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205화 (1,204/1,826)

§ 나는 될놈이다 1205화

그리고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아무리 대형 게임단들끼리 모였다고 해서 설마 무리한 요구를 하겠어?’

태현과 이세연은 일반적인 선수들과는 그 위상이 달랐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수!

무리한 요구도 사람 봐가면서 하는 거지, 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이 뭐가 아쉽다고 그런 걸 받아들이겠는가.

그냥 거절하면 그만이지.

* * *

태현은 입을 떡 벌렸다. 이세연은 신기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와, 쟤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태현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황당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하하.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김태현 선수.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사무총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우 공손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하는 소리는 개소리였다.

-저희가 이제 곧 선수 선발을 할 텐데, 두 분은 무조건 뽑아드릴 테니, 저희가 뽑는 다른 선수들에 대해 어디 가서 불평하지 마시고, 저희가 일정 짤 텐데 여기에 무조건적으로 맞춰 주시고, 참. 인터뷰 하면 적극적으로 좀 찬성하고 해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이걸 매우 길고 장황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케인 같이 경험이 부족한 선수였다면 달콤한 말에 속아서 ‘와!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신다니! 충성충성충성!’을 외쳤겠지만, 여기 앉아 있는 건 태현과 이세연이었다.

나이는 젊어도 속에는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배배 꼬인 둘!

무슨 소리를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미쳤나?’

‘누굴 케인으로 아나?’

사무총장은 둘을 얕보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 하더라도 아직 젊었던 것이다.

권위와 이름, 그리고 그럴듯한 말로 꼬드기면 넘어올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대표팀 입단을 시키면 그 다음은 내가 편한 대로 할 수 있지. 적당히 튕기고 사인해라.’

이세연이 말한 것처럼, 한국판온협회는 대형 게임단들의 입김이 아주 강한 곳이었다.

벌써 이번 한국 대표팀을 구성하는데 앞서서 수십 가지 부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A팀 탱커가 아주 대단한데 이번 대표팀 선발에 꼭….

-우리 B팀 딜러가 그렇게 킬을 잘한답디다.

-C팀 딜러 킬뎃 봤소? 눈깔 있으면 이 딜러를 뽑아야… 흠흠.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은 아닌데, 솔직히 차기 김태현이라고 생각하오.

-차기 김태현은 무슨… 김태현이 팔십 먹어도 그쪽 딜러보단 잘하겠수다.

-뭐, 뭐? 이 작자가? 그래서 너희 팀 승점이 몇 점인데! 2부 리그도 못 올라오는 게!

-국… 국내 대회에서는 순위권에 들었다고!

-연습생 리그를 누가 쳐줘! 정규 방송도 안 해주는 그깟 리그!

평소 듬뿍듬뿍 기부를 해온 게임단들은 이번 기회에 뽕을 뽑으려고 하고 있었다.

1부 리그의 어마어마한 인기를 본 게임단들은 완전히 눈이 돌아간 것이다.

-유성 그룹, 북미에서 판매량 1위 달성… E스포츠 마케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

-팀 KL, 가장 유명한 한국 게임단….

1부 리그, 아니, 2부 리그까지만 들어가도 막대한 홍보 효과에 중계권료까지 들어왔다.

원래 E스포츠 게임단은 적자가 나더라도 모기업에서 투자받고 운영하는 식이 많았지만, 판온은 이야기가 달랐다.

워낙 미친 인기 때문에 몇 배로 흑자가 남고도 남는 것!

그러니 리그에 끼지 못한 기존 게임단들이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국내에서 이것저것 독자적인 리그를 열고 이벤트 대회를 열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 봤자 사람들은 1부 리그 경기를 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판온 월드컵은 정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선수 한 명만 출전시키면, 심지어 예비 후보로만 출전해도 대박이다!

어떻게든 자기 팀 선수를 끼워 넣으려는 필사적인 발버둥이 사방에서 보이고 있었다.

