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99화
“뭐, 별일 아니었지.”
태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족 NPC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었나!
맨날 그러는데 놀랄 것도 없다!
그 모습이 더욱더 얄미워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배를 붙잡았다.
‘배가… 배가 아프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나. 부하들이 다 했는데.”
사실 이건 반쯤 진심이었다.
요새 건설을 누가 했겠는가.
“겸손하기까지! 역시 폐하… 역적, 크흠, 누구와는 다르신….”
“어느 누가 보고 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역적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귀족 NPC들은 힐끔거리며 쑤닝 쪽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태현은 깨달았다.
‘아. 역적이 쑤닝을 말하는 거군.’
나 말하는 줄 알았네!
[카르바노그도 살짝 쫄았다고 합니다.]
‘나도 그래.’
생각해 보니 태현은 역적을 잡고 오른 사람이었고, 쑤닝은 직접 쫓아내고 오른 사람이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그냥 다 역적 같긴 한데 뭐… 좋게 봐주니 가만히 있어야지.’
“쑤닝.”
“김태현.”
판온의 두 거물이 서로 마주 봤다. 길드원들은 긴장해서 얼굴을 굳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분위기!
과연 어떤 대화가 오고 갈 것인가?
‘혹시 길마님 정신줄 놓고 덤비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김태현하고 싸우면 에랑스 왕국 놈들도 김태현 편 들어줄 것 같은데.’
‘설마 길마님이 그러겠냐? 요즘 좀 상태가 오락가락하시는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신뢰가 많이 떨어진 쑤닝이었다.
“저번에 만나고 나서 오랜만인 것 같은데. 잘 지냈나?”
“누구만 아니었으면 잘 지냈겠지.”
쑤닝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평화 협정 해놓고 남의 광산을 탈탈 털어먹어?!
순간 쑤닝은 고개를 들어 하늘 위에 떠 있는 성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 대체 얼마나 털어간 거야…?!’
“아니, 잘츠 왕국 쪽에서 광산을 잃어버려서 그렇게 하소연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어쩔 수 없었다고.”
태현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퀘스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퀘스트고 뭐고 아무것도 안 받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카르바노그는 남이 말하지 않아도 찾아가서 고민을 해결해 주는 아키서스가 최고라고 합니다!]
“그러셨겠지.”
“쑤닝, 화난 거 아니지? 그렇지?”
“화 안 났다.”
“정말 화 안 났냐?”
“화 안 났다고!”
‘길마님….’
‘제발 체면 좀…!’
지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여기를 보고 있는데!
쑤닝은 태현을 보며 말했다.
“넌 리그 뛰는 놈이 여기 있어도 되냐? 다음 경기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준비 같이 하면서 하고 있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하는 태현.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당당해 다들 그렇게 믿어버렸다.
‘와. 준비도 하고 있나 보군.’
‘하긴 첫 경기에서 그렇게 발라버렸는데 준비를 안 했겠어? 위장전략이었던 거겠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포장이 된다.
그 전형적인 모습을 태현이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니, 이제까지 보여줬던 안일한 모습들이 ‘사실 전략이었나 봐!’로 포장이 되는 것!
만약 졌다면 ‘팀 KL, 리그를 얕보다’ 같은 기사들이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쑤닝. 혹시 상하이 팬더즈 팬이었으면 좀 미안하게 됐군.”
“나… 나 상하이 팬더즈 팬 아니다.”
‘어라? 상하이 팬더즈 팬 아니셨나?’
분명 상하이 팬더즈 경기할 때만 해도 ‘가라! 상하이 팬더즈! 연습 경기는 연습 경기일 뿐이다!’ 하며 외쳤던 것 같은데?
“아. 그래? 하긴, 중국 팀이 여러 개니 꼭 상하이 팬더즈 팬일 리는 없겠군. 그러면 홍콩 글래디에이터 팬?”
“무, 무슨 헛소리를…!”
쑤닝은 펄쩍 뛰었다.
현재투기장 리그의 중국 팀은 다섯 팀이 넘었다.
