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06화
태현의 예상은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차이점이 있다면 유 회장이 좀 더 분노했다는 점 정도?
-허허. 우리 유성 게임단의 주장, 유성 게임단의 희망, 판온 마법사 랭커 1위, 북미 판온 인기투표….
-…회, 회장님. 민망하니 그 정도만 말하셔도 됩니다.
-아직 더 많이 남았는데. 그래. 우리 이세연 선수는 무슨 일로 오셨나?
유 회장은 자기 아들을 대할 때보다 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사장이 들었다면 ‘아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하면서 울먹였을 정도로 상냥한 태도!
그러나 유 회장이 이러는 것도 당연했다.
그 밑바닥에서 헤엄치고 있던 유성 게임단을 화려하게 부활시켜, 지금은 그룹 내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 * *
-유성 게임단이 이번에 그렇게 홍보 효과가 대단했다고….
-광고가 즉시 완판됐다고….
-10년 동안 했던 마케팅 중 가장 효과적이었다면서?
-북미 시장 점유율이 확 뛰었대요.
-허. 이거 주도한 거 회장님이시지?
-회장님 맞는 거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부정하셨으니 회장님밖에 없죠. 누가 그런 과감한 투자를 했겠습니까?
-역시 회장님이시다.
-처음에는 솔직히 노망나신 줄 알았는데 역시 회장님이십….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그룹의 사람들은 암암리에 회장의 리더십과 안목을 찬양하고 있었다.
다들 판온의 가치를 모를 때 가장 먼저 파악하고 투자를 하신 거구나!
…물론 회장 본인이 판온 즐기려고 투자한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성 게임단 전용 창고 구역에는 아예 낚시용 아이템만 보관하는 창고가 따로 있는 것이다.
회장이 사비를 슬쩍 써서 지은 곳!
남들이 알면 창피하니까 외적으로는 게임단 재산이었다.
-와. 유성 게임단은 시설도 시설인데 판온 내 아이템도 진짜 많이 사나 보네. 각종 소모 아이템들 싹 쓸어가고 있잖아?
-유성 게임단에 납품만 해도 판온에서 놀고 먹는다는 말이 있지.
-대기업은 게임에서도 대기업이구만. 어. 그런데 낚시 아이템들은 왜 사려는 거지?
-몰라. 선수들한테 필요한가 보지.
* * *
어찌 되었든 유 회장은 이세연이 ‘회장님 유성 게임단 프런트를 전부 다 해고하시고 유성 전자 본사 건물을 파랗게 칠하세요’라고 말해도 ‘왜 건물을 파랗게 칠해야 하나?’부터 물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판온협회에서 요청이 와서 잠깐 면담하고 왔었는데….”
“아. 그랬군. 뭘 그런 걸 직접 가고 그러나? 판온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텐데. 다음부터는 그냥 말을 하게. 이쪽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김태현도 간다고 해서 그냥 같이 갔었어요. 어쨌든….”
태현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 회장의 표정이 매우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좋으면서도 얄미운, 복잡한 기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세연의 설명을 들은 유 회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이 새끼들이…?
“미친 것인가??”
“회장님. 진정하셔야….”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유 회장은 옆에서 말리는 비서실장을 떨쳐내고 사납게 외쳤다.
“이 작자들이 대체 유성 게임단을, 유성 그룹을 뭘로 보고 이런 수작질을 하는 거지?”
“아, 아마 그룹 본사에서 게임단에 직접 관심을 가지는 일은 드무니, 프런트 쪽과 적당히 잘 협의해서 서로 이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
비서실장은 급히 설명에 나섰다. 안 그러면 회장이 그부터 한 대 칠 것 같았던 것이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이야 게임단에 환호했지만, 그룹 전체에서 보면 게임단은 아주 작은 홍보용 기업일 뿐이었다.
왜 게임단에 별 관심도 없는 낙하산 인사들이 많이 앉겠는가.
게임단은 그냥 홍보만 잘해주면 됐다.
비용이 너무 많이 나가거나 사고 치면 잘라낼 수 있는 그런 게 게임단이었던 것이다.
