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79화
평소에 나름 이미지 좋던 사람들도 본색을 드러나게 만드는 이곳!
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사람들은 서로 믿지 못하고 저렇게 추악하게 싸우는지 모르겠군.’
[아키서스가 할 말은 아니라며 카르바노그가 냉정하게 말합니다.]
“비켜! 난… 난 여기서 질 놈이 아니야!”
멀리서 케인이 울부짖으며 어떻게든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려고 하는 게 보였다.
태현은 쯧쯧 혀를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일단 1층만 깨둬야지!
‘이렇게 협력해야 하는 곳만 더 없으면 좋겠는데.’
[저기 협력이 어디 있냐고 카르바노그가…]
* * *
다행히 그런 협력은 필요 없었다.
태현은 뛰고 구르고 피하고 날아서 간신히 1층을 클리어했다.
솔직히 말해서, 태현한테도 되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스탯 스킬 없이 이렇게 맨몸으로만 하는 돌파는!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 1층>을 클리어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스탯을 랜덤으로 고릅니다…]
[행운이 크게 오릅니다!]
‘아오!’
[아오!]
하필이면 행운이냐!
‘뭐. 됐어. 어차피 목적은 보물이었으니까….’
스탯을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다.
고대 제국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후한 보상!
…행운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고대 제국의 보물 중 하나를 무작위로 얻습니다.]
[<고대 제국의 강력한 공간이동 주문서>를 얻었습니다!]
“!”
[!]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신인데 왜 놀라?’
[그냥 분위기 맞춰봤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고맙다….’
분위기를 맞춰 준 카르바노그와 달리, <고대 제국의 강력한 공간이동 주문서>는 태현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보물이었다.
그만큼 고생을 한 보람이 있다!
‘일회용인 게 아쉽지만 이건 충분해.’
판온은 공간이동에 까다로운 게임이었다.
어디에서 어디를 가려면 직접 가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었고, 마법사들도 공간이동 마법을 펼치려면 각종 재료와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방해 마법이 펼쳐져 있으면 실패할 확률이 확 올라갔다.
고대 제국의 강력한 공간이동 주문서:
고대 제국의 뛰어난 마법사들이 힘을 불어넣은 공간이동 주문서다. 어지간한 마법 방해는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주문서는 확실히 보장된 정품 중의 정품!
태현처럼 적 많은 사람에게는 확실히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으음. 1층이 이 정도면 욕심이 더 생기는군. 문제는….’
[2층도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바로 그거지.’
태현은 내친김에 2층을 확인해 봤다.
2층은 더 심했다.
시작하자마자 나온 움직이는 발판 위에 탔더니 메시지창이 떴다.
[다섯 명을 태우면 움직입니다.]
[다섯 명 중 한 명을 떨어뜨리십시오.]
“…….”
[…….]
-포기.
태현은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1층부터 다시 하긴 해야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문제는….
“애들이 2층 오기 전까지는 나도 2층 못 깨는 거 아냐?”
[카르바노그가 고대 제국 애들한테 뭘 기대한 거냐고 묻습니다.]
“정말 쓰레기 같은 훈련장이군…!”
태현은 바로 카르바노그의 말에 공감했다.
이러니까 망했지!
“어쩔 수 없지. 공략 영상이라도 좀 만들어볼까….”
태현은 아쉬워하며 영상을 올릴 준비를 했다.
태현이 달린 루트를 공개한다면 센스 있는 놈들은 알아서 따라올 수 있으리라!
-이다비. 팀 KL 계정에 1층 공략 영상 올리려고 하는데.
-네? 대체 왜 그런 짓을?!
이다비는 깜짝 놀랐다.
-2층부터는 사람들 있어야 깨….
-아… 네….
이다비는 바로 납득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태현은 굳이 이곳저곳에 ‘공략 영상 올렸습니다’ 하고 광고하지 않았다.
그냥 팀 KL 계정에 하나 올리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팬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알아서 보는 것!
이다비는 진지하게 ‘팀 KL 이름으로 밥 차리고 먹는 영상 올려도 조회수가 나오지 않을까요?’ 하고 고민했지만, 케인이 ‘그거 올리면 나 또 욕먹을 거 같으니까 제발 참아줘’라고 말해서 참고 있었다.
