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85화
사디크 탓을 다 하고 나서 태현은 인질을 확인했다.
인질 NPC는 자기가 사디크의 화염으로 불탈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외쳤다.
“구해주러 오실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누군가 도와주러 와야 하는데, 아무도 안 와서 왜 이러나 싶던 찰나였습니다.”
[실종되었던 베스고 백작의 숨겨진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데르고 교단은 귀족들의 자식을 인질로 삼아 조종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흉악한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으십시오!]
<인질 구출-이데르고 교단 토벌 퀘스트>
사악한 이데르고 교단은 대륙의 유명 인물들을 조종하기 위해 인질을….
<가끔은 나쁜 짓도-아키서스 교단 퀘스트>
인질을 잡는 건 꼭 다른 교단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인질로 잡아….
‘아니 이런 미친.’
인질 구출하란 퀘스트는 이해가 갔지만, 이번 기회를 틈타 ‘우리도 인질 좀 잡아보자’ 하는 퀘스트가 뜰 줄이야!
물론 태현은 무시했다.
[퀘스트를 포기했습니다.]
지금 골드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교단이 위험한 것도 아닌데 인질극을 왜 하겠는가.
다른 상황이면 모를까….
“저, 우선 마실 것과 먹을 걸 좀 주시겠습니까? 이 냄새 나는 놈들은 제대로 된 걸 준 적이 없어서요.”
베스고 백작의 아들은 손을 내밀며 음식과 마실 걸 요구했다.
누구한테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건방진 태도였다.
그러나 태현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일단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음. 적당한 게 있을지 모르겠군.”
태현은 굴러다니는 쇠사슬을 집더니 주물주물해서 뭉치기 시작했다.
-아키서스의 권능 요리!
[세상의 모든 것을 아키서스의 힘으로…]
[……]
[……]
<아키서스의 권능 요리>는 식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주는 스킬이었다.
길바닥 흙도 먹게 만들어주는 스킬!
…물론 그것과 맛은 별개였다. 특히 이런 식으로 대충 만들 때는 맛은 감안해야 했다.
[철분이 풍부할 것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무쇠주먹밥을 만든 태현은 백작의 아들에게 건넸다.
보기 드물게 친절한 모습이었다.
“…정신 나갔습니까?!”
탁!
백작의 아들은 태현의 손을 쳐내더니 일갈했다.
사실 당연한 반응!
이데르고 교단도 맛없는 빵과 냄새나는 물을 갖고 왔지 ‘야 쇠사슬 먹어봐’ 이러진 않았다.
“지금 쳐낸 거냐?”
“먹을 걸 줘야지 이딴 걸… 절 우롱하시는 겁니까?! 구출하러 오셨으면 제대로 하십시오!”
“사디크의 화염. 화염 채찍.”
화르르르륵!
태현은 사디크의 화염을 불러온 다음 언령 마법으로 채찍 형태를 만들었다.
사디크의 화염은 신성 권능이라 MP 소모도 적어서 많이 썼지만, 언령 마법은 MP 소모가 심해서 잘 쓰지 않고 아끼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썼냐면….
“으아아악!”
“하하. 손이 미끄러졌다.”
콰직! 콰직!
[베스고 백작의 아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
[……]
경고 메시지창이 여럿 떴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어차피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내가 지금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몇 놈이나 치우고 온 줄 아냐? 뭐? 음식이 맛이 없어?”
“으아! 으아악! 제발 멈춰주십시오!”
“세상에는 온갖 맛없는 걸 먹으면서도 열심히 사는 노예도 있어, 이 자식아!”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
[……]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백작 아들은 완전히 질려서 고개를 숙였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먹겠습니다! 먹겠습니다!”
“그래. 감사하면서 먹어라. 여기 오래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말하던 태현은 의아해졌다.
베스고 백작은 딱히 이 아들 놈을 찾던 것 같진 않은데….
‘포기한 거 아냐?’
찾다가 안 찾아지니까 잊고 포기했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별 관심 없었던가.