별 관심 없는 낙하산 인사들이 게임단 요직에 많이 앉으니, 협회 쪽에서는 이야기하기 더욱 편했다.
-허허, 이번에 그쪽 팀 선수들을 꼭 저희 대회에 출전시켜주시면….
-어. 대회가 겹치지 않나?
-동시에 출전하면 되죠. 선수들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선수들이 불평할 것 같은데….
-사장님! 사장님이 게임단의 주인이십니다. 사장님께서 강하게 이끌지 않으면 게임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긴 그렇긴 해. 알겠네.
서로 적당히 이득 챙겨주면 선수를 혹사시키든 말든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유 회장도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한마디로….
유성 게임단을 호구로 본 게 맞다!
“협회장 불러.”
“이, 이번에 말을 꺼낸 건 사무총장 쪽이니 일단 사무총장에게 항의 서한을….”
“아니. 협회장 불러. 협회장 뭐하는 새끼야?”
“ST 그룹에서 서비스 쪽 사장을 역임했던 사람인데… 회, 회장님. 아마 협회장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걸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원래 이런 일은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하는 법 아닙니까.”
“사장이 자기 밑에서 일어난 일 몰랐으면 대가리 박아야… 아. 이세연 선수. 이만 가 봐도 좋아요. 허허. 저번 경기 너무 잘 봤고. 파이팅입니다.”
유 회장은 이세연이 아직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말을 바꿨다.
이세연은 슬슬 뒷걸음질쳤다.
“감, 감사합니다?”
“이세연 선수! 오해하지 마세요!”
“왜 갑자기 존댓말을…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세연이 나가는 걸 보자 비서실장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앗…!
붙잡았어야 했는데!
지금 이세연 선수가 나가면 이 안에는 성난 유 회장과 그 둘만 남는 것이다.
“불러!”
“예… 부르겠습니다….”
비서실장은 협회장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그룹에서 일한 다음 나름 명예직이라고 협회에 앉았는데, 밑에 웬 미친놈이 이상한 벌집을 건드려서 그걸 다 뒤집어쓰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 회장 말대로 한 단체의 주인이라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아랫사람이 이름 팔고 다녔으면 윗사람도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 *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께서 날 뵈려고 하신다는데?”
“ST 그룹에서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위.”
“??”
“유성 그룹.”
“!”
협회장은 싱글벙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영광이었다.
ST 그룹에서도 한직을 전전하다가 은퇴한 그였다.
어쩌다가 협회장이라는 명예직을 얻긴 했지만, 여긴 그냥 이름만 회장이었지 별로 남는 게 없었다.
“내 생각에는… 회장님께서 내게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 걸지도 모르겠어.”
“어….”
“세상에. 여기 협회장을 할 때는 그냥 뭔 애들 장난 같은 짓을 하나 했는데… 이게 이렇게 전화위복이 되다니. 요즘 판온이 그렇게 인기라면서?”
“아, 예.”
사무총장은 진땀을 닦았다.
뭔가….
뭔가 불길했던 것이다.
왜 하필 유성 그룹 회장이 부르는 거지?
‘설마… 아니겠지. 다른 이유겠지. 회장님이 직접 부르는 건데. 회장님이 일개 게임단을 왜 챙기겠어.’
협회장의 말대로, 요즘 판온의 인기가 뜨거워지면서 협회장의 경력이 주목받은 걸 수도 있었다.
유성 게임단도 잘나가니, 협회장을 스카우트해서 어딘가 요직에 앉히려는 걸지도….
그 기대 때문인지 협회장은 매우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이런. 그런데 그런 제안을 받게 되면 어떡하지? 자네들을 두고 협회를 떠나야 한다니.”
“아닙니다. 회장님. 좋은 기회가 오셨는데 잡으셔야죠.”
“하하. 자네만큼 충신이 없어.”
협회장은 사무총장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술자리에서는 온갖 아부를 하며 비위를 맞춰주고, 일에서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다 알아서 잘 하는 사무총장이었다.
E스포츠에서 오래 일한 사람답게 정말 잘하는구나!
“내가 만약 협회장 자리를 놓게 된다면… 자네를 추천하지.”
“!!!”