-팀 KL,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 1층> 공략 영상.
태현이 올린 공략 영상!
아직 아무도 안 깬 미지의 훈련장을 공략하는 영상을 쿨하게 올리는 모습에, 모두가 환호하고 감사해하지….
못했다.
-!!! 김태현 공략 영상이다!
-오오 지금 하러 갑니다.
-??? 잠깐만.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여기서 뛰고 날아오는 거 차고 또 뛰라고?
-이거 합성 아닌가요?
-김태현이 합성을 하겠냐? 김태현은 진짜 이렇게 한 거야!
-아, 아니. 공략 영상이긴 한데 공략이 전혀 안 되는데….
-일단 이 루트대로 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거 나이 든 사람은 서러워서 판온 하겠나…! 이걸 어떻게 해!
공략 영상인데 봐도 공략이 안 되는 공략 영상!
많은 플레이어들이 태현의 영상을 보고 따라 하다가 피눈물을 흘렸다.
-여러분. 1분 14초가량 보면 김태현이 그냥 맨몸으로 뛰어서 함정 붙잡고 날아오르는데, 이거 그냥 기다리면 발판 나옵니다. 따라 하지 마세요!
-이거 2분 7초 때에….
졸지에 공략의 공략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태현은 왜 이렇게 했을까?’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까지!
태현의 길을 따라가되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어쨌든 목성은 달성한 셈이었다.
좀 이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 * *
[<고대 제국의 투기장>에 입장하셨습니다.]
[현재 <고대 제국의 투기장>에서는 토너먼트가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흠. 투기장은 평범하군.’
진행되는 이벤트나 퀘스트도 없었다. 아무래도 진행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딱히 건물이 부서져서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이유가 뭐지? NPC가 있어야 하나?’
[카르바노그가 기억을 되살리며 얼굴을 찌푸립니다.]
‘왜 그래?’
[카르바노그의 기억이 맞다면, 고대 제국의 투기장은 분명…]
‘???’
[모험가들끼리 싸우는 게 아닌, 고대 제국이 잡아 온 적들과 싸우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밖에 있는 괴수, <도시파괴자> 같은 놈들을 잡아 와서 싸움 붙이거나, 아니면 고대 수인족 부족 전사들과 싸움 붙이거나…]
‘…….’
태현의 표정이 굳었다.
진행되지 않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면 <도시파괴자> 같은 괴수랑 1:1로 붙었어야 할 뻔했다.
<제국의 즐거움-고대 제국의 투기장 토너먼트 퀘스트>
고대 제국의 사람들은 괴수와 사람을 맞붙여 놓고서 구경하는 품위 있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이제는 멸망해서 한동안 이뤄지지 못했지만, 고대 제국의 망령들은 이 유혈이 낭자한 취미를 다시 보고 싶어한다.
만약 투기장에서 다시 한번 고대 제국식 토너먼트를 열어준다면 그들은 크게 만족하리라.
보상: ?, ???, ????
‘흠. 이건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많은 퀘스트!
괴수 한 마리 잡아 오는 것도 일이었는데, 얘가 만약 탈주라도 한다면….
그날로 노드란체는 진짜 망한다!
‘안 그래도 남은 놈들 관리 때문에 고민인데.’
태현은 그냥 평범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김태현 선수!”
“?”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에반젤린과 함께 처음 보는 플레이어 여럿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제각각 모습은 달랐지만 하나 같이 랭커에 걸맞은 장비를 입고 있었고, 눈빛과 얼굴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스타를 만난 팬의 눈빛!
“진… 진… 진짜 팬입니다! 진짜 팬이에요! 김태현 선수. 판온 1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저리 비키지 못해? 김태현 선수. 저는 저 녀석보다 더 예전부터 팬이었습니다!”
“흠. 그렇군요.”
태현은 의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판온 1 때부터 팬이었다니.
암살자 아냐?
[…….]
에반젤린이 뒤늦게 따라 달려오며 말했다.
“헉헉… 얘네들이 그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선수들이야.”
“대니얼!”
“스콧!”
“킹태현넘버원입니다!”
“잠깐. 방금 뭔가 이상한 게 있었는데.”
태현은 오랜만에 당황을 느꼈다.
방금 뭔가 이상한 닉네임이 있지 않았나?