1부 팀이 총 20팀이었으니, 중국 E스포츠 팀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 팀은 단 4팀(물론 한 국가에서 1부 팀이 4팀이라는 것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거대 자본 지원을 받는 미국과 중국이 판온 리그를 이끌고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중국 팬들은 중국의 모든 팀들을 서로 응원하며 밀어주….
지 않았다.
그중 하나의 예외가 <홍콩 글래디에이터>!
홍콩 쪽에서 계속 반중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서 홍콩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한 게 <홍콩 글래디에이터>의 선수들이었다.
팬이라고 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지금 중국 쪽 기업들한테 빵빵한 투자를 받고 간신히 길드 동맹이 살아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왜 홍콩 글래디에이터 팬이라는 거냐!”
쑤닝은 아까보다 몇 배나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 자식이 누구를 잡으려고!
“어? 그냥 생각난 팀 물은 건데.”
“…….”
“그럼 어디 팬이지?”
“난 그러니까 음, 그래, 베이징 파이터즈 팬이다.”
급하게 댄 말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중국 팀 중에서도 베이징 파이터즈는 가장 탄탄한 전력을 갖고 있었고, 친선 경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으며, 첫 번째 경기도 이겼으니까.
무난한 강팀!
“흠… 그래. 알겠다.”
“…왜 물어본 거냐? 뭐 상대할 때 손속이라도 봐줄 생각이냐?”
“어, 아니. 그냥 별생각 없이 물어봤는데. 사실 왜 물어봤나 싶긴 하네.”
“…….”
말이라도 좀 상냥하게 해주면 어디 덧나냐?
쑤닝은 더 이상 대화하는 걸 포기했다. 태현과 말 섞어봤자 손해 보는 건 그라는 걸 이미 몇 차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흥. 마계에 가면 욕심 안 부리는 게 좋을 거다. 넌 도중에 대회 때문에 계속 빠져야 하지만, 우리는 계속 퀘스트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맞아, 김태현! 우린 리그에서 뛰는 주전 선수가 한 명도 없다고!”
“…그… 그래. 그거 좋겠다.”
태현은 처음으로 짠한 눈빛을 보냈다. 쑤닝은 방금 입을 연 길드원을 욕했다.
‘이런 멍청한 새끼…!’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
“그리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마계에 안 갈 건데?”
“…?”
“뭐?”
길드 동맹은 움찔했다.
그들은 당연히 태현이 아탈리 왕국 국왕의 자리를 갖고 원정대에 참가할 줄 알았다.
그거 때문에 저 희귀한 아티팩트로 만들어진 통로를 공개한 게 아니었나?
“난 영지 관리할 거야. 지금 하도 영지를 내버려 둬서 이것저것 할 게 많다고.”
영지 건설 관리부터 시작해서 아키서스 교단 관리에, 교단 영웅들 처리까지.
한 번 대형 퀘스트를 하고 오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교단 NPC들한테 어느 정도 자동으로 맡기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
게다가 태현의 영지는 워낙… 괴팍했다.
온갖 종족들이 모여드는데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
심심하면 [뱀파이어와 고블린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같은 퀘스트가 뜨는 것이다.
거기에 악마들이 찾아올 것까지 대비해서 한동안은 영지에서 수비를 해야 했다.
“아… 아니. 진짜 안 간다고?”
쑤닝은 당혹스러웠다.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거니 안도해야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다!
‘크윽… 이 자식은 가도 짜증 나고 안 가도 짜증 나!’
당연히 태현이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간다고 알게 되니 그건 그거대로 불안했던 것이다.
“쑤닝. 힘내라! 마계에서 열심히 하고!”
“…그, 그래.”
쑤닝은 뭔가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기분으로 움직였다.
원래는 ‘마계에서 어디 한번 경쟁해 보자!’라고 하려고 했는데…!
* * *
“으흐그흑흐긓ㄱ….”
“아. 그만 울어 좀.”
“그, 그대는 내 기사면서 날 생각하는 마음이 없나!”
“…마계에서 할 일은 내가 다 했거든?!”
케인은 팔 여섯 개로 4왕자의 멱살을 잡았다.
