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29화
처음에는 잔잔한 불만으로 시작했다.
-지금 도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 길드에서 좀 나서서 도와주면 안 되나요?
-맞아요. 평소에 세금도 더럽게 높게 떼어가면서.
-저기 아탈리 왕국 골짜기는 세금도 안 낸다던데….
-쉿. 거기 이야기하면 더럽게 화낸다. 조심해.
도시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의 요청에, 길드들은 훈훈하게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어… 언제까지요?
-기다려달라고 하는 거 보니까 계획은 있다 이거죠?
-물론입니다.
-계획이 뭔데요?
-몬스터 숫자가 좀 더 많아지면 저희 길드원들이 한 번에 모여서 몰이사냥을 할 생각입니다. 우리도 좋고 여러분도 좋겠죠?
-…….
-…….
-그러면 우리는요?
-안전하게 구경하시면 되지요.
-…끼고 싶다면요?
-PK를 당하겠지요.
-…….
-…….
-야 이 개자식들아!
-아, 아니?! 대체 왜 화를 내시는 겁니까?
괜히 대형 길드가 아니었다.
판온 2에서는 <길드 동맹>이 모든 욕을 다 먹는 느낌이라 좀 넘어간 감이 있었지만, 사실 대형 길드는 기본적으로 매우 이기적인 놈들!
<길드 동맹> 대신 본색을 드러낼 상황이 찾아오자 길드들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이다.
-뭐 저런 <길드 동맹> 같은 놈들이 있어?
-영지 새로 얻었다고 벌써 초심 잃냐? 영지 얻으면 다야?
-이럴 거면 그냥 아탈리 왕국 가고 만다!
-뭐, 뭐라고? 우리의 배려를 감히…!
-배려는 무슨! 여러분! 우리를 무시하는 저 재수 없는 놈들을 가만히 두지 맙시다! 광장으로 모여서 길막해 버려요!
-광장을 마비시켜버리겠어!
안 그래도 밖에 나가지 못해 스트레스가 올라간 플레이어들은 분노해서 행동으로 나섰다.
레벨 낮은 플레이어라고 무시하면 안 됐다.
레벨 낮아도 남 괴롭히는 건 충분히 가능한 게 판온!
-이건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놈들 빡치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낸 세금 돌려내! 몬스터도 안 잡아주는 자식들아!
광장에 우르르 몰려 들어가 입구를 다 막아버리고 자리를 채워버리자, 평소 온갖 거래가 활발하게 돌아가던 광장이 마비되었다.
영지 운영하는 길드 입장에서는 이런 광장 수입이 막대했다.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상황!
-붙잡아! 광장에서 몰아내!
-아, 아니. 저렇게 많은데 누가 제작 직업이고 누가 길막하는 놈인지 어떻게 알….
* * *
“수혁이, 지수, 용용이, 흑흑이. 쿨타임 돌 때마다 무조건 난사해라! 뭐든 좋으니까 딜을 만들어. 딜 놓치지 마! 1초 쉴 때마다 딜이 팍팍 줄어든다. 공공이, 마법 나가기 전에 들어가서 진형 파괴하고 나와! 나머지 놈들은 원딜 끝나면 들어가서 썰어버린다. 케인! 너 인마! 방패 똑바로 안 들어! 뒤에 힐러나 딜러 맞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HP 1 깎일 때마다 고기 반찬 압수다!”
“으헝헝! 으헝헝헝!”
케인은 울면서 방패를 휘둘렀다.
랭커들한테 집단구타 당하면서 칭호 작업 할 때만 해도 ‘아 그냥 김태현하고 퀘스트 깰 때가 나았던 거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차라리 랭커들한테 맞던 때가 나았다.
작정하고 시어머니 모드에 들어간 태현은 사람의 피를 바짝 마르게 했다.
오죽하면 정수혁이나 이다비도 긴장하고 있을까!
이번 필드 사냥은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퀘스트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강해지고 많아졌다지만 어디까지나 태현 일행이라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는 난이도였다.
그렇다는 건 즉….
몇 번 실수를 해도 ‘아 뭐 퀘스트가 이런 난이도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넘어가주던 태현이 아니라는 뜻!
