙 기본 스펙이 좋아서….”
각종 버프를 받고 있으니 갈증과 굶주림에도 훨씬 더 잘 버티는 성기사들!
‘흠. 어떻게든 더 지치게 하고 싶은데.’
태현은 사악한 마음으로 교단 NPC들을 쳐다보았다.
기껏 이 뜨거운 사막 위로 나왔는데, 좀 더 지치게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 태현의 속마음도 모른 채 교단 주교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주변을 수색해서….
-혼돈의 힘을 찾는 스킬을 써야 합니다. 성물을 갖고 온 분이 있으시면 꺼내시지요.
-어허. 그쪽도 갖고 오셨을 텐데….
그렇게 떠드는 사이 멀리서 적들이 나타났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나타났습니다!]
“!”
“적이다! 전투 준비!”
-성기사들이여! 앞으로 나서라!
주교들은 기회다 싶어 외쳤다.
아스비안 제국 황제 앞에서 자기 교단의 공적치를 내세울 기회!
성기사들은 헉헉대며 앞으로 움직였다. 평소보다 움직임이 더 느렸다.
“파이팅! 성기사들 힘내라!”
태현은 그렇게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이세연의 길드원들은 당황했다.
“???”
“아, 아니. 안 싸우십니까?”
적이 보이면 무조건 때리고 보던 태현이 뒤로 후퇴하다니!
저 적들이 설마 엄청나게 강한 건가?
“쟤네들도 있는데 굳이 내가 싸워야 하나 싶어서.”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적들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여기 모인 인원들의 절반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수준!
게다가 상태도 영 좋지 않아 보이는게….
[차원 폭발의 여파로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디버프를 받습니다!]
[……]
[……]
…요새에서 같이 튕겨 나온 놈들인 모양이었다.
“우린 지하에 내려가서 쉬자.”
“…너 지금 쟤네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지?”
이세연은 눈치 채고 되물었다.
“아닌데? 교단 애들 데리고 왔으면 기회를 줘야 하니까 이러는 거지.”
“네가 그럴… 아니다, 됐다.”
이세연은 말하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니 교단을 챙겨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김태현 없을 때에는 흑마법사라고 구박하던 놈들!
“이세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고마워??”
이세연은 기겁했다.
얘 왜 이래?
“많이 힘들 테니 내가 요리를 해주지. 각종 버프가 들어갈 거야.”
“…나 지금 리치 상태라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