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24화
태현이 말하는 사이 동생들은 이다비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입어 좀!
“감, 감사히 입을게요.”
‘어. 이거 둘이 입고 가면 커플티 아냐?’
‘쉿. 언니 눈치 못 채게 조용히 해!’
동생들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눈치 없이 망칠 수는 없지!
* * *
“회장에는 택시 타고 가실 건가요?”
“아니.”
“어? 데리러 오실 분이 있나요?”
“시간 남으신 분이 있어서 부탁했지.”
“?”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선대회에 나가는 다른 플레이어하고 같이 타러 가나?
아니었다.
“…….”
이다비는 마세라티 운전석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태산을 보고 경악했다.
“태, 태, 태현 님…! 누굴 시키는 거예요?!”
“아버지가 새 차 뽑았다고 하시길래 부탁한 건데? 괜찮아. 부담 안 가져도 돼.”
“안 가지라고 말해도 안 가져지진 않거든요?! 제가 케인도 아니고!”
김태산이 창을 내리더니 말했다.
“좋은 일 하러 가는 거니 부담 안 가져도 된다. 빨리 타렴.”
“봐. 저러시네.”
“저 그냥 택시 타고 가면….”
“어서 들어가.”
태현은 문을 열고 이다비를 집어넣은 다음 옆에 탔다. 김태산이 그걸 보며 물었다.
“커플티냐?”
“아뇨. 유니폼이요.”
“근데 평소 입는 거랑 다르잖아?”
“새로 온 모델이라서요.”
“다른 팀원들은 왜 안 준건데?”
“입으면 밖에 나가서 헛짓거리 할까 봐요.”
“아오. 재미없는 놈 같으니.”
“?”
김태산은 혀를 찼다. 태현이 머뭇거리거나 말 더듬을 줄 알았는데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탁탁 튀어나왔다.
누구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재미없게 컸다!
“저, 정말 죄송해요.”
이다비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정말 할 거 없긴 했으니까… 내가 새 차 샀다고 자랑한 게 잘못이지. 그리고 뜨거운 효자를 둔 것도 잘못이고.”
새 차 사서 어디 갈까 자랑하는 아버지에게 ‘저 자선대회 나가는데 저 좀 데려다주시죠’라고 말하는 뜨거운 효자!
좋은 일 하는 거라 뭐라고 반박할 수 없으니 몇 배로 배가 아팠다.
“어. 그런데 아버지 판온에 돈 쓰시느라 다른 데에는 돈 안 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게다가 영지 사느라 돈도 많이 썼을 텐데?
“후후후. 판온에서 돈 좀 벌었거든.”
“?”
“요즘 장사하기 얼마나 좋은데. 아들아. 넌 맨날 싸움만 하고 다니니 모르겠지만, 사실 판온의 진정한 힘은 거래에서 나온단다.”
김태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바로 지금이 아버지로서의 연륜과 체면을 세울 때!
태현하고 1:1로 붙으면 피지컬이 부족해서 이길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달랐다.
판온의 거대한 경제 흐름을 손에 넣고 굴리는 김태산의 모습을 본다면 태현도 존경할 수밖에 없으리라.
“오. 뭐 하시는데요?”
“요즘 이곳저곳에서 영지전 한다고 전쟁물자 구입하지, 게다가 화산의 저주 때문에 냉기 관련 아이템이 미친 듯이 나가지… 아. 미리미리 준비해놓길 잘 했어. 너 오크 NPC들이 얼마나 일 잘하는지 아냐? 저기 중국 작업장 애들보다 더 잘 한다니까.”
김태산과 그의 길드의 강점은 우르크 지역에 깔린 수많은 오크 부족들에게서 나왔다.
숫자만 놓고 보면 판온 최강!
“뭔 작업장이요? 판온에서 어떻게 작업장을?”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움직이는데 작업장이 가능한가?
“말 그대로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하는 거지. 태현이 너, 중국 쪽 죄수들이 판온으로 노가다하는 거 알고 있었냐?”
“…예??”
태현은 경악했다.
