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14화
보아하니 레벨은 별로 높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니팅거스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키서스의 화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저 사람들을 데리고 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무언가 속셈이 있다!
‘아키서스의 권능 중에는 제물을 바쳐서 강화하는 권능도 있지 않았나? 헉. 설마… 여차하면 저기 있는 놈들을 전부 제물로 바쳐서…? 무시무시한 놈 같으니…!’
[니팅거스의 공포가 오릅니다!]
[니팅거스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
태현은 당황했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기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인가? 단순히 구경꾼들 같은데.’
보아하니 니팅거스가 어디로 가나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곳곳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있긴 했지만 전투원은 아니었고….
그런 것에 겁을 먹다니, 니팅거스가 상당히 약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원래 사람이 좀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게 마련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쟤는 드래곤이긴 한데… 뭐 그렇다 치자고.’
[니팅거스가 언령으로 주변의 소리를 막아버립니다.]
[대화가 퍼져 나가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모르는 모험가들한테까지 자신의 굴욕이 퍼져 나갈까 봐 니팅거스는 재빨리 손을 썼다.
그리고 슬쩍 눈치를 봤다.
-아키서스 님. 시끄러울 수 있으니 마법을 썼습니다. 괜찮겠지요?
“아. 물론이지.”
태현도 OK했다.
원래 이런 협상은 밖으로 안 새어나갈수록 쓸모가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겠지!
‘그리고 이런 비밀은 그 자체가 무기가 된다.’
-자. 그러면 협상을 시작하시지요.
전투천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두둥!
[니팅거스와 협상이 시작됩니다!]
[협상은 서로가 내놓는 것을 비교해서 결정됩니다. 너무 무리한 제안을 할 경우 협상 자체가 끝날 수 있습니다.]
[매우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상에 보너스를…]
[매우 높은 악명을… 보너스를…]
[최고급 화술 스킬을…]
[칭호: 드래곤 슬레이어를…]
[아키서스의 전투천사를…]
[니팅거스가 겁을…]
[……]
[……]
협상!
상인 플레이어라면 자주 하는 NPC와의 진검승부였다.
노련한 상인 플레이어라면 NPC 상대로 더 많이, 더 좋은 걸 뜯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협상에는 위험이 도사렸다.
자기가 유리하다고 막 나갔다가는 협상 자체가 끝날 수 있는 것!
그 아슬아슬한 선에서 얼마나 뜯어내는지가 상인의 능력이었다.
태현이 상인 직업은 아니었지만 스킬, 스탯을 보면 상인 직업 뺨을 몇 번은 칠 정도의 협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평범한 NPC였다면 아키서스의 혓바닥에 그대로 쓸려 나갔겠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무려 드래곤인 것이다.
판온에서 드래곤 상대로 만족스러운 협상을 한 플레이어는 이제까지 없었다!
‘음.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막막하군.’
언제나 과감하던 태현도 이번 협상에서는 좀 막막했다.
어떤 걸 뜯어내야 하는가?
태현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전투천사 중 몇몇이 태현의 뒤로 다가왔다.
주인을 위한 조언을 하기 위해서!
-헷헷. 자비로운 마음을 베풀어주시면 놈도 이번 일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을 겁니다.
“으음!”
그 조언에 태현은 고민했다.
은혜를 베풀라니….
아키서스와 안 어울리긴 하는데 확실히 그것도 방법 중 하나….
-이 건방진 자식이 감히 어디서 입을 놀려!
-감히 악마 놈이 아키서스 님을 현혹시키려 해! 이놈!
찰싹, 찰싹!
분노한 아키서스의 전투천사들이 악마를 향해 채찍을 날렸다.
방금 태현에게 조언한 건 아키서스의 전투천사가 아닌, 아키서스의 전투천사가 끌고 다니던 악마였던 것!
-크으윽! 아깝다. 아키서스 놈을 타락시킬 수 있었는데!
-주인이시여. 악마 놈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저 간교한 혓바닥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키서스와 안 어울리는 자비로운 말이다 싶었는데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한 소리였나…!
채찍으로 악마를 제압한 전투천사는 태현에게 조언했다.
-주인이시여. 드래곤은 내버려 두면 지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까부는 건방진 파충류 놈들입니다.
-…….
-…….
용용이, 흑흑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옆에서 듣고 있는데!
-기회가 오셨을 때 놈의 심장을 움켜쥐고 영혼을 묶어 속박시켜야 합니다! 골드 드래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불가능한 건 없습니다. 잘 속이면 됩니다!
-…….
용용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태현도 살짝 마음이 약해져서 용용이를 달랬다.
“아냐. 너희는 속은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서투른 계약을 한 거야.”
-그, 그렇지? 주인이여? 우리 종족은 속은 게 아니지? 골드 드래곤이 그렇게 속을 리가….
“그래그래. 저기 흑흑이를 봐. 사디크보다는 낫잖니?”
-…….
이제는 흑흑이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이런.’
태현은 용용이와 흑흑이를 다시 한번 달랬다.
전투천사 놈들 은근히 귀찮네!
-주인이시여. 니팅거스를 협박하십시오!
-아니다, 아키서스! 니팅거스를 풀어주는 거다!
-이놈이 아직도 입을!
-크아악! 아키서스 놈을 타락시키고 말겠다!
한쪽에서는 천사가, 한쪽에서는 악마가 떠들어대니 두 배로 정신이 사나웠다.
태현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애들아. 날 믿고 따라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니팅거스 상대로 그렇게 뻗댈 상황이 아니다.”
전투천사는 시간제한이 있고, 화신의 일격은 1년 이후에 쓸 수 있고….
