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77화
그러나 지금 당장 명성을 낮출 방법은 없었다.
태현은 매우 찜찜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베스고 백작 앞에 섰다.
“하하! 이렇게 봐도 좋고 저렇게 봐도 좋군!”
베스고 백작은 예술가의 얼굴로 태현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주물럭거렸다.
유지수가 그 모습에 분노해서 활을 꺼내 들었다.
“저 새끼가….”
“참, 참으세요.”
“언니는 저걸 보고서도 화가 안 나세요?!”
“NPC인데 그럴 수도 있…지는 않긴 한데 어쨌든 지금은 참아야 하잖아요!”
유지수는 씩씩대며 활을 집어넣었다.
베스고 백작은 태현을 보며 고민된다는 듯이 말했다.
“하, 고민이군. 그림으로 표현을 해야 하나, 조각으로 표현을 해야 하나, 노래로 표현을 해야 하나….”
“백, 백작님. 이 이름도 모르는 천한 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뒤에 있던 예술가 NPC들이 질투하면서 말했다.
어디서 이름도 없는 모험가 놈이 갑자기 끼어들다니!
그 말에 베스고 백작을 따라다니던 플레이어들도 응원했다.
‘좀 더 따끔하게 혼내줘!’
‘맞아.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저런 놈이….’
‘근데 뭘 해야지 백작한테 저런 대접을 받아?’
‘외모에 버프 걸어야 하나?’
‘외모에 뭔 버프를 걸어야 저런 반응이 나오는데…?’
플레이어들은 질투하면서도 궁금해했다.
대체 뭘 어떻게 키웠길래 만나자마자 백작이 저러냐?
“보는 눈이 없군! 이 사람을 보게!”
“천한 놈이 뭐 그리… 허어억!”
“크어어엇!”
예술가 NPC들은 벌벌 떨었다.
뭐지?
이 평범한 얼굴에서 나오는 신성한 아우라는?
게다가 왠지 모르게 명예로워 보이기까지 해!
“…….”
태현은 포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명성이 매우 높…]
[신성이 매우 높…]
[<예술적인 후광> 버프를…]
[……]
[카르바노그가 인기에 감탄합니다!]
명성이나 신성 스탯이 이런 부분에 쓰이다니!
아키서스 교단에는 예술가 NPC들이 거의 없었다.
다른 분야 NPC들도 모으기 힘든데 예술 쪽 NPC들이 있을 리가 없는 상황!
“백작님! 왕자 전하에게 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 좀 기다려보게! 지금 이런 예술을 앞에 뒀는데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친밀도가 하락합니다.]
[……]
“?!”
말 한 마디 잘못 걸었다가 애써 쌓은 친밀도를 날린 플레이어는 울상을 지었다.
귀족 놈들 성격 까다롭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백작님. 죄송한데 제가 바빠서….”
“기다리게! 가지 말게! 모델을 해주면 보상을 주겠네!”
<예술가의 영감-미리반 시 퀘스트>
예술의 후원자이자 추구자인 베스고 백작은 언제나 예술을 쫓는 귀족이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어마어마한 영감을 주었다!
베스고 백작이 걸작을 만들게 돕는다면 커다란 보상이 있으리라.
보상: ?, ???, 미리반 시 공적치 포인트.
“!”
안 그래도 미리반 시 공적치 포인트가 필요한 와중에, 베스고 백작이 포인트를 퍼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야! 들키면 안 되잖아!
-안 들키면 괜찮다.
-…….
무적의 논리!
일행은 태현이 도망쳐도 모자랄 시간에 베스고 백작 앞에 선다고 하자 매우 걱정이 됐다.
…태현보다 베스고 백작이!
‘베스고 백작. 오래 살고 싶으면 눈치 못 채는 게 좋을 거다!’
‘힘내라, 베스고 백작!’
“흠… 그쪽도 마음에 드는군.”
“?!”
케인은 깜짝 놀랐다.
자기까지!?
변장한 상태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가 태현과 같은 대접을 받다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과연…! 백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투박하지만 악역으로서의 재능이 있군요.”
“????”
케인은 대화를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뉘앙스가 좀 다르지 않나?
