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03화
-그러면 모두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땅 위를 자꾸 울리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노라.
-참으로 관대하신 처사이십니다, 주인님.
리치 자그가란은 사회생활 좀 해본 고블린답게 재빨리 아부를 했다.
“…갔, 갔나?”
“간 거 같은데??”
정령왕은 만족한 듯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밑에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플레이어들의 정신도 돌아왔다.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던 정령들도 사라진 상태!
“케인 놈! 이거 당장 풀지 못해?”
“맞아 이 자식아! 길드 동맹한테 네 위치 팔아버린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케인한테 성질을 내는 현상금 사냥꾼들!
태현이면 모를까 케인은 이상하게 만만하게 느껴졌다.
분명 상위권 랭커인데도 이상하게 호구 같은 이미지!
“저 저 저 무례한 놈들! 케인 경! 단칼에 베어버리십시오!”
“저런 건방진 놈들…! 케인! 뭐하나! 베어버려!”
기사도, 4왕자도 매우 분노했다.
케인은 욕해도 우리가 욕한다!
왜 니들이 욕하냐!
그러나 케인은 뭉클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이 자식들… 그래도 마계에서 같이 굴렀다고….’
마계에서부터 같이 동고동락한 덕분에, 케인은 친밀도와 충성도, 내부 평판이 거의 끝까지 오른 상태였다.
그런 케인이 무시당하자 기사들과 왕자는 바로 분노했다.
“기사들이잖아…?”
“에랑스 왕국 기사들 같은데….”
그 기세에는 플레이어들도 움찔했다.
숫자는 적었지만 기사는 기사!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싸우는 순간 에랑스 왕국에서 현상금이 걸릴 수도 있었다.
현상금 사냥꾼 플레이어들이 다 움찔하자 케인은 울컥했다.
이 자식들이 나는 안 무섭고 기사들은 무섭냐?
‘후. 진정하자.’
케인은 한 가지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럴 때 김태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럴 때 김태현이라면….
“…모두 다 꿇어 이 자식들아!”
“????”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인가?”
“야. 여기 우리 숫자가 몇 명인데 협박을….”
현상금 사냥꾼들이 수군거리자 뒤에 있던 랭커들도 눈치를 보며 귓속말을 나눴다.
-근데 지금 저놈들 우리 안 잡냐?
-케인 때문에 정신이 팔린 모양인데? 역시 세계 제일 탱ㅋ….
-헛소리하지 말고 지금 튀자!
-아니 근데 저주 안 풀렸잖아.
-저주는 나중에 풀면 되지! 지금 괜히 잡히면 골치 아파져! 저놈들이 케인한테 화낼 때….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정령왕의 충성의 낙인>이 저주를 내립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50%로 감소합니다!]
“…????!?!?!?”
“XX 뭐야!?!”
“XXX!”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전 세계의 다양한 욕!
저주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화끈하게 절반을 깎아버리는 저주라니.
과연 정령왕다운 저주!
그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케인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주가 뭔데 그래?”
“전체 능력치가 절반이 됐잖아 이 개자식아! 당장 이거 안 돌려놔??”
“오….”
케인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럴 때 김태현이라면?
“너희들이 지금 다 절반이 됐으면… 다 같이 덤벼도 못 이기겠구나?”
판온은 레벨이나 스탯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레벨 100 1명과 레벨 50 2명이 붙으면 레벨 100이 압승하는 것!
그런데 지금 다 절반으로 깎여 버렸으니….
이렇게 되면 인원이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었다.
전원이 고렙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잠, 잠깐.”
“케인 씨, 이러지 맙시다. 당신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김태현처럼 왜 그래?”
“선생님. 제가 잠깐 미쳤나 봅니다. 제가 요즘 깜빡깜빡하느라….”
“케인 님 저번 경기 잘 봤습니다. 솔직히 MVP는 당신….”
“아니 내 마음의 MVP는 원래부터….”
“시끄러워 이것들아!”
옆에서 4왕자가 조언을 내렸다.
