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88화
자그가란과 지하 연합 고블린들은 뜨겁게 말다툼을 했다.
진정한 고블린이 살아야 하는 삶은 어떤 삶이냐, 고블린은 기계공학만 파야 하느냐,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매우 높은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말다툼에 끼어들어 중재하거나 다른 한쪽을 도울 수 있습니다.]
[패배한 쪽은 당신에게 원한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안 껴야지.’
[카르바노그가 현명한 선택이라고 칭찬합니다. 종족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너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니?’
확실히 카르바노그 말대로, 저기 싸움에는 껴봤자 남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말다툼은 다시 랭커들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싸우나 봐!”
“이제 저렇게 계속 싸우다가 누가 먼저 선빵 치면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는 거지…!”
“우리 집도 명절에 자주 저러는데, 언제나 끝은 멱살 잡으면서 끝났다고! 분명히 싸운다!”
“야….”
제발 싸워다오!
랭커들은 다 제각각 속셈이 달랐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일치했다.
이번에 싸우지 않으면 정말 그들은 이 던전을 공략하면서 한 게 거의 없는 것이다.
한 게 있다면 골렘 잡으면서 서로 추잡하게 다툰 거 정도?
“후. 네놈을 더 따끔하게 혼내야 하겠지만 일이 바쁘니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내가 할 소리다! 어디서 고리타분한 놈들이 기어 들어와서 이 난리인 거냐, 흥!
하지만 고블린들은 아까 말한 랭커의 집안보다 훨씬 더 사이가 좋은 종족이었다.
싸워도 적당히 싸우는 이들!
말다툼을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자 적당히 타협을 하고 물러서는 것이다.
“아… 안 돼…!!!”
“안 돼에에에에!”
랭커들은 비통하게 울어댔다. 그러자 리치 자그가란은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모험가 놈들은 왜 저러는 거냐 대체?
“네가 기계공학을 버리고 흑마법의 길에 간 게 비통해서 그렇다!”
-아. 닥쳐라 좀!
자그가란은 질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리치가 되기 전, 고블린 마을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고블린 장로들이 저런 훈계만 해대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고블린이 무슨 흑마법이냐, 네가 미친 것이냐, 아이고, 아이고, 이놈이 전통을 무시한다! 마을 고블린들 이놈 좀 보시오!’ 같은 훈계!
말이 훈계지 지긋지긋한 괴롭힘에 가까웠다. 왜 자그가란이 마을을 떠나서 흑마법을 배우기 시작했겠는가.
동족이 싫어서!
‘스타우 같은 놈이군.’
고블린 괴식 요리사 스타우!
고블린들은 유난히 저렇게 동족에서 떨어져 나온 아웃사이더들이 많이 보였다.
물론 스타우는 요리가 하도 무시무시해서 쫓겨난 것에 가까웠지만….
자그가란은 차라리 태현이 대화 상대로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걸었다.
-저놈들은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뭐,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대체 내가 소환해낸 언데드들을 어떻게 뺏은 거냐?
“느부캇네살의 흑마법을 이었다.”
사실은 화술에 가까웠지만!
-느… 느부캇네살의 흑마법을 잇다니! 그거 정말 대단하군!
자그가란은 깜짝 놀랐다. 흑마법사라면 좋으나 싫으나 느부캇네살이란 이름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어마어마한 죽음의 기운이 폭발하던 게… 느부캇네살의 강림이 사실이었던 거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가란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느부캇네살이… 널 보낸 거냐?
자그가란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흑마법사들이라고 모두 느부캇네살을 좋아하진 않았다.
자기가 혼자 다 통치해 먹겠다는 걸 좋게 봐줄 흑마법사가 어디 있겠는가.
자그가란도 그중 하나였다.
고블린 장로들 잔소리 듣기 싫어서 마을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느부캇네살 잔소리 들으면서 부하 생활이라니.
절대 사절이다!
“아니. 느부캇네살은 쓰러졌다. 난 놈을 쓰러뜨리고 이어받은 거고.”
[리치 자그가란이 당신의 업적에 매우 감탄합니다!]
[친밀도가 크게 오릅니다!]
