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39화
그러는 사이, 하늘섬의 음침한 요새 지하에서는 역사적인 회합이 일어나고 있었다.
길마들의 회의!
사실, 몇몇 길마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는 건 특이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이번 달 던전 입장료 관련해서 담합을….
-정해진 가격 이하로 내리는 놈들은 가만히 두지 맙시다!
-맞습니다. 치사하게 돈 좀 벌겠다고 약속 어기는 놈들은…!
서로 필요하면 모이고 필요 없으면 갈라지는 게 길드들 관계!
그러나 이번 회의는 좀 남달랐다.
일단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판온의 내로라하는 대형 길드, 중소 길드 마스터틀이 대거 참여한 것 같았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이슨 님.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다니….”
“쉿. 닥쳐. 내 이름 부르지 마.”
“앗, 죄송합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했다.
이유는 하나.
이 회의가 그만큼 위험했던 것이다.
-길드 동맹 불참!
-미다스 길드 불참!
-김태현, 이세연 등등 불참!
한 마디로 지금 가장 세력이 큰 길드 하나와, 그 다음으로 세력이 큰 길드를 빼고….
판온에서 가장 강하다고 꼽히는 랭커들도 뺀 것이다.
왜?
“이번 하늘섬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이 자들을 견제해야 합니다!”
“옳소! 옳소! 옳소!”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자리에 모인 길마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 판온은 위의 작자들이 다 해먹고 있다!
남들이 마을, 요새 하나 간신히 갖고 있을 때 혼자 왕국 단위로 먹고 있는 작자들!
그러다 보니 관심도, 수익도, 투자도 차원이 달랐다.
“저번에 우리도 투자를 받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투자자 쪽에서 무슨 말이 나온 줄 압니까? ‘기왕 할 거면 김태현에게 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취소됐어요!”
“저런…!”
“김태현은 리그에서도 잘 나가면 됐지 왜 이런 부분에서까지 잘 나가냐고!”
“그건 딱히 김태현 잘못이 아닌….”
“쉿.”
“길드 동맹 놈들은 더 심해요! 김태현은 문어발식 확장이나 안 하지. 길드 동맹 놈들은 이제 좀 상태 괜찮아지니까 예전에 하던 버릇이 다시 도졌어! 사방팔방에 갑질이야!”
대형 길드의 길마들은 매우 분노해 있었다.
자기들이 갑질하다가 남한테 당하면 원래 두 배로 열 받게 마련!
오스턴 왕국을 갖고 있는 길드 동맹은 그 근처의 갑이었다.
“이번 하늘섬은 정말 기회입니다! 이 자료를 보십시오. <몬스터 웨이브>까지 겹쳐서 플레이어들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오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하늘섬은 제2의 중앙 대륙이 될 수도 있어요!”
“오오… 오오오오…!”
“근데 저기 아탈리 왕국 플레이어 숫자는 왜 그대로냐?”
“저기는 충성도가 좀 높잖아.”
“젠장. 김태현 자식! 세금을 왜 이렇게 안 걷는 거야! 지 혼자 착한 척하고! 덕분에 우리만 욕먹잖아!”
길마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 사람들 중 절반 넘는 사람들이 판온 1에서 잘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판온 2에서는 영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상황.
길드 경쟁이라는 게 레이스와 비슷해서, 한 번 뒤처지면 그 차이를 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모인 것이다.
저 최상위권에 있는 놈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우리도 연합하자!
“하늘섬에 저기 저놈들이 오면 무조건 연합해서 몰아내는 거다! 알겠지?”
“약속 깨는 놈은 죽을 줄 알아!”
“맞아! 맞아!”
그제야 길마를 따라온 부길마는 왜 다들 가면 쓰고 있는지 깨달았다.
혹시나 나중에 영상이라도 까발려지면 김태현이나 길드 동맹한테 척살 1순위가 될 테니까!
‘이 사람들 더럽게 치사해…!’
하지만 원래 대형 길드의 길마쯤 되려면 이 정도는 쪼잔해야 했다.