<때로는 조연도 필요한 법-미리반 시 퀘스트>
베스고 백작은 자신이 쫓는 예술에 등장할 사악한 악당을 찾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어마어마한 영감을 주었다!
베스고 백작이 걸작을 만들게 돕는다면 커다란 보상이 있으리라.
보상: ?, ???, 미리반 시 공적치 포인트.
“…….”
“싫은가? 싫으면 뭐 어쩔 수 없고.”
베스고 백작은 태현 때와 달리 냉정했다.
케인이 매우 그럴듯하게 악당처럼 생기긴 했지만 없어도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
다른 놈들 불러오면 되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케인은 황급히 대답했다.
뭐든 간에 일단 퀘스트는 받고 보자!
* * *
“그래서 3왕자가 지금 어디 있다고 하셨습니까?”
“아. 움직이지 말게.”
“3왕자께서 어디 있는지 알면 제가 좀 더 가만히 있을 것 같은데….”
[최고급 화술 스킬을…]
[……]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이런. 자네 말만 들으면 이상하게 설득되는 기분이야.”
베스고 백작은 붓을 내려놓고 말했다.
“3왕자 전하께서는 지금 오스턴 왕국의 못된 놈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계시지. 아마 지금쯤이면 베알 성을 공략하려고 하지 않으실까?”
베알 성도 국경지대의 유명한 성 중 하나였다.
길드 동맹도 미다스도 원하는 성!
그리고 태현도 베알 성은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번에 악마 군단이 여기서 나오지 않았었나?’
거기 지하에 미친 흑마법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는지 뭔 놈의 악마들을 줄줄 소환해냈다.
길드 동맹 쪽도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군요. 3왕자 전하께서는 무슨 약점 같은 거 없으십니까?”
“3왕자 전하께서 약점이라니. 그 분에게는 약점 같은 게 없네! 4왕자 전하나 1왕자, 2왕자 전하들이 갖고 있는 단점이 전혀 없으시지.”
‘눈에 콩깍지가 꼈군.’
과연 왕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귀족답게 단점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현의 화술 스킬은 백작이 갖고 있던 속마음까지 꺼내놓게 만들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성격이 오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존중하지 않으시고 가끔 눈이 뒤집히시면 몇몇 하찮은 놈의 목을 날릴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걸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죠?”
“…???”
옆에서 악당으로 분장하고서 서 있던 케인이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단점이 아니면 대체…?
“영웅으로서 그 정도 호탕함은 있어야지. 들어보니 저 아탈리 왕국의 국왕은 자기한테 반대하는 놈은 모조리 묶어서 폭탄으로 날려 버렸다고 하는군. 영웅은 그래야 하는 거야!”
“…아, 아니. 그건 헛소문 아닙니까?”
“아닌데? 신뢰할 만한 말을 들었네.”
[설득에 실패합니다!]
너무 증언이 많아서 태현의 화술로도 뜻을 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왕자님께서는 저 아탈리 왕국의 국왕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이시지. 암. 나는 왕자 전하를 믿네.”
“아, 예.”
태현은 3왕자랑 누가 더 영웅인지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같은 선에 있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으음. 그림이 좀 아쉽군. 물감이… 그래. 좋아.”
[베스고 백작이 <고대 차원 공간> 마법을 사용합니다!]
베스고 백작은 허공으로 쑥 손을 넣더니 사파이어 한 줌을 꺼내왔다.
태현은 그 모습에 경악했다. 케인은 넘어질 뻔했다.
뭐… 뭐?
‘저런 고위 마법을 쓴다니, 레벨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500? 600? 아니… 700은 넘겨도….’
그 다음은 더더욱 놀라웠다.
베스고 백작은 사파이어 한 줌을 주먹으로 꽉 쥐더니 으깨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와드드득!
“켁… 켁.”
케인은 사레가 들려서 헛기침을 해댔다.
저… 저 미친 귀족 NPC들!
귀족 NPC들이 상식을 벗어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막나갈 줄이야!
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베스고 백작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던 것이다.
‘에랑스 왕국의 고위 NPC들이 판온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는 건 듣긴 했는데….’
에랑스 왕국에는 온갖 NPC들이 많았다.
검술, 마법 등 각종 스킬과 관련된 마스터들!