이럴 때 기초 실력을 다지지 않는다면 언제 다지겠는가!
[<아키서스의 마법>이 <웅대한 자연의 휩쓸림>을 불러냅니다!]
[<타이럼의 화살비>가 쏟아집니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용용이가 <낙뢰의 발톱>을…]
[……]
[……]
[<붉은 소> 부족 전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집니다!]
[<붉은 소> 부족 전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상윤아, 움직여라! 준 보스 몬스터부터 잡아! 못 잡으면….”
“아, 알고 있다고! 그만 구박하라고!”
최상윤은 질색하며 내달렸다.
판온 1 때 경험했던 트라우마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뭐하냐고! 왜 그걸 못 잡냐고! 보스 몬스터 두 마리만 혼자 상대하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급소에 공격 쑤셔 박아서 치명타 만든 다음 몸 틀어서 공간이동하고 옆으로 돌아서서 한 번 더 치면 보스 몬스터 두 마리 잡잖아!
…그건 너만 가능한 거야 또라이 자식아!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최상윤은 꾹 참았다.
못 잡으면 진짜 3배로 구박 날아온다!
“크아아아앗!”
-우오오오옷! 우리 부족의 영광을 위해 물러설 수 없다!
“네가 나보다 절박하냐!? 난 한 번 실패하면 케인급으로 내려간다!”
<붉은 소> 부족의 정예 전사들도 나름 강했지만, 최상윤의 절박함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붉은 소> 부족의 정예 전사가 쓰러집…]
[명성이…]
[오랫동안 쉬지 않고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지구력 스탯이 오릅니다.]
[체력 스탯이…]
[칭호…]
[검술 스킬에 추가 보너스가…]
“움직여! 잡았다고 쉬지 마!”
“…….”
뿌듯해할 시간도 없이 뒤에서 날아오는 구박!
최상윤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태현은 주변에 있던 수십 마리를 전부 잡아버리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런 걸 보면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었다.
‘하늘은 왜 저런 놈에게 저런 능력을 주신 걸까?’
최상윤은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뒤를 쫓아 달렸다.
낙오되면 진짜 5배 구박이 날아온다!
“태현 님! 힐 속도가 따라가기 힘들어요!”
이다비는 눈이 팽팽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며 외쳤다.
지금 힐을 우선적으로 받고 있는 건 케인과 최상윤!
태현은 힐을 안 받는데도 힐 속도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만큼 정신 나간 속도로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덤비면 보통 뒤로 빠지고 진형 재정비하고 공격 넣고 해야 하는데….
태현은 그냥 무시하고 ‘야! 돌격해! 맞으면서 크는 거야! 세세한 컨트롤로 피하고 흘리는 법을 배워!’라고 외치고 있었다.
“되는 데까지만 해!”
“네!? 힐 안 하면 죽지 않나요?”
“지들이 죽기 싫으면 안 죽는 법을 배우겠지!”
까드득!
빠드득!
케인과 최상윤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HP가 20% 이하인 상태에서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체력이 오릅니다!]
[물리 방어력이 상승…]
[……]
말은 그렇게 해도 태현은 케인과 최상윤을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다.
만약 정말 죽을 것 같으면 아키서스의 권능을 써야 했으니까!
[카르바노그가 그런 다음에 폭풍 같은 잔소리를 퍼부어주자고 외칩니다!]
‘좋은 생각이다. 카르바노그!’
태현 앞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덤벼들었다. 각종 무기를 든 야만전사들!
태현은 그들을 베고 후려치고 때리고 찌르고 잡아 넘겼다.
플레이어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판온에서 이런 끝없는 전투는 정신력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했다.
[아이템을…]
[아이템을…]
[아이템을…]
[<몬스터 웨이브>에 맞서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아탈리 왕국의 치안이…]
“내가, 살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키서스 포병대, 애들이, 너무, 그리워!”
케인은 여섯 개의 팔을 휘두르며 울부짖었다.
두 개의 팔로는 커다란 방패를 들어 접근을 밀어내고, 나머지 네 개의 팔로는 딜을 넣었다.
태현은 탱커라고 딜을 안 넣는 걸 용서치 않았다.
[<붉은 소> 부족 전사들이 전멸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불리한 숫자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적들을 쓰러뜨렸…]
[……]
“와아아아아!”
