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21화
태현의 의심과 달리 린즈펑은 100% 선의로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린즈펑의 말과 달리 린즈펑의 도움은 매우 유용했다.
린즈펑 개인도 랭커였지만 무엇보다 린즈펑과 파티장들의 신분이 중요했던 것이다.
실력 있는 중소 규모 길드들을 이끌고 있는 길마들!
이런 길드들은 대형 길드처럼 유명하진 않더라도 탄탄한 저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었다.
길드 하나하나는 대형 길드와 비교할 수준이 안 되지만, 힘을 합치면 대형 길드도 무시하지 못했던 것!
애초에 길드 동맹도 중국 쪽 길드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 아니던가.
“그래.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도록 하지.”
“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린즈펑은 몇 번이고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니 물러갔다. 태현 일행은 신기해하며 말했다.
“유난히 예의 바른 사람이네요.”
“판온에서 보기 드문 타입이야.”
“보통 길마들은 좀 더 뻔뻔하게 마련인데 말이야.”
“…….”
이다비는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녀를 말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찔렸던 것이다.
“크흠. 김태현. 그래서….”
“?”
“영화는?”
“인터뷰가 그렇게 하고 싶냐? 평소에도 경기 끝나면 하잖아.”
“그거랑 영화에 나오는 건 다르지!”
영화에서 자기 얼굴을 내밀고 폼나게 떠드는 건 평소 인터뷰와 비교할 수 없다!
“저런 허영심에 가득 찬 놈 같으니….”
“너, 너희들도 나가고 싶으면서!”
“솔직히 양심이 찔려서 인터뷰할 때 말 많이 못 할 것 같은데.”
최상윤은 생각에 잠겼다. 영화에서 팀 KL을 인터뷰할 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니팅거스를 잡으러 갈 때 무슨 기분이었나요?
-어, 태현이가 알아서 한다길래 ‘뭐 이제까지 한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따라갔는데요.
-…아. 예.
말해도 편집될 거 같은데?
“맞습니다. 괜히 주제에 맞지 않게 욕심부리면 큰코다칩니다. 무리해서 인터뷰에 집착하지 않아도 실력으로 증명하면….”
“하지만 나는 내 실력보다 과분한 대접을 받고 싶다고!”
“와. 뭐 저런 뻔뻔한 놈이.”
“원래 저랬습니다.”
“시끄러! 너희들이 뭘 안다고. 동창회 나가서 대단하다고 대접 받고 싶어! 친구들 사이에서 대단하다고 대접 받고 싶단 말이야!”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요?”
이다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팀 KL의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류 선수들로 평가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팀 안에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근데 나 놀리고 무시하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그건 선수 성적을 낸다고 달라질 게 아닌 것 같….”
“쉿. 케인 울겠다.”
듣고 있던 태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케인. 네가 그렇게 각오가 확실하다니 말리기 힘들군.”
“!”
“네가 앞으로 내가 하자는 것에 불평불만 없이 잘 따라온다면 출연 건을 고민해 보지.”
“물, 물론이지!”
케인은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 대답에 최상윤이 깜짝 놀랐다.
“야. 너 저게 뭔 뜻인지 아냐?”
“뭔 뜻인데?”
“태현이가 자기 방식대로 널 굴리겠다는 거야.”
“…그건 이제까지도 그러지 않았냐?”
‘예리한데?’
다른 일행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그건 그래!
그러나 최상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 한 건… 널 배려해 준 면이 컸지. 네가 진심이 된 태현이를 겪어보면 ‘아, 내가 정말 배려받고 있었구나’ 소리가 절로 나올 거다.”
판온 1 때 태현과 같이 던전 돈 적이 있던 최상윤은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도 가끔 꿈에서 태현과 같이 던전 도는 악몽을 꿨다.
-뛰어! 뛰라고! 몬스터 리젠되잖아! 왜 안 뛰는데?
-나, 물약, 먹고, 있거든!
-물약 먹을 시간은 있으면서 뛸 시간은 없냐? 뛰어! 지금 너 때문에 효율이 1% 떨어졌잖아! 뛰라고 이 자식아! 앞으로 멈출 때마다 공격한다!
-진짜 공격하려는 건 아니 크악! 이런 미친 자식! 진짜 때렸어!