팔이 여러 개여서 할 수 있는 묘기!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그, 그대는 내 호위기사니까 당연히….”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야!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인마! 앞으로 또 이상한 퀘스트 받아 오기만 해봐라.”
케인은 씩씩거렸다.
지금 4왕자와 케인은 <버려진 땅 요새>에서 골짜기로 귀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향긋한 중앙 대륙의 공기!
마계와는 공기부터 달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
좌르르르륵 오르는 레벨 업 메시지창!
태현 일행에서 태현을 제외하면, 다들 대형 퀘스트 한 번 깰 때마다 레벨 업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케인처럼 많이 구른 사람은 더더욱!
괜히 다들 랭커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후. 이 맛이지.’
케인은 메시지창에 뿌듯하게 눈을 감았다.
태현을 따라다니면 고생은 많아도 그에 관한 보상은 확실하게 들어왔다.
다른 랭커들이 레벨 업에 허덕일 때, 케인은 태현의 퀘스트만 따라다니면 폭풍렙업이 가능했다.
‘이대로만 가면 최상위권 랭커도 노릴 수 있을지도…!’
케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4왕자와 같이 신전을 나섰다.
거울이 있는 아키서스 신전의 분위기는 묘하게 삼엄했다.
곳곳에 거대한 우리나 감옥도 보이고….
마치 누군가를 잡기 위해 준비한 것 같은 모습!
뭐지?
‘에이. 빨리 나가서 보상이나 받자.’
밖으로 나가자 에랑스 왕국의 원정대가 보였다.
자기들의 기사단을 끌고 온 고위 귀족들과, 그들의 부름을 받고 온 교단들의 고위 성기사들과 주교 NPC들.
겉모습만 봐도 어마어마함이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어, 국왕 폐하는 어디 계시지?”
“무슨 소리신가? 아버지께서 원정대에 참가하실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왕궁에 계시겠지.”
“앗.”
무슨 소리 하냐는 듯한 4왕자의 표정에 케인은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국왕이 그 위험한 원정에 미쳤다고 참가하겠는가!
‘김태현 때문에 개념이 이상해졌어…!’
“…근데 넌 왜 참가했냐?”
“크흠… 이미 지나간 일은… 어?”
4왕자가 말하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을 본 것이다.
“아, 아니. 형님들?”
“흥…!”
2왕자와 3왕자가 원정대에 있었던 것이다.
4왕자를 보자마자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둘!
케인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동질감을 느꼈다.
왠지 저 녀석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앗. 참가하기 싫은데 억지로 참가하게 된 거구나!’
“네놈이 쓸데없이 공명심을 부린 탓에 우리까지…!”
“눈치 없는 놈 같으니!”
“아니, 제가 뭘 했다고?”
4왕자는 당황했다. 왜 저러시는 것이지?
* * *
태현이 사신을 보내 ‘4왕자와 함께 요새 세우고 통로 확보했습니다’란 말을 하자 에랑스 왕국 국왕은 매우 매우 기뻐했다.
-보아라! 아탈리 국왕이 또 한 번 공을 세웠구나. 아무도 갖고 오지 못한 해독제를 갖고 온 것도 모자라 그 위험한 마계로 가서 또 한 번 공을 세우다니! 대륙에 이런 영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버님. 아탈리 국왕은 탐욕스럽고 야만스러운 자입니다.
-오, 내가 중독되었을 때 옮을까 봐 왕궁 밖으로 도망친 내 아들, 2왕자 토마스여. 방금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랑스 왕국 국왕은 국왕답게 뒤끝이 매우 매우 강했다.
악마의 독에 중독당했을 때 옮을까 봐 도망친 자식들에 대한 원한!
어찌나 실망했는지 태현을 양아들로 삼겠다는 말까지 했겠는가.
물론 왕자들은 펄쩍 뛰면서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차단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미친 소리였다.
-4왕자 캐인도 참으로 기특하다.
-흥. 분명 아탈리 국왕한테 업혀서 갔을 겁니다.
-호위기사 놈들한테 힘을 빌려서….
-그러면 너희들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예?
-그렇게 쉬운 거면 너희들도 할 수 있겠지?
-아, 아니. 아버님. 잠시만…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