사무총장은 눈을 크게 떴다.
기회가 이렇게 오다니?
“아, 아닙니다. 저는 아직 부족….”
“아니야! 자네면 충분해. 자네가 부족하다면 누가 충분하단 건가? 내가 떠난 빈자리를 자네가 꼭 채워주게.”
“…회장님!”
“그래!”
둘은 뜨겁게 악수를 나눴다. 지금 둘 사이에 무언가 진심 같은 게 통한 것 같았다.
* * *
“아니. 아버지. 혼자 가시지 왜 저를….”
“가끔은 나와서 좀 돌아다녀야 몸에도 좋은 법이다.”
“저 맨날 운동하거든요. 아버지보다 몸 좋은데.”
“…….”
김태산은 한 대 때리려다가 말았다. 아쉬운 입장이었던 것이다.
“자. 이거 들어라.”
“???”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건네는 김태산의 모습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뭡니까?”
“친구의 친구가 잡은 대물이지.”
“낚시 시작하셨어요?”
“아니. 난 낚시는 영….”
유 회장이 그렇게 낚시를 주장했지만 김태산은 좀이 쑤셔서 힘들었다.
아무래도 낚시는 좀 더 이따가 해도 될 거 같아!
“그런데 이런 걸 왜?”
“어르신 드릴 거다. 내가 들고 가면 폼이 안 나잖아.”
“…아. 그러니까 지금 짐 들 사람 없어서 바쁜 아들을…?”
“어허. 부자 관계에 이러기냐? 타기나 해라.”
김태산은 억지로 태현을 구겨 넣었다.
“오늘도 그 멍청한 친구 밥해주고 왔냐?”
“걔 하도 욕 많이 먹어서 요즘은 지가 알아서 밥 해먹어요.”
“진짜?”
“반찬은 만들어주니까 사실 밥만 해먹긴 하는데… 뭐 그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죠. 그런데 어디 가시는 겁니까?”
“어르신 드린다니까.”
“아. 회장님이요?”
“응. 이거 받으면 아주 좋아하실 거다.”
“그냥… 횟감이 필요하면 사드시면 되지 않나…?”
태현의 의문에 김태산은 혀를 찼다.
“회 못 드셔서 갖다 드리는 게 아니라 인마! 이런 걸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낚시꾼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거지.”
“어… 낚시꾼이라면 자기가 낚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은 가끔 거짓말을 해서라도 허세를 부릴 때가 있단다….”
“앗.”
태현은 김태산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회장님이 자기가 낚은 것처럼 하고 싶어서 커다란 물고기를 받으려고 한다 이건가?
‘짠하군….’
물론 짠한 건 짠한 거고 나중에 놀릴 건 놀리는 거였다.
게임에서 만나면 놀려야겠다!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직원이 김태산의 얼굴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태현이 없는 동안 많이도 온 모양이었다.
“여기 얼마나 오셨길래?”
“어르신 심심하실까 봐 산책하다가 생각나면 들르고 그랬지. 야. 그거 똑바로 들어라. 상하면 안 돼. 진짜 큼지막한 놈이라니까.”
태현은 투덜거리며 짐을 들었다. 솔직히 덩치만 보면 김태산도 저거 충분히 들을 수 있는데….
“근력 스탯이 오르는 기분이 들지?”
“아버지… 현실은 게임이 아닌….”
“시꺼.”
두 부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앞에는 처음 보는 손님이 와 있었다.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기 손님으로 올 정도면 재계에서 유명한 사장님 아닙니까?”
“어…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본 것 같은데….”
김태산은 얼굴을 찌푸렸다.
판온 협회 회장이었지만 그것까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이런. 먼저 손님 와 있었으면 물어보고 올 거 그랬다.”
“세상에서는 그걸 보통 예의라고….”
“시꺼.”
김태산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 오세요. 회장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 저 사람이 먼저 온 것 아닌가?”
“회장님께서 사장님 오시면 언제나 먼저 들여보내라고 하셨거든요. 기다리시게 하면 저희가 혼납니다.”
직원의 말에 김태산은 감동해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우시는 거 아니죠?”
“먼지가 눈에 들어간 거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