-죽기 싫으면 움직여서 몬스터를 잡아!
-크아악! 내가 왜 이런 미친놈하고 친해져서!
“…그러니까 이제까지 던전 돌거나 스킬 훈련할 때의 김태현이, 날 배려해 주는 친절한 김태현이었다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 영화 안 나가도 되니까 방금 했던 말 취소….”
“될 리가 있겠냐?”
* * *
단두대 매치!
스포츠에서 매우 절박한 두 팀이 붙을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리그 막바지에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의 두 팀이 붙는 경우나….
꼭 그런 경우까지는 안 가더라도, 한 판 질 경우 매우 타격이 큰 상황은 종종 있었다.
바로 지금의 <베이징 파이터즈>처럼!
-감독 XX 잘라라!
-명장병 걸린 놈! 왜 비싼 돈 줘서 저런 놈 데리고 온 거냐!
-이번 경기에서도 지면 무조건 잘라!
사실, <베이징 파이터즈>의 모든 혼란은 저번 팀 KL과의 경기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리그의 상위권을 달리며 잘나가고 있었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더더욱 컸던 것이다.
팬들 눈에는 명장병 걸린 감독이 이상한 짓 했다가 팀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인 사베트 입장에서는 매우 매우 억울한 일이었지만….
본인은 이미 반쯤 체념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돈 많이 준다고 온 내가 멍청했지….’
사베트는 포기했다.
어디 한번 니들 맘대로 해봐라!
감독이 포기하자 단장 쪽 라인을 탄 코치들이 이것저것 해보고 있었지만 당연히 잘 될 리 없었다.
선수들 팀워크도 망가진 상태에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선수들을 올리고 써먹으려다 보니 약한 팀한테도 두들겨 맞고….
그리고 이 상황에서 만나는 팀 KL과의 두 번째 경기!
최악의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만 단두대 매치고 저쪽은 딱히….’
팀 KL은 져도 솔직히 별 손해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1등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패 우승 날아가는 게 좀 속이 쓰리긴 하겠지만, 다른 게임단 앞에서 ‘윽! 무패 우승을 못 하고 그냥 우승을 하다니… 너무 분하다…!’ 이딴 소리를 하면 당장 주먹이 날아올 것!
웅성웅성-
“뭐하냐 너희?”
사베트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얼마 전부터 경기 전략은 단장 쪽 라인 코치들이 전부 맡아서 하고 있었기에, 사베트는 결과만 듣고 있었다.
좋은 선수들 데리고서 말아먹는 꼴 보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주문서 준비하는데요?”
“그게 주문서인 건 나도 아는데… 그 주문서를 왜 챙기는 거냐…?”
선수들이 광역 마법 주문서를 닥치는 대로 챙기는 걸 보며 사베트는 당황했다.
물론 광역 스킬은 잘 쓰면 언제나 좋은 스킬이긴 했다.
그런데 지금 선수들이 챙기는 주문서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광폭한 화염의 저주 주문서:
지독한 원한의 화염이 이 주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사용하면 통제할 수 없는 화염이 주변을 모조리 태워버릴 것입니다.
운석 추락 유도 주문서:
통제할 수 없는 쪼개진 운석이 하늘 위에서 떨어집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 사람이 이런 마법을 쓰는 걸까요?
플레이어들이 아직 다룰 수 없는 수준의 강력한 마법 주문서!
경매장에서 구하기도 힘든 희귀하고 비싼 주문서였다.
위력이야 강력하겠지만 이런 주문서를 쓴다는 건 같이 죽자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걸 대회에서 쓰다니.
미쳐 버린 것인가?!
“이걸 왜?!”
“어, 코치님들이 이번에 이거 쓰라고 하시던데요. 서로 같이 죽으면 무승부 가지 않겠냐고.”
“뭔 개소리야! 그러다가 너희가 먼저 죽으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세상에 똑같은 건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 지는 것과, 날로 먹으려다 지는 건 차원이 다른 법!
잔뜩 기대하고 있던 팬들이 자폭하다 죽는 걸 보면 ‘졌지만 잘 싸웠다’ 하겠는가?
‘그냥 죽은 김에 게임 접어라’ 하겠지!
“그렇게 말하셔도 코치님들이 지시한 거라….”
“…아오 진짜! 이놈의 팀은!!”
