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92화
‘썅… 완전히 잘못 판단했어.’
타오 첸은 한숨을 쉬며 각종 방어막과 버프를 준비했다.
팀 KL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중앙으로 가서 힘싸움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을 줄 알았다.
태현이 옆으로 돌 때도 대비했고 진형 사이로 파고들 때도 대비했었다.
문제는 태현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
그들이 준비한 수단들은 태현을 붙잡기에 부족했다.
디버프나 각종 공격이 안 들어간 건 아니지만, 태현은 버티고 흘려내면서 어떻게든 그들을 하나씩 잡아냈다.
두 명 쓰러진 이상부터 이미 그들의 패배였다.
-세 빛의 방어막, 오래된 성가!
<세 빛의 방어막>과 <오래된 성가> 스킬들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주 강력한 마법이었다.
‘오늘 쓰면 쿨타임 때문에 다음 경기에는 못 쓰겠지만… 그래도 써야겠다.’
강력한 스킬들은 쿨타임이 몇 분이나 몇 시간이 아닌 몇 일, 몇 달일 때도 있었다.
저 두 스킬들은 쿨타임이 무려 일주일!
이런 걸 계산해서 리그를 진행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게임단들은 아예 따로 이런 스킬들 스케줄표를 작성해 ‘이 경기에는 써도 된다’. ‘이 경기에는 쓰면 안 된다’ 같은 식으로 관리를 할 정도였다.
애초에 불리한 경기였기에 저 두 스킬은 최대한 쓰지 않고, 좀 만만한 팀 상대로 쓰기로 했었지만….
타오 첸은 계획을 바꿨다.
손익 때문이 아니라 체면 때문!
적당히 지는 건 애초에 각오하고 있었다. 리그를 진행하면 누구든 몇 번은 지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지는 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부딪혀 팽팽하게 싸우다 아깝게 진다→졌지만 잘 싸웠다.
김태현 혼자 들어왔는데 못 잡고 어버버하다가 전원 전멸했다→너희가 그러고도 프로냐??
최소한 체면은 세워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정말 게임단 모기업에서 철수 명령을 내릴지도 몰랐다.
‘일단 김태현한테 어떻게든 징표를 박아서 위치를 상시 파악해야 해. 한시라도 놓치면 위험하다.’
김태현을 견제하는 수단은 먹히긴 먹혔지만 너무 부족했다.
그러는 사이 김태현은 다섯 명을 더 죽인다!
그렇다면 방법은 김태현을 붙잡을 시간을 더 만드는 것뿐.
아까처럼 기습당하지 않고, 김태현의 위치를 미리 알고 대비한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아까 김태현 그놈은 진짜 미친 놈 같았지….’
타오 첸은 치를 떨었다.
사실 아까 그건 기습도 아니었다. 언덕 돈 순간부터 눈 마주쳤는데 그게 무슨 기습이란 말인가.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대비하고 난 다음에 시간이 남아서 던전까지 돌고 왔겠다!
오싹!
타오 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다시 몸이 떨렸다.
판온은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를 움직이다 보니 정신적 피로감이나 두려움이 현실에 가까웠다.
한 번 게임에서 크게 당하면 그 두려움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다.
‘아오 진짜 미친놈이 진짜… 어?’
-아아아! 타오 첸 선수! 늦었어요! 늦었어요! 지금 마법 쓸 때가 아니에요!
-장웨이 선수 막 부활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장웨이 선수가 나서서 김태현 선수를 막아주고 그사이에 타오 첸 선수가 부활 지점으로 빠져야 해요! 김태현 선수도 지금 부담감이 좀 있을 거거든요! 킬 버프를 받고 있지만 아직 HP가 다 회복 안 된 데다가 심지어 싸움 장소가 상대 부활 지점 앞이에요! 아무리 김태현 선수라도 훅 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장웨이 선수가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충분히 끌 수 있어요! 이건 상하이 팬더즈가 유리한 상황입니다. 타오 첸 선수만 빠지면 다시 부활 지점으로 들어가면 돼요!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다.
