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07화
그렇게 말은 했지만 김태산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 되겠다. 화장실 들렀다 가자.”
“…아니 진짜 그거 가지고 우신…?”
“너도 나이 먹어봐라. 눈물 많아진다.”
김태산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에 자주 왔었기에 화장실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 * *
‘늦게 온 두 사람이 먼저 들어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협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더 일찍 와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다! 라고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 두 사람이 훅 들어와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미묘하고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일하는 직원이겠지. 암. 난 회장님께서 직접 부른 사람이라고. 설마 날 두고 먼저 들여보냈겠어.’
협회장은 자부심을 가졌다.
분명 유 회장은 그에게 숨겨진 재능과 실력을 엿본 것이리라.
‘ST 그룹 놈들. 나 같은 인재를 푸대접하다니….’
사장을 역임하긴 했지만, 그룹에서 유배지로 불리는 한적한 회사의 사장이었다.
사실상 은퇴 선언이나 마찬가지!
그룹에서 그런 대우를 받고 협회로 온 협회장은 야망에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아까 그 젊은 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협회장은 의아해했다.
태현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익숙했던 것이다.
‘유 회장 아드님인가? 아니. 저렇게 젊은 사람 없을 텐데. 손자? 아니. 손자도 없을 텐데….’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네. 안내하게!”
직원의 말에 협회장은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역사적인 시간이 찾아오는구나!
재야에 묻힌 뛰어난 인재인 그와,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과감하게 부른 유 회장.
반드시 ST 그룹 놈들한테 본인의 능력을….
협회장은 부푼 가슴을 안고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다른 직원이 오더니 당황해했다.
“잠깐. 먼저 손님 오셨는데 왜 들여보낸 거야?”
“신입이 약속 시간이 되어서 들여보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만….”
“이런 멍청한 놈…!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먼저 다른 손님 가셨다고 했는데!”
태현과 김태산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신입 직원이 그것도 모르고 협회장을 들여보낸 것이다.
“어, 어떻게 하죠?”
“어쩔 수 없지. 이미 들어가셨을 테니, 앞에서 돌아 나오실 거다. 기분은 좀 상하시겠지만 어쩌겠어. 교육 똑바로 하도록.”
“죄송합니다.”
그러나 협회장은 돌아 나오지 않았다.
저택에서 유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서재로 쑥 들어갔다.
지금 둘은 화장실에 있었던 것이다.
* * *
유 회장을 마주한 협회장은 긴장했다.
같은 회장이었지만 비교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한쪽은 보름달이라면 다른 한쪽은 반딧불.
한쪽은 ‘진짜’ 회장이라면 다른 한쪽은 조기축구회 회장 정도?
‘참으로 대단하시다!’
협회장은 유 회장을 경외감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저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유성 그룹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그룹으로 끌고 온 남자의 모습인가!
“이,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저는….”
“자네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네.”
유 회장의 차가운 말에 협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회장의 싸늘한 태도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훗. 압박면접이군.’
소문에 따르면 유 회장은 상대를 밀어붙여서 진면목을 알아본다고 했다.
이럴 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됐다. 강하게, 당당하게 맞서야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다.
“판온협회의 장을 맡고 있다고?”
“예. 부족하나마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도 했군.”
“감사합니다.”
“협회장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협회를 운영했나?”
유 회장의 질문에 협회장은 눈빛을 반짝였다.
이런 질문을 왜 하겠는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스카우트구나!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저는 모든 일을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진행했습니다!”
“오.”
“보십시오, 회장님.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도 놀랄 정도로 최신 유행에 맞춰서 살고 있습니다.”
“오.”
유 회장의 눈빛이 매우 한심하다는 듯이 빛났지만 협회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판온에 뛰어든 게 젊은 친구들이지만, 그 친구들에게만 내버려 두면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경험도 없고 덜 성숙한 친구들 아닙니까. 저는 이들을 강하게 채찍질하고 휘어잡아서 협회를 운영했습니다.”
“오….”
“조직문화가 딱 잡혀 있어야 일이 잘 굴러가는 법 아니겠습니까?”
“자네 정말 유능한 인재로군!”
유 회장은 놀랐다.
ST 그룹은 대체 이 인간을 왜 사장까지 시킨 거지?
딱 보니까 멍청하고 부지런해서 사고 칠 타입 같은데….
‘감동받으셨군.’
협회장은 유 회장이 말을 잃자 뿌듯해했다.
강한 리더십!
그 힘에 감탄한 것이 분명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게임단에 질서를 가져올 인재로 고민하시고 계시겠지?
유 회장은 이것저것 더 물어봤다. 그러면서 점점 더 확인해 나갔다.
“이런저런 일들… 그러니까 대회 주체나 기부금 운영이나 국대 선발 같은 것, 이건 다 직접 관리했나? 아니면 아랫사람이 했나?”
“당연히 직접 관리했습니다.”
협회장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사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랫사람을 뽑은 게 그였으니 아랫사람이 한 일도 그가 한 일 아니겠는가?
“으음. 그래. 듣고 싶은 건 다 들었네.”
“…!”
“이제 자네를 왜 불렀는지 말해주지.”
“예!”
“내가 누구로 보이나?”
“예?”
“내가 누구로 보이냐고.”
“어… 회장님….”
“그래. 회장님으로 보이겠지? 내가 호구로 보이진 않겠지?”
“어, 어떻게 회장님을 호구로 보겠습니까? 저는 결단코 한 번도 그런 무례한 생각을….”
쾅!