-대단한 흑마법사였군! 나보다 더!
[카르바노그가 사기 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저쪽에서 알아서 오해하는 걸 어떻게 하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자그가란은 혼자서 납득을 끝낸 모양이었다.
느부캇네살의 진전을 이은 흑마법사가 느부캇네살을 막은 게 분명하다고!
-정말 고맙다! 많은 흑마법사들이 네게 빚을 진 거다! 잠깐. 그런데 이곳은 왜 온 거지?
“광산이 필요해서….”
태현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수리를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금속이 필요하다고.
자그가란은 그 말을 듣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도와줄 수 있지. 내 언데드들을….
자그가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언데드들은 다 사라져서 없었다.
-…다시 소환해서 말이야!
“…그래!”
서로 민망해진 둘!
[리치 자그가란이 <불길한 어둠의 광산>의 이용을 허락합니다!]
[<불길한 어둠의 광산>의 출입이 허가됩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퀘스트 <광산의 행방불명…>이 해결되었습니다!]
[퀘스트 <산에 출몰하는 언데드…>가 해결되었습니다!]
[퀘스트…]
[……]
‘오오.’
남들이 싸울 때, 싸우지 않고 대화로 해결해 경험치를 받는 것.
이것이 화술 스킬의 진정한 활용법이었다.
이론상 무적!
[카르바노그가 아까 골렘하고 언데드 패던 건 까먹었냐고 묻습니다.]
‘그건 철의 대화라고 하자.’
광산 이용 허락받고, 심지어 보스 몬스터 지원까지 받은 이상 이 광산은 어지간해서 클리어되었다고 보면 됐다.
“8층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혹시 막는 이유가 있나?”
태현은 리치의 영혼이 담겨 있는 성물함 같은 게 8층 밑에 있나 싶었다.
그런 거라면 굳이 리치 자그가란과 싸울 필요 없이 다른 광산을 턴다!
던전 완전 클리어 보너스가 아깝긴 했지만, 괜히 적 하나 더 만들어 둘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오스턴 왕국 쪽 영역에서는 더더욱.
-아… 그거.
리치 자그가란은 해골을 딱딱 움직이며 곤란한 표정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안 내려가는 게 좋을 텐데. 정령왕이 있거든.
“정… 령왕?”
자그가란은 이 주변 광산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그냥 평범한 광산들이었지만, 광산 지하 대공동에 어느 날 강력한 정령왕이 소환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진 정령왕 탓에 광산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고, 꿀에 벌레들이 몰려들듯 온갖 놈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 승자들이 바로 리치들!
리치들은 정령왕과 만나 직접 계약하는 데 성공했고, 정령왕에게 보상을 받는 대신 광산을 보금자리로 꾸리며 정령왕에게 찾아드는 잡놈들을 막아주기로 했다.
일종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지만, 자존심 강한 리치들이 받아들일 정도로 정령왕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들?”
[들?]
-리치들. 이 근처에서 지하 대공동으로 연결된 광산들은 다 리치들이 막고 있는데.
“…!”
미공략 던전들은 그래서였나!
태현은 이 근처 미공략 던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깨달았다.
정령왕이 있는 깊은 지하 심처로 연결된 광산들은 전부 다 리치들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우린 <잘츠 왕국 리치 협회>라고 부르고 있지. 후후. 이런 말 하면 좀 쑥스럽지만 내가 회장이다.
“…….”
[…….]
태현은 할 말을 순간 잃었다가 급히 대답했다.
“대… 대단하군!”
[와! 대단해!]
자그가란의 표정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매우 칭찬을 원하는 표정이었던 것!
“잠깐. 지금 다른 광산들도 공략하려고 했는데 그 리치들과 또 싸워야 하나?”
-그럴 필요 있나. 내가 연락을 보낼 테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광산의 광석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날 텐데 그거 내주는 게 뭐 어렵다고.
쿨하게 허락해 주는 자그가란!
뒤에서 멍하니 듣고 있던 랭커들은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저건 진짜 안 된다!
“아… 안 돼!!!”
“잡아야 해! 잡아야 한다고! 걔네들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잖아!”
