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26화
무서워!
…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이다비의 팬이었다.
닉시아는 감동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언… 언니. 저처럼 미미한 플레이어도 기억해 주시다니….”
“아니, 저건 무서워해야 할 거 아닌가?”
“뭐? 무서워? 너 지금 이다비 님이 너한테 해코지라도 한다 이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골드 얻은 거까지 아는 건 좀 이상하잖….”
“이 자식이 어디서!”
“너 판온에서 뒤통수 조심해라!”
말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가 우르르 공격받는 플레이어!
이다비는 이다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팬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그러지 마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길드원들보다 말을 잘 듣는다?’
이다비는 살짝 당황했다.
어떻게 된 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더 말을 잘 듣는 거 같지?
어쨌든 이다비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을 해주다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사인해서 팔면….’
본능적으로 드는 생각!
물론 선수로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만 바로 견적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했어요. 태현 님 만나러 갈까요? 지금 가면 사인 받을 시간은 될 것 같은데.”
“괜찮은데요.”
“저희는 이다비 님 팬이라….”
“!”
이다비는 다시 한번 놀랐다.
와서 태현 사인을 안 받고 그녀 사인만 받다니.
마치 뷔페 가서 샐러드만 먹고 나오는 것 같은 사치스러운 짓 아닌가!
“왜요?!”
“왜, 왜냐니… 팬이라서요…?”
플레이어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팬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당황한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김태현 선수하고는 사귀시는 사이인가요?”
“네? 어? 음, 어, 아니, 그게, 전혀 아니거든요!”
‘사귀는 거 맞는 것 같은데.’
‘사귀는 거 같은데….’
‘최소한 좋아는 하는 거 같다.’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이다비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자 플레이어들은 오히려 더 수상쩍어했다.
진짜 사귀나?
하긴 김태현과 이다비라면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같은 팀에서 뛰는 프로 선수인 데다가, 둘 다 판온에서 손꼽히는 랭커 아닌가.
실력 있는 두 선남선녀가 계속 같이 활동하다 보면 애정이 싹틀 수밖에 없는 것!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결심했다.
응원해 주자!
“난 김태현 팬인데 가서 만나 봐도 돼?”
“개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어디서 눈치 없게. 조용히 해. 끼어들지 말고.”
“이다비 님이 입찰한 김태현 선수에 상회입찰하지 마라.”
“?!?”
김태현 팬인 미녀 플레이어가 슬쩍 빠지려고 하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어디서 감히!
“이다비 님. 파이팅입니다!”
“힘내세요!”
“…뭘 힘내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 * *
“팬들은 잘 만났어?”
태현도 한바탕 팬들을 상대하고 온 뒤였다. 이다비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네? 아뇨! 절대! 무슨 일도!”
“…그렇게 말하면 더 수상한 거 알지?”
“제 팬이라고 해서 좀 감동 받았어요.”
“…? 너 팬 많잖아.”
태현은 의아해했다. 게시판이나 뉴스 리플만 봐도 이다비 팬 많은 건 알 수 있었다.
케인이야 리플에 ‘케인아 아직도 놀고 먹냐!!’만 달리지만 이다비는 그것도 아니었고….
“파워 워리어 때부터 제 이름 검색 안 하는게 습관이 되어서….”
“…….”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태현 님. 그런데 저 판온이면 몰라도 다른 게임들은 자신 없는데요.”
“다른 게임은 안 해봤어?”
“음… 판타지 크래프트는 예전에 해본 적이 있어요.”
“아. 그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게임!
“어땠어?”
“돈을 모은 다음에 유닛을 만들어야 하는데, 돈이 아까워서 계속 쌓기만 하다 보니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 그래.”
다른 게임의 이름이 몇 개 더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 비슷했다.
다 돈만 모으다가 게임 패배하는 경우가 대부분!
“걱정하지 마. 내가 커버할 테니까.”
“어떤 게임인데요?”