“다시 말해줄래?”
“저는 대니얼, <토론토 메이플베어즈>의 근접 딜러입니다. 직업은 <피 흘리는 검투사>고, 무기는 한손검과 소형 방패를 씁니다. 제 직업의 특성은….”
“아니. 그건 나중에 들을게. 다음.”
대니얼은 시무룩해져서 물러섰다.
“저는 스콧. <토론토 메이플베어즈>의 근접 딜러입니다. 직업은 <눈 먼 광전사>입니다. 무기는 철퇴를 쓰는데, 제 딜링의 비밀은….”
“아냐. 그것도 나중에 들을게.”
스콧도 시무룩해져서 물러섰다.
“저는 킹태현넘버원. <토론토 메이플베어즈>의 근접 딜러입니다.”
“…네 닉네임은 왜 그따구니?”
태현은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물론 꼭 판온을 실제 이름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태현은 본명을 쓰고 있었지만 케인은 닉네임 지어서 하고 있고….
근데 <킹태현넘버원>은 좀 아니지 않냐?!
“예! 저는 김태현 선수를 너무너무 존경해서입니다!”
“크윽. 저 자식. 점수 따는 거 봐.”
“치사한 놈…!”
심지어 다른 선수들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질투를 할 정도였다.
젠장! 부럽다!
나도 저렇게 지을걸!
“제 동생 닉네임은 <제너럴갓태현>….”
“…그만 말해도 된다.”
태현은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말렸다.
제발 판온하면서 <제너럴갓태현>이란 플레이어만 안 만났으면 좋겠다!
* * *
<토론토 메이플베어즈>는 괜찮은 팀이었다.
탱커들은 견실했고, 힐러들은 이타적인 플레이를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면 괜찮다!
-어그로 끌었어! 뒤로 빠져!
-힐 넣을 테니까! 버텨! 죽지 마!
에반젤린은 의외로 감독의 재질이 있었다.
팀원들의 합이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잘 맞았다.
‘그보다 뒤에서 미친놈처럼 소리치는 게 에반젤린인가?’
태현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에반젤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멀쩡하게 있으면서 경기 시작하면 미친 사람처럼 ‘아! 왜 그걸 못 봐!! 너희 다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녀?! 모자는 머리 장식이야?!’하고 외치고 있다니….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아니야. 아무것도. 하하.”
에반젤린이 의심쩍다는 듯이 쳐다보자 태현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딜러들도 잠재력이 있었다.
경기를 보니 완전히 밀리는 경기에서도 딜러들이 발광을 해서 이긴 경기들이 제법 됐다.
못할 때와 잘할 때의 차이가 크고, 상황 읽는 눈이 부족하고, 힐러와 탱커들이 죽어 나가도 ‘눈앞의 놈을 먼저 죽이겠다!’ 하면서 달려들어서 그렇지!
‘게다가 직업도 다 좀….’
다들 공격에 눈이 먼 것 같은 직업들뿐!
태현은 이런 타입들을 잘 알았다. 공격에 목숨 거는 근접형 딜러들!
자기 HP보다는 상대 HP를 보면서 먼저 죽이겠다는 식으로 덤벼드는 놈들이었다.
‘흠… 어떻게 조언을 해야 좋을까.’
-팀플레이! 알고 있지? 팀플레이!
에반젤린은 귓속말을 보내며 간절한 표정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제발 얘네들한테 ‘팀플레이’가 뭔지 가르쳐줘!
-믿는다? 진짜 믿는다?
-알겠어. 알겠어.
태현은 에반젤린을 안심시키고 딜러들과 함께 투기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태현도 팀플레이 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팀플레이는 포기하고 딜 스킬이나 정리해 줘야겠군.’
직업하고 스킬들 들은 다음 최적의 조합을 짜주는 것 정도가 태현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에반젤린이 들었다면 ‘야! 팀플레이! 팀플레이!’라고 외쳤을 생각!
태현이 그러고 있는 동안 선수 중 한 명이 두근두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태현 선수! 김태현 선수는 경기에서 상대방과 싸울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 나는 그냥 상대방을 무조건 한 명 끊겠다고 생각하는데.”
“오오… 오오오옷…!”
눈빛을 반짝이는 선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