탱커가 시간을 끄는 사이 힐러가 부활 지점 안으로 도망친다!
아무리 태현이라도 그걸 어떻게 막겠는가?
그런데….
-어, 어, 어, 장웨이 선수! 뭐하는 겁니까! 움직여야 해요! 왜 안 움직이는 겁니까!
-부활 지점 안에서 나와야 해요! 타오 첸 선수 아직 마법 완성 안 됐어요! 지금 공격 받으면 김태현 선수한테 그냥 녹아내려요!!
모든 선수들이 완벽한 판단만 내리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는 법!
장웨이가 바로 그랬다.
머뭇거리면서 부활 지점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김태현을 막을 수 있을까? 괜히 나갔다가 같이 죽는 거 아냐? 아니, 첸도 보아하니 <세 빛의 방어막>하고 <오래된 성가>를 다 건 것 같은데 김태현 공격 정도는 버티면서 부활 지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야!’
동료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다!
말은 좋았지만 결국 겁먹어서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푹찍푹찍!!
-아아아! 아아아아아! 타오 첸 선수! 부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째로 죽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뭡니까!
-장웨이 선수! 이렇게 소심하게 굴면 안 되죠! 탱커가 왜 탱커입니까! 공격을 대신 맞아주니까 탱커 아닙니까! 힐러가 맞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다뇨!
장웨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타오 첸의 목을 딴 태현은 고개를 돌려 부활 지점 안에 있는 장웨이를 쳐다보았다.
‘저놈 안 나오나?’
부활 지점이 옆에 있으면 매우 유리했다.
싸우다가 불리하면 뒤로 빠지면 되고, 온갖 식으로 활용이 가능한 것이다.
무조건 싸워야 하는 상황!
근데 장웨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태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잘 모르지만 가만히 있어준다니 고맙다!
‘점령지로 돌아갈까… 아니. 근처 언덕 뒤에 숨어 있어봐야지.’
혹시 더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심의 끝!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은 또 한바탕 뒤집어졌다.
-아니 ㅋㅋㅋㅋㅋ
-김태현 뭐하냐??
-그냥 점령 좀 해! 상하이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대체 몇 명을 잡으려고….
-잠깐 지금 길목에 뭐 깔고 있는… 폭탄 덫 깐다!
-엌ㅋㅋㅋㅋㅋㅋㅋ
-대 장 장 이
-2탱 1딜 1힐 1대장장이 붐은 온다!
-붐이 오긴 뭘 와요 오다 터지겠다!
투기장 입장 직업은 제한이 없었지만, 사실 제작 직업은 거의 볼 수 없었다.
탱커, 딜러, 힐러 역할을 채우기도 모자란데 제작 직업을 어떻게 넣는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태현이 보여주는 대장장이 기술 스킬들은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남들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할 때 알려지지 않은 스킬들을 갖고 와서 선보이는 것.
태현이 인기 있는 이유!
-5 기공 대장장이 메타 어떠냐? 무조건 무승부 가능함.
-너 골짜기 출신이지?
* * *
완승.
1라운드는 팀 KL의 완승이었다. 상하이 팬더즈의 선수들은 심지어 점령지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부활 지점에서 나오다가 덫에 걸림→그사이 태현이 또 힐러를 끊고 튐→울며 겨자 먹기로 부활 지점으로 후퇴→다시 다섯 명으로 나오자 또 덫과 폭탄으로 흐트러뜨린 다음 습격해서 힐러 끊음→이제 슬슬 점령 시간이 위험해서 눈물을 머금고 네 명으로 점령지 돌진→킬 버프가 쌓이고 쌓일 대로 태현이 덤벼들자 다시 한 번 갈려 나감→끝!
아무리 상하이 팬더즈가 불리하더라도, 점령지에 발도 디디지 못하고 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압승! 압승입니다! 팀 KL, 정말 강합니다! 비싼 시설이 없어도! 화려한 지원이 없어도! 선수들 간의 믿음과 단결만으로도 정상의 자격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해설가가 흥분해서 외치는 말에 사람들은 열광하면서도….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근데 김태현 혼자 다 했는데 믿음과 단결이 어울리…나?
