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90화
“놈들이 대답했어요! 놈들이 대답했다고요!”
“잘했다. 침착하게 굴어. 일단 무시해.”
“예, 예!”
길드원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속으로는 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태현이 그러라고 하니까 참는다!
길드원들은 꾹 참았다.
그러자 다시 귓속말이 날아왔다.
-야. 정말 왔냐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우리가 쓸데없는 귓속말이 너무 많이 와서 그래.
-얼마나 왔는데? 뭐 갖고 왔는데?
“계속 물어보는데요?”
“10분 정도 있다가 대답해 줘. 짜증 내면서.”
길드원들은 기다렸다. 그러자 계속 귓속말이 날아왔다.
-에이. 차단한 거 아니지? 듣고 있잖아. 쓸데없는 귓속말이 너무 많아서 그랬다니까.
-너희도 우리 도움 필요해. 여기 왔으면 우리 도움 필요할걸?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 폭풍에 한 번 휘말리면 그냥 죽는 곳이라고.
“노드란체 아냐?”
“노드란체보다 더 심한 곳이겠지.”
노드란체가 순한 맛이라면 프로즈란드는 매운맛!
이런 환경이 위험한 땅은 무엇보다 지도가 가장 중요했다. 어느 곳이 위험한지, 어느 곳에서 묵을 수 있는지….
지금 <국제강도연합>의 도망자들은 그런 걸 제공하겠다고 꼬시고 있는 것이다.
-아. 필요 없어. 기분 나빠서 뭔… 지들이 사고 쳤는데도 같은 길드원이라고 도와주러 왔더니 쓸데없는 의심이나 하고. 됐어. 꺼져.
-아.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니까. 우리 입장이 되어봐. 얼마나 헷갈리겠어. 사방에서 귓속말이 날아오는데!
더글라스, 찰스, 해롤드.
이 <국제강도연합>의 3인조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이 개자식들 대체 어디로 튄 거냐? 죽여 버리겠어!
-신상 제보받습니다. 비싸게 사례하겠습니다.
-현상금 가격을 두 배로….
평소에 안 친하던 놈들한테까지 연락이 오는 상황!
이 3인조도 나름 욕심 많고 겁 없는 약탈자 플레이어였지만….
전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겁 안 먹는 건 김태현 같은 이상한 놈뿐!
* * *
“지금이라도 묘비를 돌려주자니까!”
“그게 말이 되냐? 너 같으면 돌려준다고 ‘허허 참으로 착한 인간이로구나 내 상을 주겠다’ 할 것 같냐?”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레드 드래곤 아닌가!
묘비를 갖다 준다고 해도 브레스부터 선물해 줄 가능성이 컸다.
“그, 그러면 어느 도시에다가 버리고 가면….”
“그러니까 그걸 레드 드래곤이 받는다고 해도 넘어간다는 보장이 없잖냐! 묘비만 받고 우리 계속 찾아 헤매면 우린 진짜 끝이라고. 판온 접고 싶냐!”
“끄으윽….”
셋은 프로즈란드의 동굴 한구석에서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물론 머리를 굴린다고 없는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이 설득 가능하거나 포섭 가능했으면 이렇게 악명이 높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한다고. 묘비는 우리 생명줄이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해.”
“그러다 진짜 죽으면….”
“시끄러. 끝까지 버티는 거다. 끝까지 버티면 다른 플레이어 놈들도 생각이 바뀔 거야. 날 믿어라!”
이 셋의 계획은 이거였다.
-지금이야 우리 죽이겠다고 날뛰지만, 계속 버텨서 대륙이 더워지고 더워지면 사람들도 협상에 나설 거다!
아무리 밉고 짜증 나도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협상에 나서게 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참더라도 그 이상 더워지면….
차라리 돈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묘비를 사겠다는 놈이 나올 것!
…물론 이 계획의 현실성을 따지기 전에, 일단 이 계획을 실행시키려면 그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래서 셋은 오스턴 왕국 북쪽 항구 도시, 벡텔 시에서 배를 타고 프로즈란드로 튀었다.
벡텔 시는 오스턴 왕국이지만 길드 동맹이나 미다스 길드가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무법도시!
덕분에 그들이 배를 사고 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즈란드는 진짜 너무너무 추웠다.
