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02화
생각해 보니 그랬다.
괴수들은 키메라로 바꿔서 목숨을 연명하고, 펠마른은 유령이 되어서 버티고 있는데, 황자라고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제까지 살아 있었겠는가.
키메라도 언데드도 안 됐으면 그냥 죽어야지!
황자는 딱히 미련도 없었는지 언데드도 안 되고 깔끔하게 늙어 죽은 상태였다.
[황자를 구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설마 교황님… 황자를 구하려고 하셨던 겁니까? 역시 교황님이십니다. 하지만 황자께서는 예전에 돌아가셔서… 불만 없이 편안하게 살다가 돌아가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 그렇군….”
태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사실 위에 있는 죄수들한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정문 뜯어간 이상 죄수들이 여길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차라리 말하고 보상받는 게 낫겠지?’
키메라 죄수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숨겼다가는 친밀도에 페널티만 받을 수 있었다.
차라리 진실을 말해주고 보상받는 게 나을 것이다.
‘키메라 죄수 놈들이 미쳐 날뛰어도 일단 친밀도만 높으면 난 괜찮을 테니까.’
설마 황자가 늙어 죽었을 거라고는 태현도 예상 못 했다!
‘아이템 챙기고 싶은데… 괜찮으려나?’
태현은 펠마른의 시선을 신경 썼다.
교단으로 확실히 집어넣기 전까지는 착한 사람인 척해야지!
도중에 펠마른이 도망치면 안 되니까…!
-왜 그러십니까?
“저 안에 황자의 시신이 있을 테니, 그거라도 수습해서 장례를 지내주고 싶어서.”
겸사겸사 아이템도 챙기고!
-아… 교황님. 참으로 선량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미 예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자가 가진 아이템이나 챙기시지요. 교황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
[?]
어라?
서로 할 말이 바뀌지 않았나?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황자의 아이템을 내가 가져가도 되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황님께서 대륙을 위해 아이템을 쓰신다면 황자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매우 유연한 펠마른 주교!
딱히 황자가 기뻐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태현은 냉큼 수락했다.
“그러도록 하지!”
이야 신난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
‘이건 처리하고, 이건 챙길 만하고, 이건 비싸긴 하겠지만 나나 애들이 낄 건 아닌 거 같고. 음….’
태현은 이다비와 머리를 맞대고 빠르게 견적을 내갔다.
그중 몇 개 쓸만한 게 나왔다.
일단 <고대 제국 황제의 망토>!
고대 제국 황제의 망토:
내구력 380/1000, 물리 방어력 100, 마법 방어력 500.
작위 <왕> 이상만이 착용 가능.
비전투 시에만 착용 가능.
수리 불가능.
스킬 ‘제국 황제의 시야’ 상시 발동, 스킬 ‘제국 황제의 위엄’ 상시 발동.
착용 시 권위 대폭 증가. 왕국 전체 관리에 스탯 보너스. 왕국 전체 퀘스트에 보너스. 왕국 퀘스트 상시 발생.
고대 제국 황제가 정사를 돌볼 때 걸쳤던 우아한 망토다. 망나니 황자가 겉옷을 훔쳐 간 이후로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듯 품위 있다. 뛰어난 재봉술로 모든 재봉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걸작이다.
천옷 주제에 내구도와 마법 방어력이 아다만티움 갑옷에 버금가는 괴물!
물론 아다만티움 갑옷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었지만, 단순한 망토가 이 정도 마법 방어력이 있다는 게 괴물이었다.
아쉽게도 비전투 시 착용이라 이걸 착용하면 태현이 공격을 못 할 테지만….
‘사실 방어력보다는 다른 옵션이 중요하지.’
이건 전형적인 통치용 장비였다.
왕국 관련 퀘스트를 진행할 때 입는 장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효과였으니 별 상관없었다.
다음은 <고대 제국 황제의 반지>였다.
고대 제국 황제의 반지:
내구력 35/500, 마법 방어력 300.
작위 <왕> 이상만이 착용 가능
수리 불가능.
착용 시 권위 대폭 증가. 일정 조건으로 특수 퀘스트 발생.