-김태현이 혼자서 다 잡고 올 거라는 (믿음).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꾹 참고 기다리는 (단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는 사이 해설가의 흥분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결과를 보고도 누가 팀 KL을 의심하겠습니까! 팀 KL을 혹평한 전문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경기였습니다!
-상하이 팬더즈 쪽이 오늘 1승을 따내기 위해서는 남은 2라운드를 전부 이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많이 불리한 상황. 상하이 팬더즈가 뒤집을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0은 아닙니다! 언제나 경기는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2라운드의 맵은… 아, 이거 재밌습니다! <종말의 황야>! 진검승부 그 자체인 맵입니다!
언덕이 이곳저곳에 있어 서로의 위치를 볼 수 없는 초원과 달리, 황야 맵은 정말 아무런 장애물 없이 탁 트인 지형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맵! 가운데의 점령지를 두고 혈전이 벌어질 겁니다.
-과연 상하이 팬더즈는 김태현 선수를 어떻게 막을 생각일까요!
-사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 저 선수를 어떻게 막나요! 현역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 * *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어!”
상하이 팬더즈 감독이 그렇게 외쳤지만 선수들의 멘탈은 이미 박살이 나고 가루가 된 뒤였다.
특히 힐러인 탓에 태현이 집요하게 쫓아오는 걸 몇 번이고 경험한 타오 첸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장웨이! 네가 힐러를 지켜줘야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요…!”
“그걸 말이라고! 김태현 막는 방법은 다 이야기했잖아!”
막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결국 요점은 ‘느리게 만들고’, ‘회피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는 턱도 없습니다! 느려져도 막을 건 다 막고, 쫓아올 건 다 쫓아옵니다!”
“분명 데미지가 꽤 들어갔을 텐데도 꿈쩍도 하지 않아요! 그 자식 혹시 탱커 아닙니까?”
“탱커는 무슨! 김태현은 분명히 딜러다! HP가 그리 많지 않아! 너희들이 지레 겁먹고 빼지 않았다면 놈이 먼저 무너졌을 거다!”
“…….”
“…….”
선수들은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감독은 ‘김태현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고 있다! 한 번만 무너뜨리면 돼!’라고 말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달랐던 것이다.
그들에게 태현은 레벨이 백 넘게 차이 나는 보스 몬스터처럼 느껴졌다.
“잘 들어! 이번 맵은 아까와 다르다. 김태현이 몸을 숨기고 접근할 곳은 없어. 먼저 발견하고 디버프를 누적시켜! <필멸의 저주>와 <쇠퇴하는 악몽>을 같이 5스택 이상 쌓으란 말이다. 그러면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공격이 두 번에 한 번은 들어갈 테니까! 점령지는 내버려 둬! 김태현만 묶고 이탈시키는데 성공하면 얼마든지 역전 가능해!”
“…예!”
선수들은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
그래.
그들도 랭커!
게임에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당한 적은 없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 주리라!
* * *
“음. 내가 조금 막나가긴 했다.”
2라운드 시작 전. 태현은 간단하게 반성했다.
“조금?”
“조… 조금?”
“조금?”
“조용히 해. 케인.”
“맞아요.”
“조용히 하십시오. 케인 씨.”
“왜 나만?!”
다 같이 ‘조금’거리길래 자기도 했다가 괜히 구박만 들은 케인!
“원래 상대 진형을 살짝 흐트러뜨리고 견적만 낸 다음 빠질 생각이었는데….”
“…….”
대체 어떻게 그게 올킬로 가냐?
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2라운드는 좀 침착하게 가봐야지. 케인. 네가 선봉이다. 보니까 저쪽이 작정하고 스킬들을 준비해 왔는데 다 맞아주면 좀 위험하겠어.”
“나만 믿어! 내가 다 맞아줄 테니까!”
“…맞을 생각하기 전에 막을 생각을 해….”
“앗.”
그렇게 말은 했어도 태현은 케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케인은 탱커로서 여러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건….
바로 덩치!
‘…라고 말하면 상처받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