자기가 갑질을 하더라도 남한테 당하면 당당하게 ‘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라고 말할 수 있는 얼굴 두께!
길드 동맹도, 미다스 길드도 이런 연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형 길드들이 그들을 상대하려고 몇 번 뭉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똘똘 뭉친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 * *
[하늘섬을 발견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힘이…]
[……]
“오오.”
중앙 대륙과는 전혀 다른 하늘 위의 풍경에 태현 일행은 감탄했다.
맨날 어두운 기운이 일렁거리는 마계에, 온갖 눈폭풍이 몰아치는 얼음섬에, 용암 끓는 화산 지대에….
이런 곳만 돌아다니다가 탁 트인 하늘과 평화로운 녹색 지평선이 쫙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섬에 도착하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되게 넓은데? 섬이 아니라 대륙 수준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고 있겠지. 마을 하나 들어가서 자리 잡은 다음 움직이자.”
새로 온 지역에서는 마을 하나 찾은 다음 움직이는 게 국룰이었다.
기본적으로 아이템 사고 팔고 NPC들 도움 받는 곳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우리 이제까지 맨날 그런 곳 없는 지역에서 싸우지 않았냐?’
‘그러니까 개고생한 거지.’
새삼스럽게 자기들이 어떤 싸움을 했는지 떠올리며, 태현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섬의 <녹색 씨앗 마을>에 입장했습니다!]
[명성이 오릅…]
[현재 명성이 매우 높습니다! NPC들에게 추가 보너스를…]
[칭호 <고대 제국의 은인>을 갖고 있습니다. NPC들에게 추가…]
[아탈리 왕국의 국왕입니다. NPC들에게 추가…]
“어엇. 제국의 왕관을 이으신 분이 여기에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하늘섬의 NPC들은 태현을 보더니 반갑게 다가왔다.
고대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은 기본적으로 태현 같은 플레이어에게 친밀도가 매우 높았다.
명성 높지, 악명 높지, 고대 제국 관련 칭호 갖고 있지….
태현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섬에는 고대 제국 관련된 귀족이나 후손이 없나?”
[현재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현재 친밀도가 매우 높습니다!]
[<녹색 씨앗 마을>의 주민들이 하늘섬에 숨겨진 비밀을 말해줍니다!]
“?!?”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퀘스트 깨고 이것저것 잡일 하면서 도와주는 동안 한 마디도 못 들은 비밀을 그냥 알려주는 NPC들!
“이건 영웅님에게만 알려드리는 겁니다만… 아주 예전에 밑의 제국과 연락이 끊겼을 때, 다스리던 총독 놈이 있긴 했지요.”
“오. 그 총독의 후예가 있는 건가?”
제국의 총독이면 대충 왕쯤 되는 위치였으니, 총독의 후손들이 하늘섬 어딘가에서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라? 그런데 플레이어들은 지금 마음대로 깃발 꽂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도 ‘통치하는 사람 없습니다’ 떠서 플레이어들은 신나게 깃발 꽂고 ‘와! 내가 영주다!’이러고 있었다.
“아니요. 그 총독 놈이 하도 건방을 떨고 탐욕을 부려서 이 하늘섬의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총독 놈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화끈한 주민들이…!?
하늘섬의 주민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후로 저희는 총독 같은 거 없이도 충성스러운 제국의 백성들로 잘 지내왔습니다. 후후.”
“어… 지금 모험가들이 자기들이 영주라고 하는데 그건 신경 안 쓰이나?”
“뭐 통치를 잘 못 하면 다시 일어나서 불태우면 되니까요.”
“…….”
[하늘섬의 비밀스러운 전통, <영주 화형식> 퀘스트를 들었습니다!]
[하늘섬의 주민들은 불만도가 일정 수치에 도달하면 반란을 일으켜 영주를 습격합니다!]
[하늘섬의 주민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냥 반란과 달리 그들은 영주를 불태우기 전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
[카르바노그가 여기는 영지 갖지 말자고 말합니다.]
뭔 놈의 영지 전통이 이렇게 흉악해!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면 될 것이지 그냥 영주를 태워버린다니….