고대 제국 황제가 끼고 있던 반지다. 망나니 황자가 반지를 훔쳐 간 이후로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품위 있는 반지다.
‘이것도 강력하다!’
둘 다 <수리 불가능>이라는 옵션이 아쉬웠지만, 태현에게는 괜찮았다.
태현은 강력한 행운 스탯 덕분에 어지간하면 내구력이 닳지 않는 것이다.
내구력이 1인 아이템도 아껴 쓰고 오래 쓸 수 있는 게 태현!
무엇보다 이건 비전투용이 아니라서 더 쓰기 편했다.
‘그나저나 이 황자 놈은 뭐 얼마나 훔친 거야?’
왜 이런 추운 지하에 갇힌 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훔쳐댔으니 갇혔지!
* * *
“요즘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김태현.”
“?”
케인이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하자,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케인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태현이 끓여준 김치찌개를 먹고 있던 최상윤과 정수혁이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또 쓸데없는 소리지?”
“리플에 악플 달렸습니까? 집안일 좀 하라고?”
“그러게 집안일을 했어야지.”
“저번 경기에서 한 실수일지도 모릅니다.”
원래 팬들은 이겨도 실수하면 호되게 비판을 했다.
케인은 이런 부분에서 맨날 욕을 먹는 사람!
특히 판온은 하는 입장과 보는 입장이 매우 다른 게임이었다.
직접 뛰는 사람은 정신없어서 온갖 실수를 하지만, 보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어서 온갖 훈수를 둘 수 있는 게임!
-아니 거기서 왜 안 끝내!
-케인 넌 머리가 없냐! 팔이 여섯 개인데 머리도 두 개 더 달아라!
-저거 저거 도망가는데 왜 내버려 둬! 끝내! 방패만 들지 말고!
“그런 거 아니거든?! 심각한 거야.”
“뭔데?”
“어떤 놈이 자꾸 선물을 보내고 있어.”
“…….”
“…….”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선물이…?”
“부모님 집에 한우세트 같은 고급 선물이 계속 날아오고 있다고.”
“그건… 좋은 거 아닌가?”
“부모님께서 좋은 일을 하신 거 아냐?”
“아니거든?!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데 안 찜찜하냐 너희는?!”
“선물에 뭐 아무것도 안 써 있었나?”
태현은 진지하게 물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위에 뭐라도 안 써 있으면 수상쩍은 선물 아닌가.
“써 있는데 아무리 봐도 장난이야.”
“뭐라고 써 있었는데?”
“LK 전자에서 보냈다고 써 있었어. 그게 말이 되냐?”
“…….”
“…….”
국내 굴지의 대기업 중 하나인 LK 전자!
그런 곳에서 케인의 부모님한테 선물을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화를 냈다.
“어디서 그런 사칭을 하는 거야! 게다가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 동생한테도 새 노트북하고 스마트폰을 보냈다니까. 어떤 놈이 이렇게 자꾸 수상한 짓을 하는 거야!?”
좋은 짓을 해도 이렇게 하면 기분이 나빴다.
케인은 이를 갈며 화를 냈다.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
이런 장난을 하다니!
“팬 아닐까?”
“팬보다는 안티일 수도 있어.”
“안티가 한우세트랑 노트북을 보낸다고?”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의외로 진짜 LK 전자에서 보낸 거 아닌가?”
“에이. 선배님. 그게 말이 됩니까. LK가 뭐가 아쉬워서 케인 씨한테 그럽니까?”
“너희들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LK에서 보냈다고 했으면 LK에서 보낸 거겠지. 굳이 LK를 사칭할 이유가 없잖아. 이름을 안 달면 안 달았지.”
“그, 그러고 보니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LK 전자 거긴 했는데….”
“스마트폰은 유성 게 낫지 않나?”
“LK 스마트폰은 좀 별로인데.”
“으음. 기다려봐. 내가 연락해서 물어볼 테니까. 이런 건 그냥 연락해서 확인하는 게 낫겠군.”
태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 *
자선경매에서 돌아온 LK 전자의 윤 사장은 패배감을 곱씹으며 판온 경기를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어디 얼마나 재밌나 보자!