2인 1조로 모인 플레이어들이 서로 친선으로 겨루는 자선대회!
친선이었기에 하하호호하며 즐거운 분위기에서 가볍게 진행이 되게 마련.
무엇보다 여기에는 이세연이 없었다. 이세연이 있었다면 태현과 이세연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광기의 대회가 됐겠지만….
“그건 나도 모르는데. 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겠지.”
태현의 예상은 사실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게임도 아니었다.
“2인 1조로 나오신 두 분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주십시오! 앞으로 나오는 질문에 대답을 써주시면 됩니다.”
“어, 그냥 퀴즈인가?”
“아닙니다! 이 퀴즈의 목적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같은 대답을 쓰는 겁니다!”
나온 질문에 대한 맞는 대답이 아닌, 상대방과 같은 대답을 쓰는 게 목적인 게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임이었다.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유행 지난 옛날 게임 아냐?”
“그러게요?”
그 모습에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이거 누가 하자고 그랬어?”
“쉿. 윗선에서 하라고 내려왔어. 난 원래 판타지 크래프트 하려고 했는데….”
“판타지 크래프트 2인 1조가 낫지 않나? 나도 판타지 크래프트 보고 싶었는데. 김태현이 판타지 크래프트 하는 거 보고 싶었다고.”
“이런 눈치 없는 자식이… 멍청한 놈아! 윗선에서 하라고 내려왔다는 게 무슨 뜻이겠냐?”
“???”
“무슨 뜻이죠?”
“사장님께서 고르신 게임이란 뜻이잖아.”
“…사장님께서 이런 걸 직접 고르셨다고요?”
할 일이 없으신가?
말을 꺼낸 부장도 민망했는지 목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사장님께서 직접 고르시진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시긴 했을 거 아냐. 만약에 자기가 고르셨는데 호응이 없으면 어떻겠어?”
“…와! 역시 사장님! 완전히 대회를 뒤집어 놓으셨다!!”
“그래. 그렇게 호응을 하라고!”
직원들이 열심히 박수를 치는 사이 사회자는 계속해서 진행해 나갔다.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도 나름 다 프로인 이들.
옛날 게임 나왔다고 당황해하진 않았다.
“자! 연습 게임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유성 게임단에서 나온 두 분! 류태수 선수, 김철수 선수! 서로 못 보게 앉아주시고… 질문 나갑니다! 판온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류태수와 김철수는 잠깐 고민하더니 재빨리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써내려나갔다.
김철수는 당연히 주장인 이세연을.
류태수는….
김태현이라고 썼다.
“…….”
“…….”
덕분에 보고 있던 사람들은 빵 터졌다.
생각지도 못한 개그!
“아, 류태수 선수, 유머 감각이 대단한데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전 진심으로 읍읍읍.”
“조용히 해요. 저까지 같이 처벌받는다고요.”
김철수는 재빨리 류태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세연의 분노를 같이 받는 건 사양이었다.
“1등을 한 팀에게는 상금과, 그 팀의 이름으로 같은 액수의 상금이 기부됩니다!”
“아앗…!”
이다비의 눈빛이 반짝였다.
돈이 걸리자 급격하게 올라가는 집중력!
“태현 님. 모르스 부호 하실 수 있으시죠?”
“할 수 있긴 한데… 대회에서 그러지는 말자….”
모르스 부호로 대화하다가 걸리면 그건 그거대로 좀 화제가 되긴 하겠다!
“좋은 취지의 대회니까 좋은 마음으로 하자고.”
“좋은 마음은 곧 이기려는 마음 아닐까요? 그리고 규칙에서 모르스 부호 쓰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
“안 돼. 이다비. 케인이면 몰라도 네가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두 분!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태현과 이다비는 옆에 앉았다. 지금 가장 유명한 두 선수가 앉자 뜨거운 함성이 튀어나왔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자선대회가 아니라 콘서트로 착각될 정도로, 모인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방금까지 진행한 플레이어들이 투덜거렸다.