‘흠. 플레이어들한테 경고 좀 해줘야 하나?’
태현은 고민했다.
중앙 대륙의 영주들은 영지 관리를 좀 편하게 하는 편이었다.
불만도가 올라가도 보통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다.
일어나더라도 아주 소규모로 일어나서, 병력만 충분하면 제압이 가능했다.
오스턴 왕국과 길드 동맹이 그렇게 세금을 걷고 걷고 걷는데도 아직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으니….
그러나 여기 하늘섬 NPC들은 그냥 바로 영주부터 노려서 화형!
이걸 모르고 세금 올렸다가는 그냥 타버릴 수도 있었다.
* * *
-김태현 왔습니다! 김태현 왔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회의에서 정한 대로 해야죠!
-그러니까 가서 김태현 쫓아내라고?
-…….
-누가 합니까 그걸?
-어… 음….
<녹색 씨앗 마을>을 점령한 길드는 고민에 빠졌다.
회의에서는 분명 ‘야! 우리 길드 동맹이든 미다스든 김태현이든 누구든 다 밀어내는 거다!’라고 했지만….
사실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 하나가 있었다.
누가 가장 먼저 나설래?
-어… 그냥 우리가 먼저 도와주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뭔 소리냐?
-그러니까 적당히 타협하자는 거죠. 김태현한테 아이템 안 팔고, 파티 안 맺어주고….
-김태현이 우리 길드에서 파티원을 구한다고?
-뭐? 김태현이 우리 길드에서 파티원을 구한다고요? 길마님 저 끼어도 됩니까?
-…….
길드원들의 반응에 길마는 뒷목을 잡았다.
이 충성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들…!
아마 김태현이 ‘님들 길드 탈퇴하고 파워 워리어로 올래요?’ 한마디 하면 절반쯤은 길드 탈퇴할 것 같았다.
-…김태현한테 아이템 안 팔고 시설 이용 안 시켜주면 되는 거 아니냐 이겁니다.
-그, 그러다가 김태현이 화나서 공격하면 어떡하죠?
-걱정 마! 김태현도 이미지가 있어!
-미친 도시 파괴자 이미지요?
-아니. 그거 말고! 그리고 이건 던전을 점령해서 뻗대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점령한 마을 우리가 쓰겠다는 건데, 명분은 우리한테 있다고! 우리 마을, 우리 시설이야!
-그 소리 처맞으면서 해봤자….
* * *
“음?”
“이 마을에서는 판매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 영주님께서 시키셔서… 죄송합니다. 영주 새끼가… 아니, 영주님이….”
태현은 몰랐지만 길드 메시지창에는 [<녹색 씨앗 마을>의 불만도가 오릅니다!]가 뜨고 있었다.
영웅을 푸대접하라니 마을 주민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뭐 살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마을 하나 찾아서 안면 익히긴 했지만, 사실 태현 일행은 아이템 보급이 꼭 필요하진 않았다.
사기적인 가방, 토왕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다비는 토왕이 안에 온갖 포션과 주문서, 잡템들을 차곡차곡 쌓고 다녔고….
덕분에 무게 제한 없이 일행은 하드코어한 사냥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케인과 최상윤이 진지하게 ‘야 김태현이 계속 사냥하자고 하면 저 토왕이를 몰래 갖다 버려보는 게 어떠냐?’ 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마을에서 아이템 안 팔거나 안 사준다 하더라도 딱히 무게에 제약이 걸리는 게 아닌 상황!
“아이템도 뭐 특별한 거 없지?”
“하늘섬이라 특이한 건 많긴 한데 성능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아요.”
이다비는 한 번에 훑어보고 견적을 내렸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점령한 길드 애들이 장사 좀 하려나 보군. 뭐 출입증 같은 걸 사야 이용 가능한가 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들어갈 마을은 아니에요. 바로 하늘성으로 이동하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덕분에 태현은 조언해 주려다가 말았다.
뭐 지들이 욕심부리니 나중에 당하더라도 자기 업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