“저 하찮은 놈들을 모조리 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끌고 가서 뭐 어떻게 하게?”
“하하. 케인.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저런 하찮은 놈들은 갖고 있으면 어디서든지 쓸모가 생긴다니까.”
4왕자는 귀족답게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언은 쓸모가 있는 조언이었다.
‘확실히….’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기에 길드 동맹이 그를 노릴 수도 있었으니까….
“좋다! 날 따라와라! 에랑스 왕국으로 간다!”
“???”
“아니 왜 에랑스 왕국으로… 무섭게….”
“우리 지금 감옥으로 가는 거 아니지?”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따라와!”
“김태현 오른팔?”
“김태현의 심복?”
“인간 폭탄?”
“방금 말한 놈들은 모두 다 저주다!”
“으아아악!”
* * *
그 많은 플레이어들을 거느리고 가자 한결 안심이 됐다.
-잠깐, 생각해 보니 이 랭커 놈들 아직 현상금 걸렸….
-으아악! 케인! 케인! 살려줘!
안에서 싸움이 일어날 뻔했지만, 케인이 말릴 수 있었다.
당장 명령을 거절하면 50% 깎이고 시작하는데 랭커들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근데 진짜 이놈들을 어따 써먹냐?’
퀘스트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지금 뭐 큰 싸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계 원정대도 잠시 돌아왔고….
‘그냥 김태현 골짜기에 박아놓을까?’
1년 동안 강제 영지 주민!
그나마 떠오른 생각 중에서는 가장 무난하고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현상금 사냥꾼들도 그 정도면 받아들일 것이다. 골짜기를 거점으로 하면 귀찮긴 하겠지만 못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마을이나 도시 등을 거점으로 삼으면, 죽을 경우 일반적으로 거기서 부활하고 영지에서 각종 혜택을 추가로 받았다.
있으면 쏠쏠하지만, 없어도 그렇게 괴로운 건 아니었다.
초보자 때야 많이 죽지만 고렙 이상쯤 되면 죽을 일이 확 줄어들었으니까.
“케인. 아버님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네. 아버님께서는 아주 까다로우시고 날카로우시니까.”
“알고 있거든?”
케인은 4왕자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귀족 NPC들을 상대해 보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 아니, 한두 번이긴 했지만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사실 생각해 보면 저 4왕자가 원흉!
‘네가 입만 안 털었으면…!’
케인이 노려보자 4왕자는 눈치가 보였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구시렁댔다.
“나 때문에 보상도 받게 되었으면서 너무 무례한….”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아, 아니야! 아닐세! 내가 말 잘못했어!”
왕자든 뭐든 눈 돌아가면 멱살부터 잡고 보는 케인!
이런데도 친밀도와 평판이 깎이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케인은 몰랐지만 태현이 옆에서 봤다면 ‘아니 이러는데 친밀도가 안 깎인다고!?’ 하고 기겁했을 일이었다.
왕궁 안에서 왕자의 멱살을 잡는 패기!
4왕자와 케인은 정말 타고난 영혼의 단짝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호위기사들의 명령에 따라 케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에랑스 국왕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일대일로 대면하는 건 처음!
‘쉐도우 엘프 풀어야 하나? 아니, 팔 6개보다는 쉐도우 엘프가 낫겠지.’
묘하게 슬퍼지는 고민!
[에랑스 왕국 국왕을 직접 대면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보고했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마계에서 귀환했을 때에도 보상을 받았지만, 국왕을 대면하자 추가로 보상을 받았다.
추가 보상인데도 3업!
그런데도 케인은 담담했다.
‘평범하군. 에이. 좀만 더 주지.’
태현을 따라다니면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보상!
워낙 대형 퀘스트들만 전문적으로 해왔기에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인 것이다.
물론 태현이 들었다면 한 대 뒤통수를 쳤을 소리!
“아탈리 국왕을 모시는 노ㅇ… 기사 아닌가. 이렇게 보게 되다니 기쁘구나.”
“감, 감사합니다.”
방금 노ㅇ라고 하지 않았나?
노ㅇ가 뭐지? 노인?