“끝났지? 끝난 거지? 고기반찬이냐?”
“뭐가 고기반찬이라는 겁니까?”
“쟤 지금 너무 피곤해서 언어가 망가졌어. 어쨌든 우리도 잠깐 쉬….”
-크어어어어어!
“???”
“저놈들은 여기에 나오는 몬스터들이 아니지 않나요?”
“내가 용용이 시켜서 불러왔다.”
“…….”
“…….”
“…….”
“애들아. 아직 너희에게는 여유가 있어. 움직이자!”
유지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활을 들어 태현의 뒤통수를 겨누려고 했다. 이다비가 다급히 말렸다.
“그러면 안 돼!”
“하, 하지만… 하지만…!”
* * *
태현 파티는 소규모 파티치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을 근처의 몬스터들을 갈아버렸다.
-여기 김태현 떴다!
-뭐? 아키서스 포병대는 여기 있는데?
-아키서스 포병대는 플레이어들 도우려고 따로 뺐다는데? 김태현은 혼자 움직이나 봐.
-크흑… 김태현 님… 충성하겠습니다….
-충성충성충성!
아탈리 왕국 플레이어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키서스 포병대>부터 시작해서 마법사단, 성기사단 다 빼놓고 맨몸으로 뛰는 태현 일행!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으어어! 고기반찬! 고기반찬!”
“방금 케인이 고기반찬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 것 같은데…?”
“헉, 설마 그 글이 사실이었나?”
게시판에 떠돌던 유머글!
케인이 경기에서 활약이 적으면 팬들은 단호하고 냉정하게 일갈했다.
-케인 저거 오늘 저녁 주지 마라!
-저거 오늘 저녁 굶겨라!
-밥에 깍두기만 줘라! 아니 쌀만 줘라!
-그냥 찬물에 밥 담가 줘라!
그러나 케인이 활약하면?
-케인 오늘 고기 반찬 줘라! 아니, 뷔페로 주자!
-9첩반상 가자!
당연히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플레이어들은 태현 파티의 신들린 사냥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서 손쉽게 잡아가는 게 아닌, 여럿이서 절박하게 하는 사냥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몰입도 최강!
정말 재밌었다.
…태현이 살벌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는!
“너희 뭐하냐?”
“엇, 앗, 그게, 구경, 하고 있었습니다?”
“구, 구경하면 안 되나요? 저기 갈까요?”
“아니. 왜 구경만 하고 있는데! 몬스터 웨이브인 거 안 보여? 참가해!”
“네??? 참, 참가해도 됩니까?”
“몬스터들이 이렇게 많은데 안 잡으려고? 아무데나 들어가서 적당히 잡아! 어그로 몰릴 거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하, 하지만….”
상식 밖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당황했다.
보통 파티가 먼저 사냥하고 있는 곳에 끼어드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얼마나 몬스터가 많든, 먼저 온 파티가 기분 좋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태현 파티가 사냥하고 있는 곳에 같이 끼어서 싸우는 건 너무 황송….
“아 끼라고! 빨리 끼라고!”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빨리 내려오지 못하겠습니까?!”
“!??!!”
플레이어들이 고민하자 이번에는 태현 일행이 사납게 외쳤다.
좀 도우라고!!
구경만 하지 말고 이 자식들아!!!
‘경험치 더 먹자고 혼자 사냥할 일이 아냐! 이러다 진짜 죽겠다!’
‘어떻게든 부담을 줄여야 해!’
태현 일행은 눈이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을 더 끌어들여서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감… 감사히 끼겠….”
“아 당장 안 내려와!??! 너 <노예의 쇠사슬> 맞고 싶어!? 어?!!”
“케인. 쓸데없는 소리가 많다. 고기 반찬 압수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케인은 분노의 광전사가 되어 앞으로 돌진했다.
몬스터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설 정도의 기세!
“그, 그러면 감사히 끼겠습니다!”
“우리도 내려가자!”
“친구들도 불러! 게시판에 글을 올려! 누구든 좀 불러줘!”
‘…붙, 붙잡혀 있는 건 아니겠지?’
태현 일행의 절박한 외침에 플레이어들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에이 내가 무슨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