-잘리협 소속 리치들을 뭘로 보는 거냐? 서로의 부탁을 안 들어줄 정도로 매정하진 않다.
“너희들은 리치 주제에 왜 이렇게 끈끈한 건데!”
랭커들은 울부짖었다.
뭔 놈의 리치들이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냐!
질투하고 시기하고 반목해야지!
태현은 랭커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잘됐네. 수리 시간이 몇 배로 빨라지겠어.”
광산에서 소모전 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처리 완료!
생각보다 일이 훨씬 쉽게 풀린 셈이었다.
-정령왕을 만나고 싶다면 내려가서 물어볼까?
“아니. 굳이.”
태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어차피 만나면 싸우게 될 가능성이 99%인데 굳이 뭐하러 만나냐고 합니다.]
‘…….’
카르바노그의 팩트폭력!
‘꼭 그래서는 아니거든…?’
사실 그래서 맞았다.
안 그래도 지금 너무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정령왕 정도 되는 보스 몬스터와 사이가 틀어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선순위는 광산의 채굴이기도 하고!
싸우더라도 일단 캘 건 다 캐놔야 했다.
“좋다! 고블린들! 이야기가 다 됐으니 지금부터 다시 채굴이다!”
“와! 좋습니다, 폐하!”
-저것들 빨리 좀 데리고 나가라!
자그가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지하 연합 고블린들을 대했다.
입만 열면 짜증 나는 놈들 같으니라구!
태현은 엎드려 우는 랭커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 우는 거 아니지?”
“안… 안 울거든….”
* * *
-정령왕님. 침입자가 있었지만 나쁜 자는 아니었습니다. 제 선에서 처리했습니다.
리치 자그가란은 위에서 태현과 고블린들이 공사를 하는 사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정령왕과의 계약!
정령왕에게서 마력을 받는 대신 정령왕이 시키는 잡무를 하는 것이 조건이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광산에 들어오는 놈들은 모두 느낄 수 있으니까.
어두컴컴한 대공동 속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어가 대면한다면 마력으로 굳어 버릴 정도의 목소리!
-네가 왜 내려온 건지 알겠다. 자그가란. 아키서스의 화신이 나를 접견하고 싶다고 허락을 구한 거겠지? 허락하겠다.
-예? 아닙니다만.
-…뭐라?
땅의 정령왕은 당황했다.
그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나?
아키서스의 화신이 이런 광산까지 들어왔다는 건, 정령들에게서 그의 정보를 듣고 만나기 위해 온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광석만 캐고 나가겠다고 하던데요.
-…그다음에 접견하고 싶다고 한 게 아니라?
-뵙고 싶다는 이야기 자체를 안 했습니다만?
-…….
-…???
* * *
<잘츠 왕국 리치 협회>은 의외로 멀쩡한 조직이었다.
랭커들의 바람과는 달리, 다른 리치들도 자그가란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준 것!
게다가 태현이 의외로 리치들한테 호감이라는 점도 컸다.
느부캇네살을 막아준 위대한 흑마법사!
-뭐? 광석? 광석?! 마음껏 가져가게.
-광석이야 뭐… 마음껏 퍼가라!
그 결과 지하 연합 고블린들과 아키서스의 키메라들은 근처 광산에서 신나게 광석을 캐내 올렸다.
-이 근처에 올 일 있으면 들러라. 인간.
“잘 있어라. 자그가란. 다음에 들를 일 있으면 또 올게.”
퍼올린 광석들로 하늘성의 수리와 보강을 마친 태현은 자그가란과 훈훈하게 이별했다.
잘츠 왕국 국경 산맥에 이런 놈들이 있었다니!
‘…생각해 보니 잘츠 왕국에 사람 조금만 더 많았어도 나름 정보가 퍼졌을 텐데.’
얼마나 사람이 적었으면…!
“후. 그래도 간신히 시간에 맞출 수 있었군.”
“무슨 시간?”
“투기장 리그. 이제 하늘성 띄우고 경기 나갈 준비 좀 해야지.”
“…….”
“…….”
그 말을 들은 랭커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