뭐 그런 미친 짓이?
“나도 몰랐는데 몇몇 곳에서는 그걸로 진짜 작업장 돌리더라. 광산에서 미친 듯이 곡괭이질 하는 거야. 대놓고는 못 하지만 몰래몰래 하는 곳이 더 있을걸.”
“…….”
태현은 오랜만에 소름이 돋았다.
태현이 아무리 효율을 극한으로 따지는 사람이라지만 저건 좀 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오크 부족들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 이거지. 이제 제작 스킬들도 올라서 꽤 쓸 만해졌어.”
“이다비. 그러고 보니 저번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대량으로 오크제 무기 사서 팔지 않았나?”
“네. 아마 저게 그걸 걸요. 저쪽 전쟁물자 아이템들 시세가 좀 싼 편이라서 산 다음 물량 조절해 버리면 가격 이득 보기가 쉬워요.”
“…….”
김태산은 싱글벙글하던 표정을 멈추고 시무룩해했다.
태현이 절대 하지 않을 분야에서 대박을 쳤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오, 이놈의 파워 워리어 놈들!
진짜 짜증 나!
“…그래도 실버 와이번은 우리 길드에서만 팔 거다.”
김태산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실버 와이번을 꺼냈다.
실버 와이번은 보통 와이번과 달리 아주 강력한 장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은색이라는 점이었다.
이 희귀한 와이번을 구하기 위해 오크 아저씨들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었던가!
“아. 그 실버 와이번 인기 많았죠?”
이다비가 알아주자 김태산은 표정이 방긋 펴졌다.
“그렇지!”
“부화하는 숫자가 적어서 힘드시고요.”
“그렇지! 고민이라니까. 하하.”
“지금 우르크 쪽에 팔고 있는 와이번 전용 먹이들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더 질 좋은 거 없나 찾아보도록 노력할게요.”
“…그것도 파워 워리어 애들이 팔고 있는 거였냐?”
“네? 네.”
“…….”
김태산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영지 운영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파워 워리어!
뭔 놈의 곰팡이도 아니고….
“애들아. 저기 한강 경치 좋다. 한강 봐라 한강.”
“아버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화제를 돌리시려는 것 같은데요.”
“아냐.”
“제가 그냥 넘어가길 원하시는 것 같으니 넘어가드릴….”
“아들아. 지금 네가 한강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이야. 한강 예쁘네요. 그렇지 이다비?”
* * *
“와. 저런 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누구야?”
“돈 좀 벌었나 본데. 누구지? 김철수인가?”
“…헉. 김태현이잖아?!?”
이번 LK 그룹에서 진행하는 자선대회는 판온 선수나 랭커들만 온 게 아니라, 유명 플레이어들도 있는 자리였다.
유명 플레이어라는 건 꼭 레벨 높아야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판온에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유명할 수 있었다.
문제는 평소 태현을 만나려면 대회에서 뛰는 선수거나, 아니면 랭커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실제로 볼 일이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줄 서요! 줄 서! 거기! 새치기하지 마!”
“여기 무슨 줄이에요?”
“김태현 만나서 악수하는 줄.”
“헉. 나도 서야지.”
대회 시작도 전에 갑자기 열려 버린 팬미팅!
“여러분들.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안에 들어가셔야죠.”
“이제 곧 대회 시작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대회 관계자들이 당황해서 나와 말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
책임자들은 진땀을 흘리며 직원들을 재촉했다.
“야. 뭐하는 거야? 빨리 착석시켜. 이제 곧 사장님 오셔서 개회 연설하실 텐데, 자리는 텅 비어 있고 입구에 저렇게 줄 서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자선대회를 주최하는 LK 전자의 윤 사장은 이런 부분에서 뽐내는 걸 매우 좋아했다.
물론 좋은 일 하는 건 맞지만, 사람은 좋은 일을 하면서 자랑하고 싶어 할 때도 있는 법.
만약 사장이 도착했는데 자리에 아무도 안 앉아 있고 회장 입구에는 불난 것처럼 사람들이 와르르 모여 있으면….