물론 너무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웬 듣도 보도 못한 선수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너희 뇌물 받음??’ 같은 말이 바로 나올 것이다.

안 그래도 여론이 안 좋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반드시 이 둘은….’

그래서 이 둘이 더욱 필요했다.

이번 한국 대표팀을 구성하는데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두 선수의 권위!

다른 한국 선수들도 일류라고 평가 받는 선수들이 많았지만, 둘은 정말 대체불가 수준이었다.

초일류 이상!

만약 둘을 팀에 넣지 못하면 협회고 뭐고 최소 몇 명은 목이 날아갈 것이다.

책임지고 사표를 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 둘이 적극적으로 협회를 도와준다면?

둘이 ‘이 선수는 좋은 선수다! 협회가 잘 뽑았다!’, ‘협회는 너무 친절하다! 우리 잘 도와준다! 우린 협박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이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흠.”

태현은 잠시 멈췄다. 사무총장은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하냐는 뜻이었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그런데 선수 잘 뽑았다고 동의할 거면 누굴 뽑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 김태현 선수. 아직 안 정해진 상태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게 협회에서도 이런저런 일들을 고려하다 보니 좀 늦어지네요. 그래도 저희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습니까? 혹시 저희를 못 믿으시는 건 아니죠?”

“어… 네. 못 믿는데.”

“풉.”

이세연은 마시던 물을 작게 뿜었다. 그녀는 사레가 들려서 콜록댔다.

저런 미친…!

‘정말 브레이크가 없구나!’

판온에서만 없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네, 네? 못 믿는다고요?”

“당연히 못 믿죠. 저희가 뭐 아는 사이도 아니고, 선수 명단도 못 봤고,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기준도 모르는데 선수 잘 뽑을지 못 뽑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 저희가 이제까지 해온 일들이 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제가 인터뷰에서 지지하길 원하시면 제대로 된 명단 갖고 오세요.”

“김태현 선수. 저희도 저희 업무가 있는데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아. 일정. 일정에 협조해달라고 하실 거면 일정 계획을 짜야지 왜 이것도 안 짜놓고 협조해달라고 하십니까? 어떻게 굴러갈지 알아야 협조가 가능하죠.”

아픈 곳을 찔린 사무총장은 움찔했다. 구체적인 일정 계획을 짜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대표팀이 결정되면 김태현이나 이세연은 최대한 많이 행사에 내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둘이 있는데 홍보를 안 하는 건 멍청한 짓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빡센 일정을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아직 안 결정됐다’고 말한 건데….

“팀 KL 같은 게임단에서도 일정은 미리 짜서 준비하는데 여기는 왜 일정이 없죠? 동아리도 아니고.”

“업무가 많고 과중한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그럼 사람을 더 뽑으시던가… 그리고 협회가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찬성하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럼 욕해도 되죠?”

이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그런 건 또 아니고….”

“욕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예나 아니오로 대답해 주세요. 자. 빨리.”

“그러니까 그게….”

“아. 빨리 대답해 주세요.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뭡니까? 제가 말한 게 맞네요.”

“아니, 대표팀 선수로서 협회를 욕하면 운영이….”

사무총장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김태현 선수. 물론 저희의 방침이 아직 덜 다듬어지고 미숙한 부분이 있어 불만이 있으실 수는 있습니다.”

“덜 다듬어지고 미숙한 게 아니라 그냥 양심이 없는 것 같….”

사무총장은 못 들은 척 비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팬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팬들은 오매불망 김태현 선수의 대표팀 참가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태현 선수가 참가하지 않으면 팬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슬퍼하고 실망하겠죠?”

“바로 그겁니다! 그 슬퍼하고 실망하는 팬들을 보고 싶지는 않으시잖습니까! 팬들의 기대를 위해 뛰는 것, 그것이 선수 아닙니까?”

사무총장은 탁자를 치며 뜨겁게 외쳤다. 자기가 말하다 보니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져서 더욱 열기가 올랐다.