니팅거스가 먼저 숙이고 들어올 때 적당히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니팅거스가 받아들일 만한 제안을 해야 한다고. 지금 내가 생각한 건 니팅거스가 갖고 있는 금은보화들과 아이템들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드래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드래곤의 보물이었다.
산더미 같은 보물들!
수십만 골드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아니, 골드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판온 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전설 아이템들도 나올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오리하르콘이라도 나온다면….’
-주인이시여. 좋은 생각 같지 않습니다.
-주인님. 저도 그건 좀….
-주인이여. 그건 아닌 것 같다.
전투천사, 흑흑이, 용용이 셋 다 거절!
“!?”
태현은 당황했다.
상대가 저 정도로 굽혔으면 이 정도는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인이시여. 혹시 니팅거스를 바로 잡으실 겁니까?
“아직은 없는데.”
-그렇다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드래곤은 비열하고 야비하고 탐욕스러운 놈들이라….
-…….
-…….
-…한 번 보물을 뺏기면 죽을 때까지 원한을 가질 겁니다. 절대 마음 편히 주무시지 못하시겠지요.
“협상으로 내준 건데도?”
-협상으로 내주든 자기가 줬든 간에 드래곤 놈들은 비열하고 야비하고 탐욕….
“알겠어. 알겠어. 그만 욕해. 애들이 자꾸 듣잖아.”
[용용이가 감격…]
[흑흑이가 감격…]
[……]
[드래곤 종족을 상대할 때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드래곤을 달랠 때…]
-…스러워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원한을 품을 것입니다.
태현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불리한 협상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보물을 내준다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드래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정면으로 덤비든, 계략을 꾸미든, 드래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면….
‘게임 접어야겠군.’
“그렇다고 드래곤이 원한 안 가질 아이템만 받으면 내가 손해잖나. 그런 거는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원한을 가지지 않을 다른 것… 이를테면, 몸은 어떻습니까?
“몸?”
태현은 깜짝 놀랐다.
“물론 드래곤의 고기는 최상급의 요리 재료긴 하고, 가죽과 발톱도 전설 등급의 재료긴 한데….”
-…….
-…….
용용이와 흑흑이가 슬쩍 뒷걸음질쳐서 거리를 벌렸다.
전투천사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이시여. 그, 고기를 말한 게 아니라, 다른 걸 말한 겁니다.
“심장? 아무리 그래도 심장은 안 주지 않을까?”
옆에 있던 악마도 슬쩍 뒷걸음질치려했다. 전투천사가 악마의 목줄을 단단히 붙잡았다.
-…드래곤에게 맹세를 시키란 뜻이었습니다. 주인께서 위험에 처하셨을 때를 대비해, 싸워주는 맹세 말입니다.
“!”
태현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즉 드래곤 소환권을 끊으란 뜻인가?
‘괜찮은데?’
드래곤이 갖고 있는 장비들도 사기적이고 절대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드래곤 소환도 만만찮게 희귀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아다만티움 장비를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차라리 드래곤 소환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니팅거스의 원한을 사지 않는다는 게 컸다. 지금 니팅거스와 사생결단을 낼 게 아니라면 친하게 지내는 게 나았다.
‘판온에서 멀쩡한 드래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어마어마한 이득이긴 하지.’
왕국의 귀족 NPC하고 친해져도 쏟아지는 이득이 상당했다.
도시 내 시설을 우선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못 쓰는 시설이나 퀘스트도 받을 수 있었고, 병사들을 빌리는 각종 특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드래곤하고 친해진다면?
[카르바노그가 확실히 화신은 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태현은 친구가 필요한 상황!
<태현을 죽이고 싶어하는 원수들> 리스트 끝에 니팅거스를 새로 추가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자리 꽉 찬 상태였다.
* * *
“내가 원하는 건….”
꿀꺽!
드래곤이 침을 삼키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니팅거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만약 보물을 달라고 하면….
“네 도움이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보물을 달라고 하는 도움은 아니겠….
“내가 원할 때 날아와서 같이 싸워주는 도움을 말하는 거지.”
-!!
니팅거스는 눈을 크게 떴다.
몸으로 때우라니!
물론 상대가 평범한 모험가였다면 이런 맹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겠지만, 지금 니팅거스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솔직히 아키서스 상대로 이 정도로 끝나면 매우 선방한 것!
‘아키서스는 아주 사악한 신이라 계약 잘못하면 영혼이 묶인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관대하군!’
니팅거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골드 드래곤의 경우도 있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이 정도라면야….
-그, 그거면 됩니까?
“음? 뭐 더 주고 싶다면 레어의 재산 좀….”
-열심히 돕겠습니다, 아키서스 님!
니팅거스는 바로 말을 끊었다. 그 눈에는 보물에 대한 탐욕이 이글거렸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말 꼬리 정도는 잘라서 줬을 수도 있겠다!
‘칫.’
태현은 슬쩍 떠봤다가 포기했다. 상대가 저러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래. 열 번 정도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아, 아니. 열 번이나 도와주는 건 조금… 저도 제 인생, 아니, 용생이 있는 법인데….
니팅거스는 기겁해서 앞발을 흔들었다. 태현이 부를 때마다 달려오는 걸 열 번이나 해야 한다니.
“아니. 지금 박살 난 도시가 몇 개인데!”
-아키서스 님의 도시가 아니잖….
“다 내가 아끼던 도시였다. 언젠간 내가 손아귀에 넣으려는 도시였지.”
뻔뻔함 그 자체!
뒤에서 듣고 있던 전투천사들과 악마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그렇다면 화날 법도 하군.
-마계에서도 남이 찜한 거 건드리면 욕먹는 법이지.
-이놈! 아직도 입을!
-크아아악! 난 포기하지 않는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에 니팅거스는 자기도 자기 편 들어줄 부하들을 데리고 올 걸 하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