태현은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건 좀 불쌍했던 것이다.
-침입자 놈! 감히….
뒤에서 이데르고 교단 전사가 나타났다가 화염 채찍 한 방에 나뒹굴었다.
-크아악! 불이! 불이! 내 역병 방어막을!
“여기 오래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뭐 중요한 곳은 없나?”
“예? 어….”
백작 아들은 힐끗 태현의 손을 쳐다보았다.
한 손에는 검, 다른 손에는 불타는 화염 채찍.
못 떠올린다고 저게 나한테 날아오진 않겠지?
“신, 신전 가운데에 중요한 놈들만 모여서 기도하던 성소가 있는데… 거기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흠. 이미 많이 불태운 것 같은데… 그래, 가서 확인해 보자.”
기도하는 성소나 석상은 이미 충분히 태운 기분이었지만, 태현은 가보기로 했다. 손해 볼 거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카르바노그. 이제 와서 처음 든 생각이지만, 여긴 아키서스 교단 신전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
보통 아키서스 교단 신전이었으면 이쯤 태웠을 때 아키서스 교단이었던 흔적이 좀 나와 줘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이데르고 교단 신전 같아!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인 일 어쩌겠어. 이데르고 교단이나 확실하게 토벌해야지.’
[그런 긍정적인 사고방식 아주 좋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 * *
태현 일행은 정석적으로 이데르고 교단 신전을 토벌했다.
오랜만에 하는 멀쩡한 던전 공략!
방 안으로 들어가서 적들 쓸어버리고 나와서 다음 방 들어가고….
겸사겸사 화염 좀 풀어버리고….
‘그런데 여기 보스 몬스터도 없나?’
태현은 의아해하며 적들을 쓸어버렸다.
보아하니 상대 레벨이 200~300을 넘지 않는 것 같은데….
백작 아들 납치할 정도면 좀 더 수준이 높아야 하지 않나?
[신전 중앙의, 이데르고 비밀의 성소에 도착했습니다!]
[이 신성한 곳을 불태울 경우 이데르고 교단이 극도로 분노할…]
“사디크의 화염!”
이미 사이가 충분히 안 좋았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사이!
-크아아악! 이 침입자 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이데르고 님의 저주가 네게 있으리라!
-노예가 돌아오면 너는….
“?”
태현은 케인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케인을 쳐다보았다.
“노, 노예가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군.”
활활-
태현이 놓은 불은 중앙 성소를 감싸며 빠르게 태우기 시작했다.
이데르고 교단의 각종 아이템들과 장식물들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잘 타네.”
“…근데 뭐 보스 몬스터 안 나오나 진짜?”
태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살짝 당황했다.
이 던전에는 뭐 그런 것도 없어?
우지끈!
쿠당탕!
[이데르고 교단의 중앙 석상이 무너져 내립니다!]
[신성한 화염으로 인해 이데르고의 오염이 제거됩니다!]
[봉인된 곳으로의 길이 열립니다!]
[아키서스 고대 신전이 나타납니다!]
“어?”
“?????”
중앙 석상이 무너져 내리자 그 밑에서 나타난 지하 문!
정말로 아키서스 신전이 나타나자 태현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역시 그랬어! 이데르고 교단 놈들! 감히 아키서스 신전을 점령해놓고 모르는 척을 하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키서스 신전 위에 새로 신전을 지은 거긴 했지만 뭐….
<화신의 성장-아키서스의 화신 직업 퀘스트>
이데르고 교단은 아키서스의 옛 신전을 발견하고서 안으로 침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그들은 그 위를 봉인하고 새로 신전을 세워 덮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흉악한 계획은 당신 덕분에 실패하게 되었다!
당신은 사악한 악신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아키서스의 옛 신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공간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정당한 자격을 가진 아키서스의 화신으로서 안으로 들어가라!
“…!”
한마디로 이 신전은 아키서스 고대 신전을 봉인하기 위해 새로 세워진 신전!
이데르고 NPC들을 보아하니 하도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 목적으로 지어진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데르고 교단 NPC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로 막아 놓은 거야?’
