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85화
교단의 일로 보람을 느끼다니!
베켈프가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일까?
물론 아니었다. 베켈프는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아! 나는 행복한 드워프다!”
베켈프는 그렇게 말하고서 힐끗 시선을 돌렸다.
교단의 늙은 영웅들이 꾸벅꾸벅 졸면서도 흐뭇해하고 있었다.
‘미친 늙은이들!’
처음에는 태현에게 장로 감투를 받고 행복해한 베켈프였지만, 원래 베켈프는 교활하고 꾀가 많은 드워프였다.
애초에 멀쩡한 드워프였다면 태현의 제안을 받고 여기 오지 않았을 것!
-아. 망치질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쯧쯧… 나 때는 말이야. 망치질 그렇게 하면 어디 가서 대장장이라고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할….
-…크으으 으으으으….
게다가 교단의 늙은 영웅들은 훈수를 두는 걸 매우 매우 좋아했다.
베켈프는 태현에게 ‘제발 이 인간들 좀 치워주면 안 됩니까?’라고 하소연했지만, 태현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애초에 베켈프가 사고 치지 못하도록 배치한 감시역이었으니까!
그래도 베켈프는 꽤 오래 참았다.
그러나 옆에서는 훈수질에, 딱히 놀 것도 없고 괴롭힐 부하도 없자, 베켈프는 슬슬 좀 꾀를 부리고 싶어졌다.
‘으윽. 좀 놀면서 해야겠다.’
작업을 늦게 하면 아이템은 늦게 만들어지겠지만, 베켈프가 알 바 아니었다.
만약 태현이 와서 ‘왜 이렇게 줄었지?’라고 물으면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기의 중요성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폐하! 저 같은 장로가 혼자서 일하니 아무래도 힘이 달립니다. 작업의 효율을 올리려면 저 늙은이들을 치워주시고 쓸 만한 드워프 놈들 몇 명만 좀 데려다주시면….
이렇게!
그러나 베켈프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왜 손이 느리냐?”
“허허. 지금 꾀부리는 건가? 드워프 총각? 응?”
“아, 아니. 잠깐 숨 좀 돌리는 건데….”
“숨 좀 돌린다고? 그래. 지금 다 돌렸겠군. 다시 시작!”
베켈프는 울컥했다. 그는 망치를 내려놓고 따졌다.
쿵!
“아니! 나는 교단의 장로고, 폐하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실세인데! 감히 그렇게 명령해도 되나?!”
분노한 베켈프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영웅들을 공격했다.
이 늙은 인간들이 참아줬더니 아주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교단의 영웅들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놈이 왜 저러는 거냐?”
“흠. 교황 성하께서 뭐라고 하셨더라….”
교단의 영웅들은 태현이 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더라?
-저놈이 헛소리하면 그냥 패라.
“아. 그랬었군.”
“드워프 총각이 매를 원하나 보군그래.”
영웅들은 바로 몽둥이를 들었다.
마계에 들어가서 악마 공작 암살할 정도의 고렙 NPC들!
안 쓰던 무기를 들어도 그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베켈프는 당황해서 말했다.
“이, 이놈들… 나, 나는 장로다! 교단의 장로다! 폐하께서 너희를 용서치 않을 컥!”
힘, 체력 스탯 높은 드워프 종족도 무릎을 꿇게 만드는 영웅들의 힘!
늙은 영웅들의 손맛은 매콤해서 베켈프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퍽퍽퍽퍽퍽!
“드워프 총각! 정신이 드나!”
“으억! 컥! 크악! 용서치! 않을!”
“드워프 총각! 정신이 들면 말하게!”
“크아악! 크악!”
이러다 진짜 죽겠다!
베켈프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예! 예!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래? 그러면 다시 일하게.”
“몸이 아프고 쑤시는데 좀 쉬었다 하면….”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군. 드워프 총각?”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베켈프는 다시 망치를 들었다.
베켈프도 나름 고렙이었고, 대장장이다 보니 힘 스탯도 높았다.
그런데 그냥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제압당하다니!
‘뭐하는 늙은이들이야!?’
베켈프는 기겁했다. 만만해 보였는데 괴물들이었던 것이다.