“함께 갑시다. 김태현 선수. 저희의 미숙한 부분은 하면서 고쳐나가겠습니다. 저희도 김태현 선수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니 김태현 선수도 최선을 다해서 저희와….”

“으음. 어쩔 수 없군요.”

태현의 말에 사무총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감정 호소에 약하구나!

“그러면 참가하시는….”

“아니. 어쩔 수 없이 실망시켜야겠다고요.”

“?”

사무총장은 멈칫했다.

뭔…?

아니….

-어쩔 수 없이 팬들을 실망시켜야겠다!

“?!?!”

깨달은 사무총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 아니. 그러시면 안 되죠!”

“아. 저도 바쁩니다. 판온에서 퀘스트도 깨야 하고 레벨 올려야 하고… 지금 안 그래도 몇몇 랭커들이 레벨 300 넘어서 쭉쭉 올려가고 있는데 제가 늦어지면 책임져주실 겁니까?”

옆에 있던 이세연이 움찔했다. 찔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거 말고도 게임단 운영하고 계획 짜고 전술 전략 고민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시간을 써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게 맞겠죠.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 다른 선수들한테도 실례 아닙니까?”

‘집안일?’

이세연은 사이에 뭔가 이상한 단어가 있었던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 선수들 중에는 좋은 선수들 많으니 저 없이도 잘 할 겁니다. 그러면 파이팅!”

태현은 주먹을 흔들며 응원했다. 이세연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놀리는 것 같았다.

“이, 이세연 선수. 설득 좀 해주세요.”

“제가요?”

이세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가 김태현을?

‘얘가 내 말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제가 뭐라고 어떻게 설득하나요?”

“두 분은 판온의 미래를 짊어질 라이벌 아니십니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세연은 뭔 개소리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태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런 관계긴 하죠.”

“????”

이세연이 고개를 홱 돌려서 쳐다보았다.

얘가 방금 마신 게 물이 아니라 술이었나?

솔직히 태현이 저렇게 말해주니 기쁘기도 하고 약간 민망하기도 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게 뭐라고 표현하기 애매모호한 감정이….

“그러니 남은 건 이세연 선수하고 이야기하시면 되실 것 같습니다.”

물론 태현이 그런 말을 한 건 이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오자 이세연은 대응에 나섰다.

이세연은 태현처럼 들이받지 않았다. 훨씬 더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대응했다.

“제가 유성 게임단 주장이라 상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아, 아니. 이세연 선수 정도면 누가….”

“같은 팀인데 의견은 나눠야죠. 유성 게임단 쪽으로 연락주세요.”

이세연은 돌아가자마자 사실을 보고한 다음 연락을 차단할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유성 그룹 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옆에서 그걸 듣고 있던 태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회장님이 들으면 난리칠 것 같은데….’

거래도 상대 봐가면서 해야 했다.

유성 게임단은 그냥 게임단이 아닌, 회장이 직접 관심을 갖고 상시 모니터링하는 게임단인 것이다.

그런 곳에 ‘그쪽 선수 보내주세요 ㅎㅎ 대신 홍보 제대로 해드릴게요 ㅎㅎ’ 해봤자 거래가 통할 리가 없었다.

담당자가 팀에 대한 애정 없이 돈만 관심 있는 게임단이면 모를까, 유 회장은 애정이 넘쳐서 문제인 사람.

법무팀부터 전략팀까지 불러서 책상 뒤엎고 난리칠 거 같다!

-이 XX XXX들이 내가 키워 놓은 팀에 어디서 XX이야? 유성 게임단이 비밀번호 찍을 때는 불러주지도 않던 놈들이! 예전에 유성 게임단에서 국가대표 나간 선수 있어? 없지?

-회, 회장님. 그 협회가 같은 협회가 아닌데….

-그놈이 그놈이지! 용서하지 않겠다! 저 자식들 분명 돈 받았겠지. 돈 넣은 놈들부터 알아 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