“우리 때하고 반응이 몇 배나 차이나지 않냐?”
“넌 양심이 없냐? 너하고 김태현을 비교하게.”
“그래도 그렇지. 저 반응의 1/10만 해줬어도 소원이 없겠다.”
“자. 팀 KL의 두 분에게 문제 드리겠습니다! 팀 KL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선수를 적어주십시오.”
“너무 쉽군.”
“이건 거저먹었네.”
“케인이네. 케인.”
보고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대답을 말할 정도로 쉬운 문제!
당연히 둘은 쉽게 맞췄다.
첫 문제는 당연히 쉽게 나오게 마련. 문제의 난이도는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태현이 판온 1에서 했던 직업(이다비는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써냈다), 태현의 취미(이것도 마찬가지로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태현 가족 생일(이건 태현이 이다비보다 늦게 썼다)까지.
“이… 이다비 선수!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마치 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저건 스토커 아냐?”
“이 자식이 어디서 감히!”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지?”
무심코 말 잘못 꺼낸 팬은 주변에서 날아오는 살기 넘치는 협박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 무서워!
태현도 만만치 않았다.
이다비의 생일부터 시작해서 취미, 가족 관계, 좋아하는 음식 등을 닥치는 대로 맞춰나갔다.
태현의 뛰어난 기억력은 한 번 들은 걸 놓치지 않았다. 이다비 동생들이 주입식으로 때려박은 게 의외의 효과로 다가온 것이다.
“팀 KL에서 잘못한 선수는 어떤 벌을 받는가? 정답은 ‘아키서스형’! 두 분 또 맞추셨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된 게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어요! 이 정도면 우승은 거의 확정이라도 봐야 되겠는데요?”
처음에는 ‘와 잘 맞추네’, ‘신기하네’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너희 왜 그런 것도 알고 있니?’ 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너무 잘 알잖아!
서로 습관, 취미, 말버릇부터 시작해서 게임에서 자주 쓰는 스킬까지 다 맞추는 둘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제 나갑니다! 팀 KL에서 주장인 김태현 선수가 가장 아끼는 선수는? 너무 쉬운 문제죠? 자! 맞춰주세요!”
이다비와 태현은 동시에 썼다.
너무 쉬운 문제였던 것이다.
이다비는 ‘케인’, 태현은 ‘이다비’였다.
“…뭔 놈의 케인이야 이다비?!”
“!??!”
* * *
태현이 현실에서 환호를 받고 있는 동안, 케인도 환호를 받고 있었다.
“케인! 케인! 케인!”
“닥쳐…!”
“케인! 케인! 케인!”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아오! 좀 닥치라고!”
물론 좀 종류는 달랐지만!
케인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훈련장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케인! 힘을 내! 지지 마! 일어서!”
“맞아! 아직 내 차례 안 왔다고!”
그런 케인을 응원하는 랭커들!
누가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모인 랭커들은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케인을 꼭 한 대 때려보고 싶다!
“안 되겠어! 우리가 먼저 해야겠다!”
“안 돼. 차례 지키기로 약속했잖아! 일단 저 칭호부터 깨야지.”
“저러다가 케인 저놈이 포기하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날 믿어라! 케인은 도망치지 않는다!”
“크윽… 하지만… 하지만…! 케인 놈을 때려보고 싶은걸…!”
똑똑똑-
누가 훈련장 문을 밖에서 두드렸다.
“뭡니까?”
“저, 혹시… 여기가 케인 때리는 곳 맞습니까? 레벨 250 넘기면 케인 때릴 수 있게 허락해 준다고 들었는데….”
수줍은 표정으로 말하는, 새로 찾아온 랭커들!
케인은 그 모습에 분노해서 외쳤다.
“어떤 자식이 나 때리는 거 인터넷에 올렸냐?!?!”
벌써 소문이 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