태현은 고대 신전의 문을 열었다.
[준엄한 아키서스의 심판이 당신을 시험합니다!]
[아키서스의 허락이 없으면 무시무시한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아키서스…]
[……]
발걸음을 내딜 때마다 나오는 메시지창.
‘아. 그렇군.’
태현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아키서스의 신성 영역> 스킬을 썼을 때와 비슷한 공간이었다.
매 순간마다 행운 굴림 해서 실패하면 저주 받는 곳!
태현처럼 자격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몇 번은 운 좋게 통과해도 결국 아작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밖에서 기다려. 괜히 들어왔다가는 피 볼 수도 있겠다.”
태현은 안으로 내려갔다.
아키서스의 고대 신전이라면 대체 어떤 게 있을까?
‘흠. 정말 뭐가 있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데.’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신전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정사각형의 지하 공간에는 소박한 의자 여러 개와 아키서스의 문양이 새겨진 벽이 전부였다.
‘비싼 조각상은 좀 있어주길 원했는데….’
[봉인된 아키서스의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래. 이런 거라도 있어야지.’
태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전통적으로 아키서스는 뽑기와 궁합이 좋은 신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했으면 뭔가 괜찮은 게 나오지 않겠는가!
[카르바노그가 잘 보라고 말합니다. 저건 뽑기가 아니라 그냥 가둬 놓은 상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군.”
랜덤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 봉인해 둔 상자!
‘그래도 좀 좋은 게 있지 않을까?’
[아키서스의 화신은 아키서스의 이름으로 이 봉인을 풀 수 있습니다.]
[<아키서스의 봉인>을 풀고 이 상자의 내용물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그래.”
파아아앗!
[아키서스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그 많은 봉인이 걸려 있던 상자가 순식간에 풀리더니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강력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이데르고의 조각>을 얻었습니다!]
[<이데르고의 조각>은 이데르고 교단의 강력한 성물이자 최고로 신성한 성물입니다. 이데르고가 깃들어 있는 이 성물은 아무나 다룰 수 있지 않습니다.]
[이데르고의 진정한 힘이 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
태현은 살짝 당황했다.
아키서스 관련 아이템을 줄 줄 알았는데….
‘아니. 생각해 보니 그냥 이데르고 놈들 봉인하느라 만든 신전일 수도 있겠군.’
보통 <이데르고의 조각> 같은 건 파괴하겠지만 그걸 굳이 상자에 넣어서 곱게 보관하는 건 좀 아키서스답긴 했다.
태현은 <이데르고의 조각>을 손에 들었다.
강력한 아이템이라는 건 알겠지만 이걸 태현이 잘 쓸 수 있을까?
[이데르고가 그 더러운 손을 놓으라고 분노합니다!]
“!”
태현은 놀라서 조각을 떨어뜨렸다.
[카르바노그가 놀라워합니다! 이데르고가 어디 갔나 했더니, 설마 조각 속에 자신을 넣어 놓다니!]
악마 공작들과 신들이 한바탕 싸우고 나서 둘은 서로 대륙을 완전히 떠났다.
카르바노그 같이 끼지도 못한 예외 정도만 대륙에 남아 있었지, 메이저한 신들은 다 떠났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이데르고는 달랐다.
떠나는 대신 자신을 조각조각 쪼개서 대륙에 퍼뜨린 것이다.
다른 신들과 악마의 감시도 피하고, 나중에 다 모으면 부활도 가능하고!
꼼수였지만 정말 과감한 꼼수였다.
조각이 사라지면 그만큼 타격이고, 행여나 남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렇게 봉인이 되는 것이다.
“멍청한 짓 같은데?”
태현은 단칼에 잘라 혹평했다.
차라리 대륙을 떠나서 멀리서 힘만 주는 다른 신들이 더 똑똑한 것 같았다.
이런 짓을 했다가 실패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데르고가 자신의 신도들을 두려워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들은 조각을 다시 모아 자신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아니. 지금 이렇게 잡혔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