* * *
-곧 다음 경기구나. 파이팅이다. 아들.
태현의 가족 단톡방은 경기 전, 경기 후에 가장 활발하게 올라왔다.
태현은 평소처럼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
아버지와 어머니가 팀 KL 이야기를 안 하고 다른 게임단 이야기를 하고 있으셨던 것!
-<알래스카 폴라베어즈>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 아무래도 곧 <유성 게임단>을 만나니까 힘들지 않을까?
-저런… 어떻게든 이겨서 순위 방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해해. 윤희야. 나도 같이 응원해 줄게.
‘?????’
아니?
태현은 당황했다.
내가 다른 가족 단톡방에 들어온 건가?
-아니… 아니. 저희 팀 응원 안 해주세요?
-했잖냐.
-아니, 좀 더… 뭐… 관심이라던가… 전략 전술 물어보시지 않으세요?
-어차피 이길 텐데 뭘.
-맞아. 태현아. 널 믿는단다. 그래서 <알래스카 폴라베어즈>가….
‘…!’
태현은 깨달았다.
이 두 분들….
다른 팀 팬이 되셨어?!
-아니, 어머니. 지금 팀 KL 말고 다른 팀 팬 되신 겁니까?
-음. 태현아. 그 사실이 네 경기력에 영향을 끼치니?
-그건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러면 난 요즘 <알래스카 폴라베어즈> 경기를 즐겨보고 있단다.
솔직하신 어머니!
태현은 당황했다.
설마 아버지가 꼬드겼나?
-혹시 아버지, 유성 게임단의 의뢰를 받고….
-뭔 미친 망상을 하는 거야?! 인마, 아냐! 누굴 뭘로 보고!
-그래서 아버지는 팀 KL 팬이라 이거죠?
-아니. 난 요즘 2부 리그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경기 챙겨보고 있는데. 거기 킹태현넘버원이란 선수가 잘하더라.
-…….
아버지는 2부 리그, 어머니는 1부 리그 다른 팀 팬이 되었다는 사실에 태현은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왜요?
-너희 팀 너무 잘해서 솔직히 긴장도 안 되고… 어차피 1등 하겠지 싶어서 다른 팀 경기 보는 건데.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얘네는 흥미진진하다고. 얘네가 다음 시즌에 1부로 올라올지 안 올라올지 엄청 궁금하지 않냐? 난 지금 되게 궁금하다.
-아버지한테 여쭤본 거 아니거든요. 어머니?
-<알래스카 폴라베어즈> 유니폼하고 마스코트가 귀엽더라. 경기도 흥미진진하고.
-아니, 거기 팀 중하위권 아니에요?
태현은 억울했다.
김태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1위 팀 경기를 봐야지 왜 중하위권 팀 경기를 챙겨보고 있으시단 말인가.
-경기 내내 역전하고 역전하고 역전하니까 재미가 있을 수밖에… 솔직히 넌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잖아.
태현은 떨떠름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모님들이 뭐 다른 팀 팬을 해도, 태현을 응원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너무 잘한다고 다른 팀 경기 보실 줄은 진짜 생각도 못 했네!
‘그래. 유성 게임단 팬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이세연 응원하시면 그건 진짜 좀 속이 쓰렸을 것 같….
* *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추락한 운석이…]
[아키서스의 신성 영역…]
[행운…]
[아다만티움 갑옷이…]
“…….”
“…….”
“…베이징 파이터즈 놈들 진짜 미쳤냐??”
케인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5분 만에 끝난 경기!
심지어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 얼굴도 못 보고 끝난 경기였다.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메시지창으로 운석 날아오고 지진 시작된다고 뜨더니….
버티다 보니 상대 팀 진영 다 박살 났다고 경기가 끝난 것이다.
“이 자식들 때문에 승부조작 의심받는 건 아니겠지….”
“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거래? 무승부 노린 건가?”
“태현아. 무슨 생각하고 있냐?”
“부모님이 왜 경기 안 보시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
태현의 생각과 달리, 전 세계의 수많은 판온 팬들은 팀 KL의 경기를 매우 매우 재밌게 보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대급 경기였다 ㅋㅋㅋㅋㅋㅋ
경기를 보고 웃지 못했던 건 베이징 파이터즈 팬들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