모가지가 와르르 날아가겠네!
“지금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팬들까지 다 와서 바로 통제할 수가 없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 아니, 김태현은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부장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김태현이 인기 최고의 선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등장하자마자 이 주변의 사람을 확 끌어모아서 마비시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심지어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기!
“김태현을 어떻게든 안으로 데리고 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나?”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김태현 선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못 들어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랬다.
태현과 이다비는 지금 회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막혀 있는 상태였던 것!
주차장에서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김태산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럽기도 하고 안 부럽기도 하고….’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으니 저렇게 되는구나!
보안요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태현 때문에 몰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음. 힘으로 밀고 가면 안 되겠지?”
태현이 중얼거리자 이다비가 기겁해서 말렸다.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판온에서는 PK를 해도 되지만 현실에서는 안 돼!
“안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
“여기도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곧 풀리지 않을까요?”
태현과 이다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몰린 팬들과 악수하고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
태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다비. 내 뒤로 오는 게 좋겠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눌리겠어.”
“어, 그건 태현 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음. 난 좀 다르지.”
태현은 옆과 뒤에서 다가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줄을 서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럴 때 줄 안 서는 사람들은 꼭 나오게 마련!
“김태현 선수! 팬입니다!!!”
“줄은 저쪽인데.”
“사인 해주세요!”
“하하.”
태현은 웃음을 멈추고 무질서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살기!
그러자 다가오던 사람들은 식겁해서 멈춰 섰다.
“줄, 줄 서러 가야겠다.”
“저쪽이 줄이지?”
“…판온 스킬 갖고 나오신 거 아니죠??”
눈빛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모습에 이다비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현실에서 판온 하시나!?
한편 무질서한 사람들을 억세게 밀어내는 그 솜씨에, 멀리서 보고 있던 보안요원들은 감탄했다.
같이 행사 뛰어도 될 솜씨다!
“사장님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그, 그것이. 김태현 선수가 생각보다 너무 인기가 좋아서 그게….”
관계자들은 횡설수설했다. 그들도 사실 이게 뭔 상황인지 몰랐다.
이걸 누가 예상했겠는가!
“지금 곧 사장님 들어오실 텐데 어쩌실 겁니까?”
“어으, 그게, 그러니까, 으아, 으어.”
“어. 사장님 어디 가셨어? 방금까지 뒤에 계셨는데.”
“??”
* * *
“이건 대체 뭔 줄인가?”
“김태현 선수 사인회 줄이요.”
“오… 그런 이벤트도 있었나? 역시 젊은 친구들이 아이디어가 좋군! 홍보팀을 칭찬해야겠어.”
LK 그룹의 윤 사장은 감탄했다. 자칫 지루하게 될 수 있는 자선행사를 게임 대회 형식으로 연 것도 놀라웠는데, 이런 막간 행사까지 넣다니!
물론 예전이었다면 ‘뭔 놈의 게임이야!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 사장의 시각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지금 윤 사장은 한창 판온에 푹 빠지는 시기였던 것이다.
선수들 얼굴만 봐도 즐겁고 반가운 시기!
“나도 서야겠군.”
원래라면 사장의 권력으로 김태현을 단독 대면한 다음 멋들어지게 사인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한 판온 팬으로서의 순수함을 지키고 싶었던 것!
…그러나 윤 사장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빨리빨리 정리해! 사장님 보시면 큰일 난다고!”
“뛰어! 뛰어! 지금 다른 곳에 나가 있는 팀들도 불러!”
사방에서 추가로 달려온 보안요원들이 몰려오면서 소란이 급격하게 진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태현 선수!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우우우! 우우우우!
사방에서 모인 팬들이 아쉬움에 야유를 보냈지만 보안요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행사 시작도 못하겠다!
“좀 늦게 시작해도 되지 않나! 뭐 이리 융통성이 없어!”
윤 사장의 분통에 옆에 있던 팬들도 동의했다.
“맞는 말이에요! 대체 어떤 놈이 재촉을 하는 건지!”
“그래, 대체 어떤 놈… 잠깐.”
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