땅, 땅, 땅-
베켈프는 결국 포기하고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태현을 만나서 직접 하소연하고 싶었는데 태현은 오지도 않고….
갑옷 사이에 쪽지라도 넣어놔야 하나?
-살려주세요! 미친 늙은이들이 절 가두고 협박하고 있어요!
“잘 하고 있지, 드워프 총각?”
“예, 예! 물론입니다! 너무 보람찹니다! 평생 이것만 하고 싶습니다! 다른 건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마침 대장간으로 들어온 태현이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 그랬나?”
아다만티움 작업 좀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더니….
“폐하! 폐하!”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다만티움은 내가 혼자서 열심히 해볼….”
“아닙니다! 아다만티움은 혼자서 다루실 만큼 만만한 물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을 뺏어가는 것도 좀….”
“아닙니다! 제발 도와드리게 해주십시오!”
뜨거운 베켈프의 태도에 다른 영웅들도 감탄했다.
“저 드워프 총각의 의지가 대단하군.”
“그렇게 아다만티움을 다루고 싶은 건가?”
* * *
오스턴 왕국!
길드 동맹에게는 길드의 피와 땀, 눈물이 녹아 있는 자랑스러운 땅이었다.
이 오스턴 왕국을 얻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갑질을 했었는가!
그러나 오스턴 왕국에서 놀지 않는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오스턴 왕국은 좀… 그렇지?
-게임 초반에는 내전 퀘스트 있었어도 나름 괜찮은 곳이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흉악한 곳이 됐는지….
플레이어들의 뜨뜻미지근한 시선!
길드 동맹은 억울했지만 최대한 게시판에서 해명을 하고 다녔다.
-아니거든?! 오스턴 왕국 멀쩡한 곳이거든?!
-니들이 안 해봐서 그래! 오스턴 왕국에서 플레이도 안 해본 놈들이!
-못 믿겠으면 플레이 영상을 보라고!
물론 그런 해명은 잘 먹히지 않았다.
-길드 동맹이 조작한 거 아니었어?
-저 영상 합성인 줄 알았는데….
-저걸 어떻게 합성해?!
-중국에는 그런 기술도 있는 줄 알았지 ㅎㅎ;
쓸데없는 신뢰!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의심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흉악한 퀘스트들이 오스턴 왕국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던가!
게임 시작할 때는 왕국 내전 퀘스트.
각 길드들이 영지전을 벌일 때에는 역병지대 퀘스트.
그리고 나서는 오크 대습격, 언데드 군대 대습격, 전 세계 산적 플레이어들 대습격, 엘프 함대 대습격, 악마 군세 대습격 등등등….
새삼스럽게 나열하고 보니 정말 미친 땅이었다.
이걸 다 버텨낸 길드 동맹이 대단하다 정말!
‘왠지 대부분이 김태현 때문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물론 저런 퀘스트들은 과장이 컸다.
퀘스트가 터지면 그쪽 도시나 지역만 피해를 받는 거지 드넓은 왕국 전체가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아니 왕국 전체가 타격을 받은 적도 좀 있긴 했지만….
그렇기에, 길드 동맹에게 악마 사신이 찾아온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오스턴 왕국>에 악마 공작이 보낸 사신이 찾아옵니다!]
[주의하십시오! 이들과 대화한 이후 협정을 맺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면 신성 스탯이 하락합니다!]
[악명이 오를 수 있습니다!]
술렁술렁-
길드 동맹의 간부들은 당황했다.
“악마 사신이 찾아오다니?”
“공격이 아니라?”
“함정 아닙니까? 김태현이 보낸?”
“김태현이 교단 운영하는데 어떻게 악마 사신을 보내?”
“그럼 이제까지 했던 것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매우 논리적 반박!
“그냥 수상쩍으면 김태현이 했다고 봐야 한다니까요.”
<길드 동맹> 안에서는 김태현 법칙이란 게 유행했다.
-네가 너무 운이 없다면 김태현을 의심하고 봐라!
놀랍게도 이 법칙이 맞을 확률은 절반이 넘는다는 것!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죠. 여기 성기사들이 몇인데 악마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김태현한테 했던 소리….”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아 혼자서 뭘 할 수 있구나!
“아, 좀 조용히 해 이 눈치 없는 자식아.”