[<따끈따끈한 수프>의 지속효과가 끝납니다!]
[추위가 휘몰아칩니다!]
[이동속도가 내려갑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가벼운 동상> 상태가…]
[……]
[……]
“미치겠다. 뭔 놈의 추위가…!”
“추위 대비 포션은?”
“다 썼어.”
“숨기는 거 아니지?”
“이 자식이… 네가 숨기는 거 아냐?”
“야. 싸우지 마. 요리로 버텨.”
“요리 재료도 다 썼어….”
“…….”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식재료들이나 포션들이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프로즈란드에서 버티려면 끊임없이 포션을 먹거나 요리를 먹어서 추위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밖으로 나가는 건 자살행위!
‘젠장! 뭘 구하긴 해야 하는데.’
‘프로즈란드를 너무 얕봤어…!’
나름 대비를 했다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프로즈란드는 기존 맵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몬스터를 찾기도 힘들고, 찾는 동안 계속 추위로 데미지를 입어야 하고,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진짜 죽을 수도 있고….
그런 와중에 귓속말이 왔다.
-야! 우리 프로즈란드 왔다!
-우리도 쫓겨서 프로즈란드 왔다고. 서로 같이 돕는 게 낫지 않겠어? 어?
“?!?!”
“프로즈란드로 왔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걔네들이 어떻게 여기 와?”
“그, 그런가? 하지만 진짜 왔을지도 모르잖아. 길드 박살 나서 다 쫓기고 있는데.”
“으음….”
셋은 솔직히 흔들렸다.
길드원이 여기로 도망쳤다면….
물론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길드원들도 지금 쫓기고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숫자 좀 있나 본데?”
“일단 무시해 봐. 생각 좀 해보자.”
그러는 사이에 길드원은 짜증을 내더니 귓속말을 끊었다.
“야! 어떡해! 끊잖아!”
“내버려 둬! 다시 연락 올 거야.”
“…….”
“…….”
“안 오잖아 미친놈아! 어쩔 거야! 네가 나가서 재료 구해와!”
“아, 아니. 걱정 마. 지금 먼저 연락하면 될 테니까.”
* * *
‘그런데 카르바노그. 프로즈란드에서 주의할 만한 적들이 있나?’
[일단 수인족 부족들이 있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고대 수인족 부족들?’
[걔네들의 후손이라고 보면 된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냐?’
[카르바노그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딱히 원한이 없으면 그렇게 싸울 일 없을 테니 말입니다.]
‘…내가 걔네 선조들 쓸어버린 건 알고 있지?’
[앗.]
‘…뭐, 안 들키면 되니까….’
[맞다고 말합니다! 카르바노그도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수인족 부족들 말고도 거대한 괴수 몬스터들이나…]
‘뭐 그건 그렇겠지.’
[…옛날 고대 제국 시절에는 범죄자들을 보내기도 했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
범죄자들을 보내서 가두는 감옥!
프로즈란드만큼 딱 맞는 곳도 없었다. 탈출했다가는 얼어 죽을 것이고 돌아오기도 쉽지 않을 테니….
‘어. 그러면 고대 제국 시설 있나?’
태현은 눈빛을 반짝였다.
안 그래도 노드란체 이후로 고대 제국 도시를 찾으려는 태현이었다.
여러모로 이득인 퀘스트!
만약 프로즈란드에 고대 제국 도시가 남아 있다면….
‘게다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니 충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카르바노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있어봤자 그렇게 대단한 건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감옥으로 쓰이던 요새들 정도라 별로 대단한 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태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곳이든 간에 쓸 만한 거 하나는 있는 법이지. 노드란체도 그랬잖아.’
[아키서스의 노예처럼?]
‘…사람 말고 도시 이야기였어. 어쨌든 그건 좀 기대가 되는데.’
고대 제국과 관련된 퀘스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상이 강력한 데다가, 태현 같은 경우는 직업 퀘스트와도 연결이 됐다.
한 번 멸망한 아키서스 교단.
그 교단이 멀쩡했던 때는 바로 고대 제국이 있었을 때였던 것이다.
고대 제국의 유적을 찾으면 아키서스의 유물을 찾을 확률도 같이 올라간다!
[고대 제국의 범죄자들은 안 걱정하냐며 카르바노그가 의아해합니다.]