-흥. 이런 게 뭐가 재밌다고.
-음. 조금은 재미가 있을지도.
-아니! 왜 거기서 달려들어! 저 저 저 저놈! 저놈 저거 안경 써야 하는 거 아냐!?
-근데 LK 갤럭시는 왜 이렇게 지는 경기가 많지?
-그룹 지원 액수가… 다른 게임단 액수는… 음. 적긴 적군.
-최근에 잘나가는 팀은…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어? 선수 김태현을 임시코치로 들였다고? 이런 게 가능한가? 왜 우리는 안 했지? 아. 액수가 없었지.
-뭐, 이제까지 투자를 안 했으니까 이 정도 투자는… 해줄 수 있겠지. 음음. 이 정도야 뭐.
딱히 E스포츠 같은 것에 투자하려는 게 아니라, 그룹 내 사업체니까 균형을 맞추는 거야!
윤 사장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김태현 섭외를 추진했다.
그러나 LK 갤럭시 홍보팀은 난색을 표했다.
-돈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김태현 선수는 그런 식으로 섭외가 가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장님.
‘이제까지 내팽개쳐뒀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야?’
‘기사 하나 보고 이러나?’
직원들이 반대하자 윤 사장은 발끈했다.
사원들이 도전 정신이 이렇게 없다니!
윤 사장은 게임단이 아닌 LK 전자의 홍보팀을 불렀다.
홍보팀 최 상무는 자신만만했다.
“일은 잘 진행하고 있나?”
“예. 사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젊은 친구들이 뭘 좋아하는지는 꽉 쥐고 있으니까요.”
“하하. 나야 자네를 믿네. 하지만 저번 같은 실수는 하면 안 될 거야.”
“그, 그거는 젊은 친구들의 말을 듣는 바람에… 제가 좀 더 뚝심 있게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LK 전자 홍보팀의 별명은 <홍보계의 이단아>였다.
괴랄하고 특이한 감성의 광고로 홍보하는 이들!
가장 최근에 화제가 된 광고는 이거였다.
-LK 갤럭시의 선수들이 쓰는 스마트폰은 무엇일까요?
-바로 유성 스마트폰입니다.
-2부 리그 선수들이 쓰는 유성 스마트폰보다 LK 스마트폰은 더욱 뛰어납니다. 최고만을 드립니다. LK.
…미친 광고!
책임자들이 전부 시말서를 썼다는 전설의 광고였다.
윤 사장은 이게 최 상무의 잘못이 아니라 그 밑의 직원들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 상무가 OK하지 않았으면 과연 그런 광고가 나갔을까?
“알다시피 LK 갤럭시 홍보팀은 김태현을 섭외하는데 난색을 표했네. 절대 불가능하다더군.”
“허허. 그 친구들 아직 멀었군요.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다니. 저만 믿으시지요.”
“자네만 믿네. 자네는 예전부터 뛰어난….”
말하던 윤 사장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최 상무가 활약한 건 홍보팀이 아니라 다 다른 부서였었다.
홍보팀 가서 딱히 활약한 적이 있었나?
‘에이. 그래도 잘 하겠지. 최 상무인데.’
그걸 보통 낙하산이라고 하지만, 윤 사장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나?”
“사장님. 단 두 단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심’과 ‘감동’입니다.”
“오오…!”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이게 홍보팀의 짬밥인 것인가?
“김태현 같은 선수는 자기보다 자기 동료들을 위해주는 정성에 더 감동 받게 마련. 가장 만만해 보이는 선수를 설득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네! 김태현 선수를 데려와서 코칭을 시키면 LK 갤럭시도 성적이 좀 좋아지겠지.”
겸사겸사 나도 좀 만나보고!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그런 E스포츠 같은 하찮은 콘텐츠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하찮지는 않은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 * *
“???”
태현은 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 그러니까 진짜 LK에서 보낸 게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김태현 선수.
“…보, 보통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보내지는 않지 않습니까? 보내더라도 이유는 말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하하. 진심은 통하게 마련입니다.
“아니 진심의 문제가 아닌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