다른 간부들은 신입 간부를 갈궜다.
재수 없게 이 자식이 정말!
“위대하신 오스턴 국왕의 지배자시여! 공작의 미천한 종이 그대를 뵙습니다!”
악마 사신은 넙죽 엎드리며 길드 동맹 간부들을 칭송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간부들은 의심하는 눈빛을 멈추지 않았다.
‘공손한 게 수상한데? 김태현 첩자 아냐?’
‘잘 차려입은 게 수상한데? 김태현 첩자 아냐?’
‘악마인 게 수상한데? 김태현 첩자 아냐?’
‘그냥 김태현 첩자 아닐까?’
그 태도에 악마 사신은 감탄했다.
‘만만치 않은 인간 놈들이군!’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갖고 온 제안은 분명 넘어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래. 무슨 이유로 여기 온 것이냐? 이 주변에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할 것이다!”
“저는 동맹을 제안하고자 왔습니다.”
“동맹? 너희를 어떻게 믿고?”
“믿어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는 아탈리 왕국이 목적입니다. 길만 열어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길드 동맹 간부들은 술렁거렸다.
-저거 믿어도 됩니까?
-잘 생각해 보니, 김태현이 마계에서 악마 공작들 공격하지 않았나? 악마 공작 성도 뺏었다던데….
-진짜라면 우리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우리 손 하나 안 쓰고!
꿈에도 그리던 복수 기회!
맨날 날로 먹던 태현 대신 이제 그들이 날로 먹는 것이다!
-쑤닝 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좋은 제안 같습니다! 저희가 뭐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악마 놈들 사냥 안 하고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내려갈 겁니다!
-으으음….
쑤닝은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태현과 상대하면서 몇 번이고 성장을 거듭해 온 쑤닝이었다.
수많은 실패로 단련된 불길한 직감!
이렇게 달콤한 제안에는 무언가 수상쩍은 게 있다!
그러나 간부들은 전원 다 찬성이었다. 쑤닝 혼자서 반대하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간부들의 불만도 신경 써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악마 사신은 눈치를 보더니 쐐기를 박기 위해 말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전리품을 바치겠습니다!”
“쑤닝 씨. 좋은 거 아닙니까?”
“으음.”
투자자들 쪽에서 보낸 직원들도 제안을 듣고는 대찬성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익인 제안 아닌가!
“좋다. 너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악명이 크게 오릅니다!]
[이 일이 알려질 경우 오스턴 왕국의 각 교단들이 크게 불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오스턴 왕국>의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악마를 사냥하지 않습니다.]
[<오스턴 왕국>의 성기사들이 일시적으로…]
[<오스턴 왕국>의 치안이 일시적으로 내려갑니다!]
[<오스턴 왕국>의 불만이…]
오스턴 왕국에 나타난 악마들이 아탈리 왕국으로 내려가는 동안 건드리지 않겠다는 계약!
여러 페널티가 있었지만 충분히 할 만한 계약이었다.
왕국에 나타나는 악마들이 아탈리 왕국만 가준다면 그게 어디인가!
간부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잠깐만. 그런데 저놈들 어디서 나타난 겁니까?”
“어디서 나타났냐니. 악마야 별의별 방법으로 다 소환되잖아.”
오스턴 왕국이야 세계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네크로맨서 NPC가 악마를 소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은데….”
“소환된 놈들이 알아서 뭉쳤겠지.”
“뭉쳤으면 어디서 뭉쳤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왕국이 얼마나 넓은데. 어디 산이나 숲, 지하나 그런 곳에 숨어 있겠지.”
“찾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걸 다 어떻게 찾냐?”
다른 간부의 핀잔에 그는 시무룩해졌다.
‘도시 근처에 악마들이 머무르고 있으면 위험한 거 아닌가…?’
등잔 밑이 어둡다!
길드 동맹은 설마 악마들이 오랫동안 왕국 도시 지하에서 암암리에 소환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 * *
땅, 땅, 땅-
“하나, 둘! 하나, 둘!”
베켈프의 외침에 따라 태현은 미친 듯이 망치를 휘두르고 불을 지폈다.
[최고급 대장장이 스킬을…]
[아다만티움을 다루는 데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
힘들다!
태현은 정말 오랜만에 치열함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