“그런데 감히 유성 게임단에 그딴 제안을 해?!”
“회, 회장님! 진정….”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날 이렇게 무시한 제안은 처음이었거든. 말해보게. 내 귀에 안 들어갈 줄 알고 이딴 제안을 한 건가? 응?”
“아, 아니. 그것이….”
협회장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에 말을 더듬었다.
더 괴로운 건 대체 무슨 제안을 한 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제안을 한 거지?
“말해보게! 무슨 생각이었나!”
“저는 그저 잘해보려고… 제발 고정해 주십…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어떻게 수정할 건가?”
“…원하시는 대로 바로….”
“지금 무슨 제안을 한 건지도 모르지?”
“…….”
“한심하기 짝이 없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회장은 회장인가! 당장 때려치우게!”
협회장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협회 쪽에서 제안이 왔네. 선수 선발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고, 이후 일정에도 무조건적으로 협조해달라고. 내가 듣고서 어처구니가 없었네. 선수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제안이었으니까. 안 그런가?”
“맞, 맞습니다.”
“다른 게임단들은 이런 이야기가 통했으니까 유성 게임단에도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게….”
“잘 생각하게.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했다가는 내가 일을 아주 크게 만들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기부금을 받다 보니….”
“이런 수작이 통하니 다른 게임단들이 성적을 못 내는 거지… 그딴 불손한 마음으로 운영을 하니 선수들이 잘 뛸 수가 있나!”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협회장은 상황을 파악하고 사무총장을 속으로 욕했다.
이런 개자식이…!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냐!
제안도 제안이지만, 그것 때문에 유 회장이 이렇게 직접 불러서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황당하다는 표정이군. 내가 유성 게임단 같은 작은 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말이야. 재창단 때부터 내가 직접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왔네. 이제 좀 이해가 되나?”
“아, 아이고… 그런 줄 알았다면 제가 먼저 찾아뵙고….”
스포츠 구단에서 가장 힘이 센 건 역시 구단주의 애정을 받는 구단이었다.
손익과 상관없이 막강한 지원을 받으니까!
유 회장이 유성 게임단을 직접 돌보고 있었다니, 이제야 그 미친 지원과 성적이 이해가 갔다.
“닥치게. 듣고 싶지 않으니까.”
유 회장은 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화를 진정시켰다.
“자네가 무사히 협회장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자, 자리에서 내려오라고요?”
“…그러면 그지X을 해놓고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했나?”
유 회장의 목소리가 다시 사나워지자 협회장은 급히 말했다.
“물, 물러나겠습니다!”
“이번 일에 책임 있는 놈들 전부 다 명단 작성해서 제출하게. 한 놈이라도 빼놓으면 그룹 법무팀을 만나게 될 거야.”
저승사자보다 무섭다는 유성 그룹 법무팀이었다. 협회장은 새파랗게 질렸다.
“기부금 준 놈, 기부금 받고 한 짓, 그냥 했던 일들 다 정리해서 제출해. 어차피 감사팀 따로 보내서 조사할 테지만 일은 줄이는 게 좋겠지. 대표팀 선발과 일정은 정리 끝난 다음 처음부터 다시 짠다.”
“명, 명단은 나름 완성되어 있는 상태입니다만….”
협회장은 명단은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했다.
기부금 받아가면서 추천 받은 선수들이 있었는데 이게 백지화되면…
“거기 이세연이 들어가 있나?”
“…….”
“김태현은 들어가 있고?”
“…….”
“그런데 무슨 완성은 완성이야! 진짜 한 번 죽고 싶나?!”
유 회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종이가 펄럭이며 난장판이 될 때 김태산이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때를 잘못 잡은 거 같다.”
“무슨 일인데요?”
“몰라. 난리 났는데. 아마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친 직원 아니겠냐?”
“유성 그룹 무섭군요. 저런 원시적인 처벌을….”
유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자네는 여기 왜 있어?!”
“대물 하나 낚아서 어르신께 드리려고 왔는데….”
“허… 뭘 이런 걸 다. 몇 센티쯤 되나?”
유 회장의 표정이 급격하게 누그러졌다. 그 모습에 협회장은 누군지도 모르는 김태산에게 감사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소!’
아까는 먼저 들어간다고 욕했는데 지금 보니 생명의 은인이었다.
“…아니 넌 또 왜 여기 있고!?”
태현이 상자를 들고 온 걸 뒤늦게 발견한 유 회장은 다시 한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외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더니, 이 녀석은 왜…?
“아버지께서 짐 좀 들어달라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무슨 이야기하는지 들었나?”
“진짜 한 번 죽고 싶나 정도만 들었습니다.”
“…….”
하필이면 마지막 말만 들었나!
유 회장은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 태현에게도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당사자인 만큼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앉아보게. 내 설명해 줄 테니까.”
“예.”
김태산과 태현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유 회장 바로 앞에 있는 의자는 협회장이 앉아 있었기에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야 했다.
“저 작자 치우고 앉게.”
“회, 회장님!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최선을 다해 회장님을 위해 일하는….”
“비키시라잖나.”
“비키시랍니다.”
두 떡대가 양쪽 어깨를 붙잡고 들어 올리자 협회장은 가볍게 붕 떴다.
‘보, 보디가드였나?’
뭔 놈의 힘들이….
협회장을 쫓아내고 나서야, 김태산은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엇!”
“?”
“그, 그 양반 누군지 알겠다!”
“누군데요?”
“협회장이잖아! 넌 왜 선수가 협회장도 몰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