이런 NPC들의 레벨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보통 이런 NPC들은 싸움에 나서는 경우가 없어서 만날 일이 드물었는데….
설마 이런 귀족 NPC가 그런 고위 NPC 중 한 사람일 줄이야!
‘하긴 백작 정도면 비전투가 아니라 전투형 NPC여도 놀라울 게 없지.’
베스고 백작은 딱 봐도 푸근하게 생긴 아저씨였는데, 마법과 힘 스탯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검사 직업에 레벨 700 넘는다고 가정해야겠군.’
게다가 에랑스 왕국 쪽 NPC들은 레벨도 레벨이지만 장비빨, 아이템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태현의 미친 회피력이 봉쇄당할 수도 있는 것!
태현은 갑자기 아다만티움 갑옷을 입고 싶어졌다.
솔직히 긴장된다!
케인이 슬쩍슬쩍 발걸음을 내딛는 게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최상급 사파이어 가루>를 줍고 싶어서였다.
“왜 그러나?”
“아, 아니. 그, 가루가, 지저분해 보여서.”
“저런… 좀 챙겨주게.”
시종이 가루를 줍더니 케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태현은 솔직히 부러웠다.
궁상맞은 것도 저런 장점이 있구나!
‘안 들키는 건 물론이고 차라리 설득을 하는 게 낫겠는데….’
“그러고 보니 국왕 폐하께서는 요즘 어떠십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편찮으셔서 못 뵌 지 좀 됐지. 거 참. 젊었을 적에는 그렇게 강하신 분이었는데. 나이는 누구든 속일 수 없는 것 같아. 나도 그렇고.”
“커험, 커험.”
“?”
“아무것도 아닙니다….”
케인이 기침을 하다가 손을 흔들었다. 베스고 백작은 케인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인상이 악당스러워서 데리고 왔는데 방해가 되는 거 같지? 바꿀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이번 내 작품은 걸작이 될 거야. 제목은… 음. 그래. <사악한 도적을 단죄하는 천사>가 좋겠군.”
“어느 신의 천사입니까?”
“흠. 왠지 모르게 아키서스가 떠오르는군. 자네 혹시 아키서스 신도인가? 아키서스의 천사로 할까….”
“아키서스의 천사는 그렇게 안 생겼습니다.”
“그래? 어떻게 생겼지?”
“일단 팔이 좀 더 많고 머리도 많고….”
“???”
베스고 백작은 태현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생긴 천사가 어디 있지?
“천사가 뭐 이렇게 생겼나?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나 보군.”
“…그냥 다른 신의 천사로 하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야. 파이토스?”
“어, 음, 예. 뭐. 파이토스도….”
지금 영지의 <아키서스의 성스러운 동물원>에는 파이토스의 거북이가 있었다.
용용이와 흑흑이의 미친 설득에 거북이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계속 파이토스를 믿어야 하나? 저 두 드래곤이 저렇게 말하는데 갈아타야 하는 거 아닐까?
그 틈을 타 드래곤들은 잽싸게 동물원으로 거북이를 옮겨버렸다.
이쯤이면 90%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면 파이토스의 천사라고 할까.”
“파이토스의 천사는 어떻게 생긴지 아십니까?”
“뭐 망치 하나 들려주면 되겠지.”
[…?]
매우 참신한 발상!
태현은 갑자기 베스고 백작의 그림 솜씨가 궁금해졌다.
저 정도 레벨에, 마검사로 검술 마법 동시 스킬 찍을 정도면 그림 스킬은…?
‘설마 미술 쪽 비전 스킬 갖고 있는 NPC는 아니겠지?’
각 스킬마다 비전 스킬을 갖고 있는 NPC들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강력한 NPC들.
‘하긴 아부를 하려면 어떻게 그렸는지 봐야 하긴 하겠군.’
“잠깐 쉬고 그림 좀 봐도 됩니까?”
“하하. 이거 좀 쑥스럽군. 그래. 여기 와서 보게.”
태현은 옆으로 와서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
“어떤가? 좋지 않나?”
“매우… 개성적입니다.”
[카르바노그가 저게 파이토스의 천사인지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나온 악마 사냥개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