아쉽게도 케인에게는 대답을 말해줄 카르바노그 같은 신이 없었다.
“캐인.”
“예?”
“아니. 그대 말고.”
“앗. 죄송….”
케인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네가 선봉대로 나설 때만 해도, 내가 중독되었을 때는 나서지도 않던 새끼가….”
“폐, 폐하. 체통을….”
옆에 있던 시종장이 기겁해서 헛기침을 했다. 다른 왕국의 영웅도 와있는 상황에서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아 참. 미안하구나. 그래. 내가 중독되었을 때는 나서지도 않던 놈이 이제야 나서길래 지랄… 아니,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고 생각했었다.”
4왕자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에랑스 왕국의 국왕은 겉으로는 품위 있고 인자한 성군처럼 보였지만, 아들들은 잘 알고 있었다.
국왕이 얼마나 성질 더럽고 뒤끝이 심한 왕인지!
“네가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마계로 가 새로 요새를 세우고 그 주변을 평정하다니. 이는 실로 놀라운 공이다.”
“물론 제가 열심히….”
한 덕분이죠! 라고 말하려던 4왕자는 옆에 케인의 눈치를 봤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가는 왕 앞에서 케인이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한 것보다는 절 도와준 기사들과 케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랑스 왕국 국왕이 4왕자의 말에 크게 감탄합니다!]
“아니! 너라면 분명 네가 했다고 뻔뻔하게 개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
“…….”
케인과 캐인 모두 조용히 침묵했다. 케인은 캐인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 이제까지 어떻게 산 거냐?’
“네가 정말로 달라졌구나. 한 번 어떻게 지껄이나 보려고 했는데… 흠. 이게 다 케인 경 덕분이겠지. 영웅을 보고 배우다니.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기쁘다.”
“감, 감사합니다!”
만약 4왕자가 뻔뻔하게 말했다면 가차 없이 혼을 낼 생각이었지만, 왕은 생각을 바꿨다.
뻔뻔한 놈이지만 그래도 좀 이번에 철이 들었구나!
“케인 경. 고맙군. 그대 덕분에 철없는 애새끼… 아니, 철없는 아들놈이 정신을 차렸으니.”
“감, 감사합니다?”
“명성 높은 그대라면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겠지만….”
“아, 아닌ㄷ….”
말하려던 케인을 말린 건 4왕자였다.
쿡쿡쿡!
“…그래도 보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왕국의 명예가 부끄러울 터. 그대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싶군.”
“!!!”
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케인이 가기 전, 태현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야. 이 정도 퀘스트 보상이면 영지 줄 수도 있거든? 전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해.
앨콧이 남작 자리를 받은 걸 보면 케인도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심지어 4왕자가 직접 제안도 하지 않았던가. 그걸 멍청하게 말아먹었지만….
-이번에는 제발 사양하거나 하지 말고 꼭 받아라? 알겠지?
-아, 알고 있어. 나도 바보는 아니야. 이번에는 무조건 받는다!
-…….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아니… 불안해서. 후. 믿는다. 케인. 날려먹지 마!
‘아오. 김태현 이 자식은 날 너무 바보로 안다니까.’
물론 그가 좀 멍청하긴 했지만 그건 김태현과 비교해서였다.
판온 평균에 비교하면 높다고 케인은 자부하고 있었다.
“…듣고 있는가? 케인 경?”
“예? 예!”
“이 영지가 마음에 드나?”
쿡쿡쿡!
4왕자가 옆에서 옆구리를 미친 듯이 찔러댔다.
‘아. 오케이하란 건가?’
케인은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음에 듭니다!”
“아니… 정말인가?”
“예!”
“…아니… 그래도 이 영지는 좀….”
그러자 시종장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폐하! 케인 경이 욕심이 없고 명예로운 기사인 것을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이름을 지켜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이 영지는 좀… 그렇지 않나? 시종장. 그대가 제안한 이 영지를 케인 경에게 내린다면 밖에서 뭐라 하겠는가?”
‘…….’
그제야 케인은 뭔가 실수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