‘고대 제국이잖아? 다 죽었겠지.’
[아니, 언데드도 있는데….]
‘…….’
“김태현 님! 놈들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김태현 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길드원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모습에 앨콧은 어이없어했다.
저 자식들 뭐 김태현 부하냐?
‘왜 저렇게 고분고분해?’
누가 보면 김태현 길드원인 줄!
그 모습에 이다비가 살짝 질투 섞인 표정을 지었다.
‘보통 저건 내 역할인데…!’
‘이다비 씨가 왜 저러죠?’
‘약탈자들 주제에 태현이한테 친한 척 구는 게 싫었던 거 아닐까?’
‘헉. 그러면 케인 씨는….’
“일단 다들 변장한다. 케인. 팔 집어넣어라.”
케인의 팔이 슈슈슉 사라지자 길드원들은 기겁했다.
으악! 괴물이야!
“다들 위에 망토 두르고 최대한 초라하게 가자고.”
“갑옷도 벗을까?”
“갑옷 벗지 마. 추위 때문에 데미지 들어온다.”
일행의 대화에 앨콧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개소리야?’
프로즈란드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운데, 갑옷 하나 입냐 안 입냐로 차이가 나겠는가.
마법이나 포션으로 방어를 해야지 뭔 갑옷으로….
‘아무리 추위 내성 붙거나 화염 속성 붙었어도 막아질 게 아닐 텐데.’
“흠. 앨콧은 좀 춥겠군. 이거나 들어라.”
태현은 횃불을 꺼내 불을 붙여준 다음 건네줬다.
앨콧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나 놀리냐!?
“야. 이런 걸로 추위가 막아질 리가….”
[<사디크의 화염>이 프로즈란드의 추위를 막아냅니다!]
[데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
“?!?!?!”
막아지잖아?!
앨콧은 정말 깜짝 놀랐다.
보통 이런 횃불로 막을 수 있는 추위는 아주 약한 수준이었다.
프로즈란드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야. 이거 진짜 대단한 거 아니냐? 아키서스 성기사나 사제로 전직하면 사디크 권능 쪽으로 나갈 수도 있다면서. 이런 대단한 권능이 있는데 왜 안 밀어주는 거야?”
교단 관련 직업은 한 가지 방향이 아닌, 여러 가지 다양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회복 특화, 버프 특화, 공격 특화….
아키서스 교단도 비슷했다.
여기에 뺏어온 몇 가지 교단 권능들이 추가로 있을 뿐!
아키서스 성기사 중 원하는 사람은 사디크 권능 쪽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 대단한가?”
“그게 대단해? 구리지 않나?”
‘단체로 미쳤나?!’
앨콧은 기가 막혔다.
야! 이 정도면 좋은 권능이지!
추운 곳에서 특히 강력한 데다가 화염 쪽이니 공격력도 나름 있는데!
“흠… 생각도 못해봤군. 사디크가 너무 약해 보여서… 하긴. 네 말을 들으니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다들 관심이 없으니, 아키서스 교단에서 전직하는 플레이어들도 ‘다들 관심 없는 거 보니 별 볼 일 없나 보다’라고 신경 끄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예전 사디크 교단 소속 NPC나 플레이어들도 갈아타고 있을까!
“돌아가면 사디크 권능도 좋은 권능이라고 홍보 좀 해줘야겠다.”
“에이. 그렇게 홍보해도 안 들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사디크 권능은 솔직히 좀….”
앨콧은 갑자기 사디크 교단이 불쌍해졌다.
나름 악신 교단으로 대륙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한 놈들이지만….
어쩌다 이런 놈들 손에 교단이 넘어가서…!
* * *
약속장소에 도착한 일행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셋은 보이지 않았다.
“나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바로 공격하나?”
“아니. 좀 기다려야지.”
태현의 행운이라면 일단 공격했을 때 드랍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 셋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드래곤의 묘비보다 더 값진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약탈자 플레이어라면 각종 페널티를 달고 다닐 것이다.
태현의 행운+약탈자 페널티=한 번 죽으면 전 재산 뜯김!
무조건 공격하면 묘비를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놓고 나올 수도 있지.’
태현도 약탈자 플레이어는 한두 번 상대해 본 게 아니었다. 이런 식의 잔머리에는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